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시는 것
[사무엘하 10:1-19]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시는 대로 행하기를 원한다라는 본문. 이것이 이기는 비결.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시는 것
1 은총을 베푸는 것
하눈은 은총을 모르기에 사람을 분별하지 못하고, 다윗을 분별하지 못하고 그러나 [하눈: 은총을 구하다 부탁하다 애걸하다 의 뜻] 은총을 구해야 하는 사람이 은총의 뜻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다윗은 기도한것을 여호와께서 거절하셔서 복을 누렸는데 하눈은 다윗의 은총을 거절해서 거절의 화를 받고, 거절이라기 보다 다윗의 은총을 모독했다. 이렇게 언약백성과 백성이 아닌 차이가 아주 크다. 소속이 다르니 엄청난 차이가 있다. 하눈은 그래도 이방백성이지만 같이 사는 부부도, 미갈같은 경우는 끝까지 은총을 아주 하찮게 여기고 고마운것이 없이 여기니 은총이 내려가지 않는 것. 같은 족속이여도 은총을 모르는 자와는 통하지 않는다. 하나님과 독특한 관계에 있는 것이 언약이고 은총. 하나님과의 관계가 없기에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를 알지 못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을 모독하는 대표적인 사람이 된 하눈.
이렇게 원수를 생각할 때 원수는 물에 새기고 은혜는 돌에 새기라는 말이 있으나 우리는 대부분 거꾸로 생각하기에 받은대로 돌려준다고 생각하니까 나라마다, 집집마다 전쟁이 일어난다. 암몬은 이렇게 다윗을 조롱하다가 결국 큰 전쟁이 일어나 파국을 맞게 된다.
-은혜를 원수로 갚은 사람이 있는가
-잊지 못할 조롱을 받아본적이 있는가
2 어떤 경우에도 자기 회개가 있는 사람
왜 다윗의 은총이 이렇게 모독을 받았을까? 다윗은 그런 상황에서도 어떻게 이렇게 침착할 수 있었을까? 생각을 해봐야 한다.
다윗은 하눈에게 은총을 베풀려 했지만 오히려 굉장한 수치를 당했다. 그런데 왜 다윗이 가만히 있었을까? 다윗이 생각을 해보니 이것이 '내 삶의 결론이다'라고 생각했다.다윗이 사울에게 쫒겨 다닐때 결코 화친을 해서는 안되는 암몬 왕 나하스와 화친을 했었다. 나하스는 다윗에게 은총을 베풀어 주었다. 왜 손을 잡았었을까? 장인인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하였는데, 지나고 나서 보니까 나하스의 도움은 어두움의 돈, 사단의 돈, 검은 돈이었다. 자신이 죽을것 같으니까 그 도움을 받았다. 장인이 죽이려고 하는데, 나하스는 장인의 원수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그럴때는 나하스와 다윗이 한마음이 될 수 있었던 것. 하나님을 믿으려면 끝까지 믿어야 한다. 암몬의 도움도 받으면 안되는 것이었으나, 지금 내가 죽을 것 같으니까, 굶어 죽을 것 같으니까 어떻게 이 도움을 안받을 수가 있겠는가. 이런것들을 생각할 때 인생이 너무 슬픈 것이다. 다윗은 나하스와 하나가 되었던 것이, 나하스도 자기가 기업을 다 빼앗기고 바닥으로 내려가니까 일순간 은총이 찾아오고 하나님의 언약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왜냐하면 고난이 축복이니까. 그래서 다윗과 나하스는 한마음이 되었다. 특별히 은총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언약[헤세드]를 안다는 것. 아무리 암몬이지만 나하스와 다윗은 잠시는, 일시적인 화평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아들이게 내려가지는 않았다. 아들은 이것을 알지 못하고, '사울집안은 우리 집안, 기업을 말아먹은 집안'으로만 알고 있기에 은총이 내려가지 않고, 원수집안이 되었고, 그 원수집안의 왕의 조문사절단으로 오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저게 스파이로 왔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 입장을 생각하면 다 이해가 되는 것이다. 하눈은 나쁜 놈, 다윗은 좋은 사람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하눈이 은혜를 원수로 갚으려고 했는데, 그것이 당연히 그럴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근데 이렇게 다윗이 하눈에게 수치를 당하고 나니까 하나님이 딱 이제 다윗에게 깨달으라고 수치를 주셨구나, 믿는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자기 죄를 회개하면 이기는 것이다. 그런데 죄를 안보면은 그것은 끝까지 어둠의 길을 가겠지만, 자기 죄를 보면 그때부터 이기는 것이다. 내 속의 죄가 이렇게 있는지 나도 모르는 것.
하눈은 회개하지 않고 자기마음대로 한다. 회개하지 않는 사람이 하는 것이 무엇이 선한것이 있겠는가. 사업이고 연애고 결혼이고 회개하지 않는 사람이 하는 것은 전부다 망하는 길로 가는 것, 왕이고 스펙이 좋고 해도 하나님 없는 사람이 하는 것은 정말 위험한 것. 어떠한 죄를 지었어도 살아날 유일한 길은 회개하는 것. 회개를 하면 그 때부터 살아나고 이기는 비결이다. 과거부터 생각하면은 내가 잘못한 것이 전부 맞다. 믿는 사람은 100% 잘못한 것이 생각나기 마련이다. 옳고 그름으로 그만 따지고 자기가 잘못한 것을 생각해보기 바란다.
-지금 내가 당하는 것은 내 삶의 결론이라고 고백을 하고 있는가?
-지금 내가 회개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
3 공의를 행하는 것
요압은 선발하고 선발한 군사를 데리고 나갔고, 나머지는 동생 아비새에게 맡겨 암몬의 군대를 치게 한다. 요압은 담대하게 나가자고 용기를 북돋으며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우리가 우리 백성과 우리하나님의 성읍들을 위하여' 공동체를 위하여 담대히 하자고 외친다. 승패의 주권을 주님께 맡기고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시는대로 행하시기를 원하노라고 외친다. 믿음 가지고 나갔다. 이기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았다. 이제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시는대로 행하시기를 원하노라. 모든 것을 맡기는 기도를 하고 나간 사람과, 돈에 끌려서 돈받고 나온 사람과는 이것은 승패가 갈리게 되어 있다. 사울에게 쫒겨다니던 시절 다윗도 연약했다. 온전하지 못했다. 다윗이 온전해서 이긴 것이 아니다.
한마디로 싸우기도 전에 용병들이 다 도망을 갔다. 너무 놀라서. 돈을 주고 산 아람 사람이 다 도망가는 것을 본 암몬자손도 전의를 상실하고 다 도망갔다. 이 전쟁이 보여주듯이 돈으로 가는 하나님나라가 아니고 돈으로 하는 전쟁이 아닌 것이다. 한계가 없는 헌신, 돈을 받으면 받는 만큼만 하게 되어 있기에. 전적으로 우리들교회가 그런 마음으로 가기에 정말 한계가 없는 헌신으로 가게 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아쉬운 것이 있다면 요압과 아비새는 암몬성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 물리치지 못했다. 그렇기에 암몬이 다시 쳐들어 오는 것. 요압의 한계를 보여준다. 만일 요압이 자신의 주력부대를 암몬과의 싸움에 배치하고 아비새의 부대를 용병과의 싸움에 배치했다면 얘기가 달라졌을 것. 요압이 용병과의 싸움을 했다. 돈으로 하는 싸움이 쉬운 것이기에, 자신이 그것을 하고 어려운 것을 동생에게 맡기었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이 도망을 가니까 끝까지 가지 않았다. 요압이 싸움을 잘 싸웠지만 다윗이 요압을 끝까지 신뢰하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끝까지 충성하지 못하는 것.
-나의 일이 내가 선하게 여기는 일인가, 여호와께서 선하게 여기시는 일인가?
-내가 의로운 분노를 내고 있는가,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고 여기고 있는가, 늘 혈기를 내면서 싸우고 있는가?
4 점점 대적이 없어지는 것
요압이 암몬을 끝까지 물리치지 못했기에 아람이 또 집결하여 재차 시도를 한다. 이 때 소바왕 하닷에셀이 자신의 권세를 확장하려고 보병 2만명을 출장시켰는데 군대장관 요압에게 패했기 때문에 또 아람사람을 모집해서 군대장관 소박이 헬람에 진을 쳤다. 사단은 끝까지 지는 것이 없다. 조금이따가 또 쳐들어오고 또 쳐들어오고 또 쳐들어와서 연합군이 되었지만 이때는 다윗이 출전을 해가지고 12지파의 군장을 다 데리고 나가서 한 절에 4만명을 물리쳤다. 결국 암몬과의 전쟁은 다윗이 나가서 마무리를 해서 이겼다. 4만명을 금새 이겼다. 그래서 결국 유브라데 강을 다 얻게 되었는데 이것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이 980년 만에 이루어진 것. 성경은 하루가 1000년 같고 1000년이 하루같다고 말씀하신다. 내적인 내 속의 대적이 점점 없어지고 있는가? 많아지고 있는가? 우리의 미움, 시기, 질투 이런 모든 내속의 대적들이 전쟁 하나하나 할 때마다 겨우 하나씩 없어진다. 평생의 전쟁을 통해서 내 속의 대적이 없어지는 것이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시는 것. 전쟁 이야기로만 읽으면 된다. 수많은 전쟁을 통해서 내 속의 대적이 없어지는 줄 믿는다. 다윗이 은총으로, 공의로 전쟁을 했기에 계속 이겼던 것. 결국 점점 다윗속의 욕심과 이런 것들이 없어져 갔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