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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사무엘하 6:12~23
누구 앞에서 뛰어놀고 싶은가?
악기와 노래와 춤을 동반하여 온 몸과 마음을 다해 예배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뛰어노는 것으로 오늘 다윗의 뜨거운 신앙과 미갈의 차가운 신앙을 대비시켜 어떻게 뛰어 놀았는지 보려 한다.
1. 거룩한 기쁨으로 뛰어 놀았다. (12절)
믿지 않는 자 블레셋과의 싸움에 있어 항상 하나님께 묻고 행한 다윗에겐 늘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었다. 하지만 언약궤를 가져올 땐 묻지 않는 다윗을 보며 우리가 모두 안다고 생각할 때 뜻하지 않게 패배하는 법이라 한다. 묻지 않고 행하니 웃사를 쳐서 다윗을 훈련시키는 하나님을 보라. 예배가 가장 중요한 것임을 알기 위해 이렇게 하나님의 진노를 경험하는 것은 기쁨이고 거룩한 두려움에 대한 진노의 경험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웃사를 치신 일이 하나님의 사랑에서 비롯되었음을 아는 다윗은 떨면서도 즐거워 하고 있다.
궤를 순순히 내준 오벳에돔은 분수를 아는 자로 자기 것이 아닌 것을 내어줄 수 있는 자이기에 하나님은 그를 중요한 요직 법궤의 문지기로 세우시고 후손의 복, 소유의 복을 받게끔 하셨다. 소유를 주셔도 소유의 복을 받지 못하면 그것은 그저 저주일뿐 이 세상 과연 내 것이 어딨나..깨달았다면 전부 주어야 하는 것이다. 오벳에돔도 거룩한 두려움에서 오는 기쁨을 알았기에 내어줄 수 있었을 것이다.
거룩한 두려움에서 오는 거룩한 기쁨 여호와의 진노를 경험한 적이 있는가?
2. 헌금이 저절로 되는 것이다. (13절)
말씀의 궤를 지고 가며 적용할 수 있음에 감사하여 일곱수의 완전함으로 헌금하는 다윗이다. 송아지 일곱 완전수를 바쳤다. 기쁘고 찬송하고 노래하며 바치는 십일조는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할수록 기뻐야 하는 것이 더 맞는 말이다.
여호와 앞에서 기쁘게 뛰노는 완전수 헌금을 하는가?
3. 힘을 다하여 회개함으로 뛰어 놀았다. (14절, 15절)
베 에봇 옷을 입었다는 것은 눈물의 회개를 뜻하는 것으로 다윗에게 끊임없이 회개의 눈물을 흘리게 만드시는 하나님이시다. 언약궤의 말씀이 들어오면 회개가 저절로 되고 제사장의 베 에봇 옷이 입혀지는 것으로 자연스럽게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내가 회개하고 기뻐할 때 비로소 사람들도 변하며 그것이 공동체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 힘을 다해서 뛰어 놀고 힘을 다하여 예배해야 하는 것이다.
눈물로 회개함으로 뛰노는 것이 있는가?
4. 비난을 무릎 쓰고 뛰어 놀았다.
16절 다윗과 온 공동체가 기쁨에 참여하고 있는데 미갈은 동참하지 못하고 다윗과 영적 부부로 발전하여 나아가지 못하고 있으며 이것은 율법주의와 교권주의가 얼마나 믿음을 방해하는지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기도 하다. 우리의 간증과 회개를 심중에 업신여기는 자가 많은 것이 현실로 미갈은 사울과 비슷하기에 성경에 사울의 딸로만 표현되어지고 있다.
사람의 시선을 의식해 체면에 신경 쓰고 있지는 않나?
업신여긴 다는 것은 곧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 다는 말로 모욕의 의미도 가지고 있다. 다윗이 왕답게 행동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미갈은 자신은 공주고 다윗은 목동이었다는 인본적인 생각을 끝까지 없애지 못하고 근본적으로 하나가 되지 못하는 시각을 고수하고 있다. 믿음의 직분자들 사이에서 자기 자신이 이들을 멀리하고 있음을 모르고 있다.
17절~19절 미갈이 내다 보지도 않고 마중도 없음을 아는 다윗은 업신여김 받고 있음을 직감하지만 여전히 회개하는 마음으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며 하나님의 축복으로 백성과 나누고 있다. 이렇게 다윗과 같이 주는 인생이 되어야 한다. 가족 우상주의도 안되지만 가족을 홀대해서도 안되는 것이다.
공동체에 하나됨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가? 다 주고 있는가?
20절 막상 집에 도착했으나 조강지처는 핍박을 하고 위험하고 거룩한 일을 행하고 왔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사울의 인본주의가 그대로 전해져 오직 자기만 바라보는 왕을 원하는 미갈은 하나님의 종 다윗을 전혀 보지 못하고 있다. 부유한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이 서로 나누는 것을 교양 없다 하는데 곧 미갈의 모습과 같다.
21절 오히려 되물으며 반문하는 다윗이다. 계집종 앞 VS 하나님 앞 똑같은 시각을 이렇게 서로 다르게 보고 있는 다윗과 미갈이다. 제2의 출애굽과 같은 사건에 미갈을 비로소 객관적으로 보기 시작하는 다윗이다. 영적인 시각이 없는 미갈은 다윗을 더욱더 자극해 분기탱천 시키고 있고 그런 미갈을 좋아는 하지만 그러한 배경엔 사울의 권력, 외모, 첫사랑이라는 조건들이 즐비해있는 다윗이다. 미갈에게 없는 것은 오직 믿음 뿐이다. 그러니 다시 데려와도 속성이 완전히 다른 영과 육의 만남일 뿐 그 이상 그 이하의 만남도 아니다. 그런 미갈에게 기대를 접고 육정을 끊는 이 사건을 통해 우리는 거룩으로 가는 성도의 목적을 알아야만 한다.
22절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다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표현이다.
23절 영적 자식이 없다는 것은 지옥이고 그것은 인본주의 삶의 결론이다. 미갈 모든 것을 가졌지만 결국은 불행했다. 모두가 언약궤를 두려워하며 재앙으로 생각할 때 오벳에돔의 적용에 회개하고 여섯 걸음마다 쉬며 힘들게 온 다윗은 업신여기는 미갈을 이제야 알고 단호히 끊어 내는 다윗이다. 미갈이란 존재 자체를 인정하고 그녀의 인간적인 집착이 변할 수 없음을 알기에 내려놓는 다윗이다. 부부라는 것은 함께 있어도 따로 할 수 있어야 하며 따로 있어도 함께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나의 미갈의 육을 내려놓아야 하며 내 힘으로 안되는 것이 있음을 깨닫고 그저 내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무관심도 집착도 모두 문제다. 미갈이 끝까지 돌아오지 못하는데 어떡해야 하나? 최고의 선지자 사무엘, 최고의 오빠 요나단 그리고 하나님이 택한 다윗이라는 남편까지 이러한 영적인 기준 앞에서 육의 기준을 내려놓지 못하니 자기 스스로 자신을 증명하지 못하고 오직 다윗 통해 자신을 증명하려 하고 있다. 집착은 사람을 도망치게 만드는 일이다. 믿음은 조건과 환경을 뛰어넘는 건데 자기 기준을 버리지 못하는 미갈은 거룩한 적용을 못하고 있다. 이런 내 안의 미갈을 받아들이고 인정해야 한다. 미갈의 문제는 나 중심성으로 자기만 바라보라 하는 것이 곧 미갈이다. 생육광선 파동으로 서로의 온도를 높이기 위해선 첫 번째로 언제나 동침하고 두 번째로 말을 조심하여야 한다. 교양은 말이 아니라 진심이어야 한다.
※ 기도제목
배대호
1. 하나님께 매어진 인생 그 울타리 안에서 말씀 붙들고 뛰어놀 수 있도록
2. 가족의 건강
3. 완전수 헌금 십일조 기쁨으로 드릴 수 있도록
4. 하고 있는 일, 계획한 일 하나님께서 돌보아 주시도록
5. 겸손함으로 준비하고 준비되어지도록
홍태진
1. 생활큐티 잘하기
2. 유아부 스데반 아이들 몸건강 지켜주시길
3. 아웃리치 준비하는데 있어 분별력을 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