☆말씀요약☆
내 아들 압살롬아
<삼하 18:19-19:8>
압살롬이 죽은 소식을 듣고 다윗이 부르짖는 인류 최대의 비극적인 구절이 나온다. 압살롬이 죽은 소식을 다윗에게 전하는 것을 가지고 많은 구절에 할애하고 있다. 어떤 구절은 왕이 되는 구절임에도 슥 지나가기도 한다. 그런데 이렇게 길게 나온다는 것은 중요하다는 것이다. 우리도 그 본문을 심각하게 생각하고 묵상해야 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엘리엘리 나마사막단이라고 부르짖으셨는데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하고 돌아가셨다. 하나님도 아들을 같은 장소에서 죽이셨고 다윗도 똑같은 장소에서 압살롬의 죽음을 맛보았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다윗의 생각을 너무 모르고 전쟁의 승리만을 전하는 열성파와 죽은 사실을 전하는 사실파와 다윗의 김정을 꿰뚫어 아는데도 대적하는 대적파가 있다. 그들은 다윗이 원하는 일을 하지도 않았고 좋은 소식을 전하지도 못했다. 모두가 다윗 편의 사람이다. 이들은 창자가 끊어지는 다윗의 통곡을 알지도 못하고 좋은 소식을 전해지도 못했는데 왜일까?
1. 구속사의 시각을 가지지 못하였다.
19-24절) 오늘 본문에 3사람이 나온다. 제사장 사독의 아들 아히마아스와 구스 노예와 요압이 나온다. 다들 다윗을 사랑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다윗이 압살롬을 왜 너그럽게 해달라고하는지도 모르고 죽인 것에 대한 가책이 없다. 그러니 내 아들 압살롬아가 저절로 나온다. 구속사의 시각은 날이 갈수록 이 세상에서 구별되어가는 것인데 그래서 성도의 인생은 외롭다. 압살롬의 죽은 소식에 대해서 열성파 아히마아스는 19절에 보면 압살롬의 죽음을 여호와께서 왕의 원수갚아주신 소식이라고 말한다. 물론 이긴 것을 말한 것이지만 결과적으로 압살롬을 이긴 것이기 때문에 압살롬을 다윗의 원수라고 칭하고 있는 것이 아히마아스는 죄와 죄인을 분리하지 못한 것을 볼 수 있다. 아히마아스는 좋은 소식을 다윗에게 전하고 공을 차지하고 싶었기에 요압이 왜 가지 말라고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요압이 말린 것은 그래도 아히마아스가 큰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말린 것이었다. 그러나 한사코 강청을 하니 다윗에게 거역하는 사람이 아히마아스에는 무슨 사랑이 있었겠는가? 그래서 가라고 했다. 대적파 요압은 전쟁의 승리를 염두해 두지 않을 정도로 다윗이 슬퍼할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아말렉소년과 이스보셋의 경우를 보면서 압살롬이 죽었다면 그 소식을 가져간 사람은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사울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한 아말렉 소년도 왜 기름부은 자를 죽였나며 죽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히마아스에게 가지말라고 하였다. 순수한 마음에서라기보다 다윗의 명령을 어겼기에 내 생각대로하는 것은 충성해 놓고도 떳떳하지 못한 것이다. 요압은 구속사의 믿음은 없으면서 다윗이 압살롬을 죽이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 너무 무섭다. 요압은 죄와 죄인을 분리하라고 그다지 너그럽게 해달라고 했는데 압살롬이 나무에 걸리자 숨이 붙어있는 그에게 요압은 한마디도 아버지의 사랑을 말하지 않고 용서와 구원의 복음을 전하지도 않고 그냥 세 번이나 확인사살을 하였다. 전혀 다윗과 구속사의 가치관과 공감대가 형성되지 못하였다. 목장에서 전혀 못 알아듣는 용서의 복음을 들을 수 있다. 다윗의 아들사랑은 거절되었다. 하나님이 다윗을 사랑하신 것같이 압살롬도 알게 될 것이라 생각했는데 소망이 거절당하였다. 다윗은 구속사의 사랑을 알았지만 같이 믿으면서 요압은 그것을 모른다.
21절 사실파 구스인 노예를 택해서 전하게 하였다. 이방인이기에 부담도 없고 중요한 직책에 있지 않았기에 죽어도 전혀 가책이 없었다. 구스 노예는 엄청난 상이 될 줄 알고 기뻐 전하러 갔다. 그러나 기뻐해야할 이 소식은 다윗에게 가장 슬픈 소식이 되었다. 나에게 유익한 것이 무엇인가가 믿음이 아니다. 믿음은 나는 무엇을 위해 사느냐이다. 우리의 모든 행동을 아들이 보고 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 우리는 믿음이 있나? 우린 구속사적 시각이 있는가? 그렇게 사는가?
2. 구속사적 사랑은 무엇인가?
압살롬이 죽은 소식은 다윗군대에게는 기쁜 소식이었지만 다윗 개인에게는 너무 슬픈 소식이었다. 다윗의 지금까지 수많은 통곡과 수많은 경험을 하였다. 그러나 압살롬의 죽음은 비교가 안 될 결정판적 슬픔이었다. 그만큼 다윗이 압살롬을 사랑하였다. 사랑은 옳고 그름이 아니다. 사랑은 자기의 죄를 회개하며 가는 길이다. 다윗이 도망가는데 베냐민의 시므이가 피를 흘린 자여 사악한 자여 니가 피를 흘렸기 때문에 니 나라를 압살롬에게 넘기셨다고 저주할 때 맞다 내가 하나님께 들어야 하는 소리구나라고 시인하였다. 압살롬의 반역 때도 맨발로 기드론 광야기를 울며 머리를 풀어헤치고 가면서 평생의 친구 아히도벨의 배신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빈 몸으로 왕복도 벗고 가는 그 광야에서 드디어 다윗은 옛날의 믿음을 회복하였다. 완전히 밑바닥으로 내려가니 요단 광야로가는 그길은 예수님께서 고난받고 올라가시던 그 길이다. 시므이에게 저주받고 아히도벨과 압살롬에게 배신을 당한 후에 다윗은 이 세상에 의지할 것이 아무것도 없어지니 하나님께 깊이 깊이 의지하게 되었다. 그래서 아히도벨의 배신에 대해서 할 일이 없으니 아히도벨의 모략이 어리석게 해달라 했는데 그것이 응답되었다. 기도가 회복되었고 말씀이 회복되기 시작하였다. 그 공이 압살롬에게 있다. 그래서 다윗은 압살롬이 회복될 것이라고 기대하였다. 너그러이 대해달라는 것은 회복의 결정체였다. 압살롬때문에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알게 되었기에 사울을 용서하는 것과는 또다른 놀라운 사랑으로 압살롬을 용서하게 되었다. 사람은 의지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뼛속 깊이 깨달으면서 이렇게 깨닫게 해준 압살롬이 고마웠을 것이다. 내 죄때문에 수고한 압살롬에게 어떻게 원한이 있을까. 왜냐면 압살롬은 자기 자신이었다. 이전에 자기 자녀들이 사로잡혀가고 동료들이 돌을 던져 죽이려고 할 때 울기력이 없이 울었을 때 사울이 죽였다. 사울이 괴롭힌 것과 자기 아들 압살롬이 자기를 괴롭힌 것은 비교가 안 되는 전쟁이었다. 사울이 자기를 괴롭힌 것은 남들이 다 인정해준다. 노아의 방주에서도 마지막 싸움은 자기와의 싸움이라고 했다. 압살롬은 자식이고 자신이다. 자식은 곧 나이기에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자식이 걸어가는 것은 곧 내가 걸어가는 것이다. 그런 자식이 아버지를 반역하였다. 이겨도 져도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싸움이었다. 인생의 모든 싸움은 압살롬의 전쟁까지 가야 한다. 자녀가 학교를 붙고 떨어져도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 곳까지 가야 예수님의 조상이 된다. 돈벌어 잘 살게 되도 좋지도 기쁘지도 않은 거기까지 가야 한다. 우리가 당하고 있는 남편, 자녀와의 싸움, 경제적 질병의 싸움에서 누구때문에 이렇게 됐다고 하는 사람은 갈 길이 아직 먼 것이다. 다윗은 누구와의 탓을 하지 않는 나와의 싸움을 하고 있다. 내 마지막 원수는 내 육신이다. 내가 누리고 싶은 것이 많아 힘든 것이다. 그 누구때문도 아니다.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때문에 너무 감사하고 그런 것이 아니다. 어떤 것 때문에 너무 좋고 싫은 것이 없어지는 것이 믿음이다. 인간은 다음 세가지를 유지하고자 한다. 책임감 중독이라는 글을 쓴 로저 마틴에 의하면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지배가치가 있다고 한다.
1) 절대로 질수없다. 이겨야 한다.
2) 언제나 상황을 통제해야한다.
3) 끝까지 이성적인 자세를 유지해야한다.
사람들은 이런 걸 지키기 위해 발버둥을 친다. 압살롬이 그랬다. 그런데 다윗은 자식과의 문제가 되니 아무것도 지킬 수 없음을 알았다. 그것을 알게 되면서 부터 도리어 이기고 통제하고 이성을 찾게 되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도 나 자신과의 싸움이다. 이 기가막힌 진리를 다윗이 압살롬 때문에 알게 되었기에 압살롬도 그것을 알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런 압살롬에 대한 감사함이 다윗의 부하들에게는 없었다. 다윗과 똑같이 전쟁을 치렀지만 내 자식이 아니었기에 이 깊이와 높이와 넓이를 모른다. 다윗처럼 아프지 않기에 알려고 하지도 않고 알지도 못한다. 다윗은 부하들이 압살롬이 새 사람되기를 같이 기도해주기를 원했고 그 사랑을 알기를 원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압살롬의 사망 소식을 좋은 소식으로 전해왔다. 다윗은 외로웠다. 누구도 믿음의 대상은 아니다. 인간은 철이 드는 순간부터 외로운 길을 갈 수밖에 없다. 내가 외롭다는 것을 알아주면 신기하다. 그러나 알아주지 않아도 외로움을 안고 인정하고 가야 한다. 다른 길이 없다. 다윗의 인생을 보니 외로움의 극치임을 알게 된다.
구속사는 옳고 그름이 아니다. 구원을 위한 것이다. 그러나 구속사를 생각해야 하는 교회에서 옳고 그름을 따지며 사람을 죽인다. 이제 구원의 과정에서 본다면 아히도벨의 계략도 따를 수 있다. 똑같은 일도 구원의 일이 될 수도 사탄의 일이 될수도 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와 있다고 하면서 나쁜 놈이라 죽이고 감정도 없이 압살롬이 죽은 것에 대해 말하는 사람도 있다. 다윗이 원하는 것은 압살롬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인데 같은 마음을 가진 부하가 없다. 다윗은 밑바닥에서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알았지만 사람들은 경험하지 못하기에 알수가 없다. 사람은 요압의 역할, 압살롬의 역할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이 있다. 압살롬을 죽이지 않았다면 돌아왔겠어요? 라고 물으려고 한다. 물론 이것은 천상의 어전회의에서 결정된 일이다. 압살롬은 돌아오지 않을 사람이었기에 요압이 그를 죽이게 된 것이다. 왜 누구는 요압의 역할을 하고 압살롬의 역할을 하는가? 다 자가기 주인되고 싶고 항상 이기고 통제하고 싶기에 이런 질문을 끝없이 한다. 왜 이런 역할을 누가 해야하는가하는 사람은 자리가 탐나기 때문이다. 누구는 그 역할하고 싶어서 하느냐? 우리는 인생의 주인이 하나님이 되어야 하는데 아니니까 계속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이다. 구속사의 사랑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다음과 같은 것이 구속사의 사랑이다.
간증) 엘레베이터에서 꼭 안고 기도하는 아버지.
믿음이란 옳고 그르고를 떠나서 사람자체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이다. 다윗의 부하들은 압살롬자체에게 아무 관심이 없었다. 다윗은 그렇지 않았다.
우리는 사람에게 관심이 있나? 자녀가 내 문제임을 인정하는가? 자녀의 고통을 제거하기 위해 노력하는가? 그냥 자녀 곁에서 견디면서 바라보고 있는가? 우리는 자녀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3. 너는 내 아들이다. 이래도 저래도 너는 내아들이라고 하신다.
24-32절) 다윗은 눈이 짓무를 정도로 기다리고 있었다. 탕자가 돌아오길 기다리듯이.. 그리고 요압의 성정을 잘 알고 있었던 다윗은 노심초사했을 것이다. 이 전쟁의 책임은 자기에게 있었기에 아무말없이 기다렸다. 아히마아스는 전쟁이 끝났다는 소식을 가져왔지만 구스사람은 압살롬이 죽은 소식을 가져왔다. 아히마아스가 좋은 사람이니 좋은 소식을 가져오면 얼마나 좋을까? 좋은 사람이 좋은 소식을 전하는 것은 아니다. 좋은 사람 좋은 소식이 있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소식은 복음이다. 나를 위로하는 것이 아닌 십자가 복음이다. 이 세상은 공평한 세상이 아니다. 하나님만이 공평하시다. 그러나 하나님 자체가 이 세상에 오셔서 공평한 세상을 살다 가시지 않으셨다. 십자가는 예수님이 얼마나 공평하지 못한 시대를 살다 가셨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주님이 가장 불공평한 세상을 살다 가셨다. 이 세상은 불공평해라는 말을 할 필요없다. 좋은 소식은 공평한 소식이 아니라 불공평한 세상에서 구원의 소식을 듣는 것이 가장 좋은 소식이다. 압살롬의 죽음을 듣고 다윗은 생애 최고의 슬픔을 토하고 있다.
33절) 한 절에서 압살롬이 3번, 내 아들이 5번이 나온다.
1-4절) 다윗이 절규하며 부르짖는다. 백성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아무도 다윗에 대해 해석을 하는 사람이 없다. 압살롬을 향한 다윗의 통곡은 다윗은 회개의 울부짖음이었다. 압살롬의 죽음이 밧세바를 겁탈한 죄의 결과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밧세바와의 범죄 후에 세 명의 자녀를 잃었다. 밧세바와의 아이와 암논과 압살롬이 죽었다. 부성애로 울고 죄 때문에 울고. 내 아들 압살롬아는 사랑과 회개와 아픔을 모두 포함한다. 죽었어도 살았어도 슬픈 인생인데 죽었으니 구원의 기회가 없다는 것이 창자가 끊어질 슬픔이었다. 그 아들을 천국에서 만날 기회가 없었다. 그리고 아들들이 자꾸 구원못받고 죽어가고 있다. 생명을 초월한 부모의 자식사랑이라는 것이 바로 이 하나님의 마음인데. 물론 압살롬은 100번 죽여 마땅한 죄인이다. 그런데 그 아들을 위해 내가 대신 죽었더라면 울부짖고 있다. 이것은 신비이다. 조금만 손해보아도 펄펄 뛰는 이 세상에서 이런 억울함을 당하고도 초월적 사랑을 보여질 수 있는 것이 구속사적 사랑이다. 그러나 구속사를 알지 못하면 불가능하다. 다윗은 구속사의 사랑을 알았다. 그 부모는 자식을 잊을 지라도 하나님은 결코 자녀를 잊지 않으신다. 우리가 어떤 죄를 지었어도 성문에서 기다리는 다윗처럼 우리 하나님 아버지도 우리를 기다리시고 염려하시고 너는 내아들이라고 맞아줄 준비를 하신다. 무엇보다 자식을 보며 통곡하는 다윗을 보며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했으면 좋겠다. 이 세상에 나를 누가 사랑하겠어 저 놈을 누가 사랑하겠어라는 마음이 있어도 너는 내 아들이라고 불러주신다. 자식들이 이 땅에서 구속사의 사랑을 모르면 아버지를 사랑해도 아버지가 두렵다. 앞서말한 간증에서 경찰서에 간 아들을 두들겨 패는 경우 자식이 나니까 너무 자존심이 상하기 때문이다.
말씀이 없으면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갈지를 모른다. 왜냐면 우리의 지배가치는 이겨야하니까 통제해야하니까. 이를 셀프컨트롤한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만이 우리의 두려움을 피해 막아주실 수 있으시다. 성경에 두려워 하지말라가 365번 나온다. 매일 두려워 말라 하신다.
가장 좋은 소식은 구원의 소식이다.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구원의 소식을 알려야 하지 않을까? 너는 내 아들이라는 말이 들리나? 우리 자녀에게나 나에게나 너는 내 아들이라고 하신다.
4. 다같이 일어나야 한다.
5-8절) 요압이 일어나라고 협박한다. 요압의 충고는 다윗을 제자리에 돌아오게 했다. 택한자는 무슨 말을 들어도 협력하여 선을 행한다. 진정한 회복은 사명의 자리에 돌아오는 것이다. 지나가 보면 다윗에게 모두 필요한 사람이었다. 발빠른 아히마아스의 순종과 순수함도 필요했고 사실을 전하는 구스사람도 필요했다. 때마다 다윗의 발목을 잡는 요압이지만 악하고 악한 세상에서 더디오는 구원가운데 이런 기회주의적인 역할이 필요했다. 최선의 선택을 늘 고민하지만 우리는 할 수 없다. 요압은 때마다 반역하면서 다윗은 떠나지 않는다. 그러면서 압살롬에게 가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기쁨을 느끼며 사역하지도 않는다. 다윗도 완전하지 않다. 나도 완전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에게 사명을 바라고 있다. 김양재 목사 설교는 좋지만 교회는 가기 싫다 한다. 너무 안타깝다. 이것이 이원론이다. 다윗과 요압은 끝까지 간다. 사람들에게 인기있는 사람은 다윗이지 요압이 아니다. 요압은 실무처리에 늘 욕을 먹는다. 다윗의 손에 피를 묻히는 역할을 늘 그가 한다. 모두가 거듭나고 성숙한 사람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다윗은 여자가 많았어도 외로운 인생을 살다 갔다.
같은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다같이 가야하는 것을 인정하나?
☆나눔☆
새로 오픈한 카페에서 달콤한 차를 마시며 나눔을 하였습니다. 민혜는 사정상 예배만 참석하고 목장에는 참석하지 못하여 4명이서 나눔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2주나 못나눈 민혜 보고싶소..
보드매니아 혀니. 영적 업다운과 다양한 사건으로 그동안 양육을 못하다 이번 주에 다시 시작을 했습니다. 토요일에 보드를 타기 위하여 주중에 열심히 숙제를 해두다 보니 여러모로 시간이 빠듯한 와중에 건드려주는 직장 상사의 수고와 보드를 타러 가기로 했다 취소한 친구의 수고로 혈기가 드러났지만 말씀 안에 있는 혀니이기에 바로 죄를 보고 친구에게 사과해주는 센스!!! 양육 중 혀니가 변하니 가족 간의 관계에서 회복의 조짐이 조금씩 보이고 있습니다. 항상 이기기 위해 살던 우리 혀니가 달라졌어요!! 엄마를 우리들교회에 데리고 오기 위해 진지하게 대화도 하고 아빠에게 사랑스럽게 편지도 쓰고 오빠에게 문자도 하는 혀니. 혀니가 바로 서있는 한 모든 가족이 하나님 안에서 바로 설 것이라는 기대감이 있습니다.^^
귀요미 융지. 이 날은 융지의 날이었습니다. 우선 아픈 몸으로 항상 목장을 참석하는 이쁜 우리 융지. 얼굴색이 한결 좋아져 목장에서 매우 기뻐했습니다. 나눔내내 컨디션이 좋았던 융지는 매력이 폭발했다는.. 융지를 통해서 전도된 회사분에게 툴툴거리지만 그 분의 눈에도 저희의 눈에도 너무 귀엽기만 합니다. 하고 싶은 것들이 너무 많았지만 건강을 치시는 사건으로 많은 것을 내려놓고 있는 융지. 다 움켜쥐고 있어야 마음이 편할 것 같고 그것들을 손에서 놓으면 죽을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손에서 놓으니 마음이 너무 편하다고 합니다. 적용으로 신청한 토플과 텝스 시험도 패스^^ 가족들도 목장식구들도 융지만 생각하면 눈물이 주르르.. 그럼에도 주변에 사마리아인들을 많이 주셔서 폭풍사랑받으며 고난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융지 건강을 위해 많은 중보 부탁드려요!!!!
이 날따라 더 해맑았던 미지엉니. ㅎㅎ 항상 좋은게 좋은거다라고 생각하고 살아왔기에 THINK하는 훈련이 쉽지가 않습니다. 그런 가치관 때문에 모든 사람과 환경을 좋게만 생각했던 언니. 우리들교회에 오고 상담을 받는 과정에서 그동안의 가치관을 가지고 살았던 자신의 모습과 그로 인해 일어난 사건들을 보며 미지언니 속의 과거 언니와 계속 직면을 하고 있습니다. 많은 부분이 해결되긴 했지만 아직도 남아있는 모습을 보며 회개하는 엉니. 목자를 왜 시켜주신 건지 모르겠다며 항상 두렵고 떨린다고 말하는 겸손한 목자엉니입니다.^^
그리고 나. 가족 안에 3파가 모두 있습니다. 승리만 이야기하는 열성파인 나, 사실만 이야기하는 사실파이며 아빠의 속을 다 꿰뚫고 있음에도 대적하는 대적파 오빠, 그리고 또다른 아빠의 대적파 엄마. 항상 칭찬받고 싶었기에 좋은 소식만 전하고 싶은 나의 모습이 아직도 남아있어 아빠가 가게를 2개 차렸다는 사실을 하나님이 먼저 알게 하셨음에도 가족이 쑥대밭될까 두려움에 그 소식을 엄마와 오빠에게 전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속에 숨어있던 영적 교만함. 그럼에도 성령님께서는 아빠와 엄마, 오빠의 마음속에서 일하고 계십니다. 돌이켜보면 하나님 안에서 조금씩 전진하고 있는 가족들. 진정한 회복을 위해 사명의 자리에 잘 서있기로 다짐해보았습니다.
이 주 나눔은 사실 초큼 멘붕이었습니다. 흩어짐의 소식을 듣게 되었기에 ㅜ_ㅜ 역시 하나님은 너무 좋은 것은 오래 주지 않으신다는.. 다들 너무 따뜻하고 말씀에 대한 사모함이 있어 매 주 큐티 릴레이를 하며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었던 목장이기에 마음이 짠하시만.. 흩어짐의 축복을 누리는 걸로.. 마무리. 몇 주 남지 않은 시간동안 더 많이 나누고 서로를 더 많이 체휼할 수 있기를.. 가족에 대한 구속사적 사랑을 느끼며 내 사랑하는 가족아 내 사랑하는 가족아 하며 알흠다운 마무리를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담주는 미네까지 꼭 참석하길 바라며~ 마지막까지 파이팅!!
☆기도제목☆
*미지*
1. 아픈 마음 회복하고 예수님과 더 친해지도록
2. 중등부와 목장 사명 잘 감당할 지혜 주시기를
3. 회사에서 성실히 일할수 있도록
*윤지*
1. 고혈압과 빈맥, 위가 잘 균형점을 찾아가도록.
2. 말씀보며 평안 유지하기를
3. 회사분의 건강 회복 교회에 잘 정착하시길 !
*현희*
1. 양육 기간 얼마남지 #50618;었는데 집중해서 숙제도하고 은혜많이 받을수 있도록
2. 건강지키는 지혜를 주시도록
3. 엄마 아빠 오빠의 영혼구원네대한 애통함을 갖길...
4. 이번주에 외할머니께 꼭 갈수있길~할머니의 영혼구원과 머지막 천국가실때까지 평안하시도록
*원미*
1. 학교에서 죄와 죄인을 분리해서 사랑으로 아이들을 대할수있게
2. 아빠가 직면하고 적용할 때에 돕는 손길주셔서 가게가 잘 정리될 수 있게
3. 오빠와 엄마의 믿음회복 그리고 오빠의 신교제, 신결혼
4. 고등부 유리, 하림이는 예비번호 예빈이는 정시원서 넣는데 평안한 마음으로 기다리도록
5. 새로 배치될 목장을 위해
6. 유정이가 힘든 가운데 있는데 힘주시고 바로설수있는 마음주시도록
*민혜*
1. 엄마 12월 마지막주 교회 꼭 같이 와서 예배 드릴 수 있도록
2. 남자친구와의 관계속에서 하나님의 사랑 더욱 더 느낄 수 있도록
3. 1/22~24 처음가는 교회 수련회 모든일정 다 참석 할 수 있도록 회사일 바쁘지 않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