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책에 기록된 자들 (계 21:18~27)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은
1. 각자가 보석같이 빛나는 성곽에 간증이 있는 사람이다.
2. 내가 성전인 것을 아는 자이다.
3. 정직한 자가 생명책에 올라간다.
■ 김재동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은 보석 같이 빛나는 성곽과 정금으로 된 성에 들어갈 수 있는데 그런 자들은 보석같이 빛나는 성곽의 간증이 있는 사람이라고 하셨다. 거기에 기초석이 있는데 성곽의 기초석은 12사도들 이라고 되어있다. 이것은 예수님의 12제자를 말하고, 기초를 놓았다는 것이다. 성을 보려면 성곽을 통해서만 안을 볼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바로 볼 수 없고 하나님이 세워주신 역할 모델을 통해서만이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알 수 있다라는 것이다. 우리가 빛 자체를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빛에 반사된 물체를 봄으로써 빛이 비추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듯이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이 계시하는 즉, 드러내는 만큼 하나님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유한한데 무한한 것을 파악할 수 없으니 무한 쪽에서 유한하게 만들어 주는데 그것을 성경이라 하고 그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알아가게 된다. 천국을 가시적으로 볼 수 있는 공동체를 통해 우리는 천국을 볼 수 있게 된다. 이것이 12 사도의 의미이다. 보석이 빛을 통해 빛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께서 비춰주셔야 빛나는 것이다. 연약한 성곽을 통해 성을 보게 되는데 연약한 나를 보면서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시는 것이다. 각자가 연약하기에 내 죄를 보고 하나님께 나아가서 하나님의 죄 사함을 받는 간증이 천국을 보여주는 가시적인 역할을 한다. 우리의 보석같이 빛나는 간증을 통해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이다.
두 번째는 내가 성전인 것을 알라고 하셨다. 예전에는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믿기에 이방 민족과 구별되었다. 이 중에서도 또 구별해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곳이 성전인데 그곳을 더 깨끗하게 구별해 두었다. 성전이 좋으니 하나님보다 더 우상시 되게 되었는데 하나님이 그것을 무너뜨리셨다. 이것을 없애신 후 예수님이 오셔서 하나님과 한 몸인 것을 강조하시면서 우리가 하나님과 한 몸이 되게 하시려고 하셨기에 우리 자체가 성전이 되는 것이다. 성전 안에는 사랑이 있어야 하는데 내가 성전이면 당연히 사랑이 넘쳐야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하게 된다. 하나님의 가치관이 되어야만 사랑을 할 수 있다. 사랑의 극대화는 죽음인데 그것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하는 것이다.
세 번째는 정직히 행하는 자라고 하셨다. 정직에는 진실이 필요하고 진실은 사랑이 필요하기에 상대방의 믿음에 맞추어서 사실을 이야기 해야 한다. 그렇다면 상대방의 믿음의 수준을 어떻게 알까? 나는 개인적으로 이렇게 생각한다.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볼펜이 길다 짧다라는 것은 어떤 척도가 있어야 그 길이를 가늠할 수 있다. 우리 어머니는 갤럭시 노트가 쓰기에 적당하다고 하시는데 나는 갤럭시 S2를 쓰다 보니 갤럭시 노트가 크게 느껴진다. 아이폰과 아이패드를 쓰는 분들은 갤럭시 노트를 보고 사이즈가 어중간 하다고 한다. 이런 얘기를 왜냐하면 우리는 좌우로 치우쳐져 있기에 중간이 필요한데 이것은 오직 예수님 만이 온전하고 치우치지 않는 중간의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목사님의 설교와 오늘의 큐티를 보면서 나에게 가늠해 보면 내 자신이 어느 정도 치우쳐져 있는지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정직에는 진실이 필요하고 진실에는 사랑이 필요한 이유는 하나님께로 그 사람이 돌아오도록 하기 위함이다. 상대방의 믿음의 수준을 분별해서 하는 것이다. 솔직하다는 것은 모든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을 말할 때 거짓말을 더하지 않는 것이다. 모든 것을 솔직함으로 얘기하면 상대방에게 부담을 줄 수 있다.
■ 강원희
어제 상견례를 했는데 아버지가 여자친구 아버지께 반말을 하시면서 이야기를 하셨다. 아버지는 분위기를 좋게 하려고 하신 것인데 상견례가 끝난 후 여친과 이야기 하면서 존댓말을 쓰지 않는 것에 대해 좋지 않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여친은 우리 부모님이 자신을 싫어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 집안은 감정 표현이 별로 없고 사랑이라는 것이 별로 없어 대화하는 데에도 말투가 딱딱하고 건조하다. 여친은 이런 분위기를 힘들어하고 부담스러워 하는 것 같다. 나는 우리 집의 분위기에 당연시 여기고 별로 신경 쓰지 않는데 여친은 그런 표현하지 않는 우리 집의 반응에 놀랐기에 그런 부분들이 부딪혀 왔다. 그래서 내가 여친에게 우리 부모님을 최대한 만나지 않게 해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결혼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겠다고 처음 얘기를 꺼냈다.
■ 목자님
하나님이 만드신 남자의 몸은 내어주게 되어 있고 여자의 몸은 받아들이게 되어있다. 남성답다라는 것은 내어줌을 잘 한다는 것이고 여성스럽다라는 것은 수용을 잘 한다는 것이다. 비유로 얘기하자면, 여자가 호수 같다 라고 하면 남자는 그 호수에 흘러 들어가는 시냇물과 같다는 것이다. 그 호수는 흘러 들어가는 물에 의해 그 질이 결정되게 되어있다. 목사님은 결혼식 때마다 남자는 사랑의 언어를 쓰고 여자는 복종의 언어를 써야 한다 라고 얘기하신다.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에 대해 예수님은 교회를 사랑하는 것처럼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그것은 교회를 위해서 죽은 것이다. 그것처럼 자기를 바쳐서 헌신하고 내어주지 못하면 여자는 사랑을 느끼지 못한다. 여자가 복종의 언어를 쓰라는 것은 받아들여야 한다는 부분도 있다는 것이다.
여자친구에게 시댁이란 원희가 하기에 따라 달려있다고 본다. 원희가 시냇물이고 여친이 호수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처가에 정말 잘해야 한다. 그것 밖에 답이 없다. 예를 들면 원희가 처가에 전화를 열 번할 때 친가에 한 번 하고 처가를 열 번 찾아갈 때 친가를 한 번 찾아가면 여자친구가 알아서 친가에 잘 하게 되어있다. 그렇게 되기 위한 전제조건은 원희의 희생이다. 여자친구와 처가의 문제가 아니라 원희 네가 얼만큼 할 수 있는가의 문제인 것이다. 흘러 들어가는 물에 의해 호수의 질이 결정된다는 것이 그런 의미다. 그렇게 하면 여자는 남자를 품어주게 되어 있기에 결혼하기 전부터 그런 노력이 필요하다. 사람은 이기적인 동물이기에 내가 이타적이지 않으면 감동이 없어서 믿음 좋은 한 사람이 먼저 십자가 지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다. 원희가 부모님께 잘 해드리지 못한다고 했는데 사랑이라는 것은 타인을 위해 나 자신의 게으름이나 타성을 버리고 나 자신을 확대시키는 것이다. 사랑의 극대화는 죽음이라는 오늘 목사님의 말씀처럼 결국 내가 죽는데 까지 가야 하는 각오가 있어야 한다.
■ 김지은
나는 내 스스로의 수준이 너무 낮은 것 같다. 어떤 매장에 가면 나에게 인사 안 하는 점원이 다른 손님에게는 인사를 하는지 안 하는지 주의 깊게 관찰하곤 하는데 나한테는 인사를 안 했던 점원이 그 손님에게는 하는 걸 봤을 때 화가 난다.
나는 목표한 부분이 있으면 그 곳만 보는 경향이 있고 주위를 잘 보지 못해서 나를 아는 사람들이 먼저 나한테 인사를 하게 된다.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서로 마주치면 인사만 하고 그 다음 안부를 묻는 일상적인 대화가 힘들게 느껴진다. 나에게 일상을 묻고 관심 보이고 하는 것도 익숙하지 않아서 못 받아 들여 할말이 없게 된다. 그래서 다음으로 연결되기 위한 중간단계가 나에겐 없다.
오늘 예배시간에 주위에서 떠드는 게 못마땅했다. 교회 나오는 사람들이 믿음 수준이 다 다르고 끌려서 나온 것일 수도 있고 처음 온 사람일수도 있고 해서 정죄를 잘 안 하려고 하지만 너무 떠들어서 설교 2번부터 날려버렸다. 집중해서 들어야 하는 어려운 부분이었는데 그들을 계속 쳐다보게 되었고, 참다가 ‘더럽게 떠드네’ 하며 혼잣말을 했더니 들렸는지 그 뒤부터 떠드는 것을 멈추었다. 그런데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어떤 원인이 있고 그 결과가 있기까지의 중간과정이 나에겐 없다.
엄마랑도 이번 주에 좋지 않았다. 동생이 엄마랑 나랑 매일 싸울까봐 걱정하지 않게 하기 위해 동생이 미국 간 후 엄마에게 불만을 얘기하리라고 생각하고 있다. 우리 집은 화가 나면 과격하게 표현하는 경향이 있어서 서로 그런 것으로 화풀이를 하곤 한다. 화가 한계치가 넘으니까 그런 행동들이 나오고 그런 것들에 있어서 죄책감이 든다. 또한 어머니가 하시는 말투는 나에게 있어서 듣기 힘든 부분이다. 엄마는 나와 대화를 하다가도 엉뚱한 반응을 하신다. 어떤 날은 나도 엄마에게 심하게 대들었더니 엄마가 놀라셔서 하시던 말을 그치셨다. 그런 충격적 방법 밖에는 통하지 않으니 죄를 짓는다고 자책하면서도 엄마에게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딜레마에 있다. 아무리 말씀에 은혜 받고 기도해도 엄마랑 한바탕 하면 땡이다. 이 악순환에서 벗어나고 싶다.
■ 목자님
나는 엄마랑 대화할 때 숨이 막히는 경우가 있는데, 엄마는 일 중심적이며 완벽하고 성실하신데 반해 나는 불성실하고 뒹굴거리는 스타일이어서 엄마는 이런 나를 편히 보시지 않는다. 내가 교회에 어떤 일이 생겨서 엄마에게 얘기하면 엄마는 그것에 대한 방편 없이 나에게로 책임을 돌리신다. 나는 공감해주고 이해해 준 다음에 질책하셔도 되는데 엄마는 그렇지 못하신 것이 나를 답답하게 한다. 엄마는 본인이 그런 사람이 아니기에 그렇게 요구하지 말라고 하시는데 결국 그 다음부터는 서로 대화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 엄마 같지 않은 사람을 만나는 것을 목표로 했었다. 그런데 엄마는 또 마음이 약하신 분이어서 고기를 잘라주시고, 용돈을 주시며, 옷을 다림질 해 주시는 것이다. 이런 것이 엄마의 사랑의 표현이셨던 것이다. 이렇게 엄마가 써 주는 사랑의 언어와 내가 쓰는 사랑의 언어가 다르다. 이 문제는 내가 아빠를 닮았기에 아빠와 엄마 사이의 문제이기도 하다. 나의 사랑의 언어는 깊은 대화를 하는 것이고 엄마의 사랑의 언어는 봉사를 해 주시는 것이다. 각자 다른 사랑의 언어를 쓰니 같이 살 수가 없다. 그래서 사랑은 상대방의 입장에서 서는 것이다. 사랑을 내가 받고 싶은 대로 하니까 문제가 된다. 상대방이 나에게 잘 맞춰주면 나에게도 그렇게 맞춰달라는 것이다.
화는 화를 나게 하는 대상에게 분풀이 하지 않고 좀 더 쉬운 대상에게 화를 내게 된다. 또한 화나게 하는 대상과 딜을 하지 않으면 풀리지 않는다. 엄마가 화를 내시는 이유는 누나 때문이 아니기에 자신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건강하지 않다. 엄마가 화를 내는 것은 누나의 문제가 아니라 엄마 자신의 문제이다. 그런데 누나는 엄마가 하는 것들을 그대로 받아들이니 거기에 노예가 되어버렸고 방어막이 없기에 피해의식으로 나타나게 된다. 엄마에게 의지를 하고 있으니 엄마가 하는 모든 말들이 누나에게 크게 다가오게 된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친밀해지면 다른 얘기들이 신경 쓰이지 않게 된다. 누나는 하나님의 자리에 엄마가 있다.
■ 고동욱
나는 율법적인 사람이어서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알지 못하고 성경적으로만 알 뿐이다. 틀 안에서 익힌 형식적인 예수님을 알고 있기에 그 테두리 안에서만 말씀을 듣고 큐티를 해왔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죄를 고치는 것이 아니라 나의 규칙 안에서 고치려고 노력하는 성향이 있기에 자포자기 상태가 되고 무기력해지게 되었다.
지난 한 주 간에 여친에게 욕구를 표현하는 것이 나에게는 수치스러운 일이었는데도 불구하고 표현했다. 그러고 나니 나도 똑같은 인간인 것이 느껴졌고 그래서 지난 주 해왔던 고민이 줄어들었으며 상대방에 대해 다른 관점에서 보려는 여유가 생기게 되었다. 하지만 여친이 나에게 진실하게 대해주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여친은 나에게 자신의 생활영역을 다 보여주었는데도 정작 속마음은 보여주지 않는 것 같아 고민이 된다. 오늘 예배를 드리면서 내 주위에 여자분이 앉으셨는데 예배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그런 불편한 상황에서도 전에는 남 탓을 했는데 생각해보니 모두 나의 탓인 것으로 결론지어졌다.
■ 목자님
건강해지고 정상적이 된 것 같다. 그리고 주위 여자들이 신경 쓰이는 것도 자연스러워진 것이다. 그것의 출발점은 내 죄를 보는 것이다. 하지만 동욱이가 하지 말아야 할 것은 자신에게 벌을 주는 습관인데 그것은 죄책감으로부터 비롯된다. 은혜로 죄가 없어야 하는데 자신의 힘으로 죄를 없애려고만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믿음 없는 자들은 술로 자신의 몸을 망가트리며 스스로에게 벌을 내린다. 하나님이 여친과 헤어지게 만드시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자신에게 벌을 주는 생각이다. 하나님이 해 주시는 은혜가 있어야 하는데 자기가 하려고 하는 것이다. 은혜가 없다는 것은 믿음이 없다는 것이다. 은혜는 내가 받을 결과에 내 노력이나 근거가 전혀 없어야 한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는 것을 부담스럽게 여기는 것은 내가 거지 같은 느낌이 들어서이다. 은혜는 내가 낮아져야 온다.
■ 윤혜진
오빠에게 문자를 보내는 적용을 했다. ‘생일축하한다.’는 문자를 보낸 뒤 나에게 빌린 돈을 모자라게 보내주었기에 더 보내달라는 문자도 보냈다. 나는 친근하게 문자를 보내는 것이 어렵다. 내가 보낸 문자에 대해 오빠의 답문은 없었다. 오빠가 나에게 돈을 빌리는 것을 당연시 여기는 내가 싫지만 또 미안하니까 빌려주게 된다. 내가 오빠에게 돈을 해줄 수 있는 상황인데 해 주지 못하면 미안한 마음이 든다. 그 상황이 안쓰럽고 오빠도 안쓰럽기에 거절을 잘 못하게 된다. 나에게 부탁을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 목자님
혜진이의 문제는 하나도 없어지지 않았다. 혜진이가 괜찮다 라고 하는 것은 밑에 와인 찌꺼기가 깔려있는 와인 잔을 누군가가 흔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혜진이는 자존감이 낮아서 거절을 하지 못한다. 자아상이 건전하게 형성되지 않은 여자는 자기가 원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를 필요로 해 주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을 맞는 사람이라고 합리화 시켜서 결혼하게 되면 나중에 화를 내게 되는 것이다. 타인이 필요로 하는 것을 내가 해 줌으로써 내가 뿌듯해하기 때문에 거절을 못한다. 오빠에게 잘 해주는 것이 오빠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자기 위안이다. 내가 이타적이라고 착각하게 만드는데 이런 것이 나중엔 생색이 되고 화가 되어 남을 파괴하게 된다. 더 큰 문제는 자신에 대해 직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타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건강한 자아상을 가져야 한다.
혜진이의 시급한 적용은 첫째, 본인이 버는 돈 중 상당부분은 자신을 위해 투자해 보아라. 저축, 문화생활, 화장품, 옷 등등에 투자를 더 하고 그 나머지를 줄여라. 둘째, 약속이 있을 때 본인이 진짜 원하는 것인지 생각해 보고 아니면 거절하라. 셋째, 하기 싫은 것도 해야 하는데 구원이라는 명분 아래 오빠에게 표현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그래야 밸런스를 유지할 수 있다.
■ 박성아
나는 그 동안 내 문제를 깊게 생각 안 했었고 친구를 만나면 내 얘기를 잘 하지 않고 듣기만 했던 삶을 살아왔기에 양육숙제를 하기 위해 내 이야기를 자꾸 꺼내야 하니 양육이 힘들게 느껴지는 것 같다. 하지만 그런 것들을 하나님이 훈련시키게 하는 것 같다.
나의 장점은 무엇이든지 이해를 잘 한다는 것이어서 사람들에게 서운해 하지 않지만 정작 그것은 내 이해심이 아니라 회피였다는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사랑을 많이 받았다고 생각하며 자랐지만 목사 딸인데도 불구하고 너무 많은 죄를 짓고 살았다. 사람을 이해하면서도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해서 모든 것을 하나님께 원망을 돌렸다. 그래서 하나님을 원망한 기간이 길었다.
간증문을 쓰면서 성경에도 그런 일이 있었으니까 라고 해석이 됐지만 이것을 해석 하려는 것이 아니라 내가 힘드니까 이렇게 해석하고 넘어가자라고 해서 해석이 된 것인가 라는 생각에 해석이 된 것인지 안 된 것인지 모르겠다. 나를 자꾸 생각해보니까 머리가 깨질 것 같고 문제를 생각하니 힘들다.
작년 여름에 많이 힘들어서 우울하게 있는데 엄마가 나에게 잘못했던 것들이 기억이 났다. 백수로 있어서 엄마에게 돈을 드리지 못해 미안했는데 엄마가 연락을 안 하시기에 내가 돈을 안 드리니까 연락을 안 하시나 라는 생각이 드니 처음으로 엄마에게 미움이 생겼다. 그런 감정을 쌓아놓고 있다가 엄마가 세탁기 안에 옷을 넣어 두셔서 곰팡이가 생기는 바람에 엄마에게 화를 냈더니 엄마도 화를 내셔서 난 다시는 연락 안 하겠다고 마음먹었지만 내가 먼저 연락했다. 전화로 서로 감정이 상해있었지만 엄마는 미안하셨는지 옷과 드라이기를 사서 보내셨다. 그래서 엄마도 누군가의 딸이었고 누군가에게 상처를 받으셨을테니 엄마에게 큰 기대를 하면 안 된다 라고 엄마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이렇게 사람에겐 이해했지만 하나님에겐 원망했다. 나는 어떤 일이 생기면 삐뚤어질 테다 라는 생각으로 내 스스로를 학대했다. 또한 내가 이해를 잘하니까 상대방도 나를 이해해주기를 원했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에게 이해를 못 받아서 힘들었었다.
■ 목자님
성아는 목회자의 딸이라는 특수성이 있다. 목회자의 딸은 어렸을 때부터 사랑을 많이 받았을 것이다. 그래서 자신을 사랑해 주지 않는 다른 낯선 곳에 가면 적응을 잘 하지 못한다. 그게 가장 큰 문제인 것이다. 주목을 받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니까 삐뚤어지는 방법을 쓰게 된다.
깊숙이 연관된 관계가 아니기에 잘 지낼 수 밖에 없다. 내 얘기 안하고 트러블을 일으키지 않으니 피상적인 관계를 유지함으로 관계 유지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더 깊게 들어가면 힘들다. 피상적인 관계만 가지고서는 이 세상을 살 수가 없다. 잘 지낸다는 것은 피상적인 관계이다. 오히려 갈등이 있는 것이 좋다. 성아가 가진 에너지는 한정적인데 타인과 잘 지낸다라는 것은 엄청난 에너지를 필요로 하기에 성아 자신에게 쓸 에너지가 없다라는 말이다. 모든 이가 나를 좋아하게 만든다는 것은 악한 생각이다. 구별된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선행이 되어야 사람에 대한 이해가 된다.
■ 홍태진
나는 평상시 과식과 폭식을 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들을 조절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어 샐러드를 만들었다. 내 몸 상태가 좋지 않은 절박한 상태였기에 운동을 하고 식이조절을 결정한 것이었는데, 남들이 운동해서 몸이 좋아지고 있다고 칭찬해주니 이왕 하는 김에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운동에만 집중하다가 결국 큐티가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 더군다나 회계 자격증 때문에 신경을 쓰고 있어 큐티를 못하게 되는, 본질이 뒷전이 되어 버린 상황이 오니 스트레스가 되었다. 하나님은 나에게 이전에는 외부적으로 보이는 뚜렷한 것들의 해결을, 지금은 누나, 엄마, 욕심 등 내부적인 것들의 해결을 내가 어떻게 풀어나가는지 보고 계시는 것 같다. 운동을 하는 것도 여자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욕구 때문이었다. 결국 내 욕심의 문제로 깨달아지면서 감사하긴 했지만 힘이 빠지면서 목보 쓰기도 힘들고 회사 일도 힘이 들었다. 8월달에는 큐티도 안 되고 목보도 쓰기 힘들었는데 큐티가 안되니 모든 생활이 엉망이 되어 버린 것 같다.
■ 목자님
형은 문제 해결에 있어서 억압적이시다. 운동을 해야 하는데 어떤 것을 해야 하고 어떤 것을 먹어야 하는 것을 정해놓고 했기에 문제가 다른 쪽으로 미치게 되는 것이다. 형이 억압적으로 형을 밀어 붙여서 결국 스트레스를 받았고 억압으로 문제해결을 했기에 만족감과 기쁨이 없게 되셨다. 음식 조절을 하고 싶으면 드시고 싶으신 것을 드시되, 기준선만 정해 놓으시길... 밤에 드시고 싶으시면 억압하지 말고 치킨을 먹고 싶으면 치킨을 먹되, 양념치킨을 먹지 말고 구운 치킨을 시키는 것이다. 샐러드만 드시지 말고 탄수화물도 극단적으로 줄이시지 마시고, 또한 억압적으로 하는 것은 형의 힘이 너무 들어가는 것이기에 운동을 즐기면서 하실 필요가 있다. 러닝머신을 할 때도 형이 좋아하는 다큐를 보시는게 좋겠다. 먹고 싶은 음식에 대한 기준을 세우고 예상되는 유혹들을 생각해서 지나가는 길에 떡볶이를 먹지 않겠다는 것을 지키시면 될 것이다. 하나님이 건강 때문에 형을 운동시키게 하셨는데 본질이 변한 것 같다.
■ 윤주희
우리 집은 성묘를 가면 차가 막히지 않는 추석 전 주에 간다. 추석연휴 전날이 할아버지 제사이긴 했지만 이번 주에 성묘 가는 게 어떻겠냐고 작은아버지에게 전화를 했는데 할아버지 제사를 지내고 가신다는 것이었다. 오빠가 가게를 해서 바쁘고 원래 아빠가 계셨을 때에도 추석 전 주에 성묘를 갔었는데 제사를 지내고 가는 게 맞다고만 하시는 작은 아버지의 말씀에 알겠다고 하고 까칠하게 대답한 후 전화를 끊었다. 할아버지가 초등학교 때 돌아가셔서 큰집인 우리 집이 음식을 해 왔기에 제사에 잘 오시지도 않고 아무것도 안 하시는 친척분들에 대한 원망과 화가 있어서 작은아버지가 그렇게 답하시니 짜증이 났다. 아빠가 계시는 추모공원은 추석 연휴기간 동안 제례 지내는 곳을 개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작은아버지께 다시 통화하며 얘기했더니 제사를 지내고 가겠다는 말만 하셨다. 그래서 포기상태로 '알겠어요'라고 했지만 내가 작은아버지를 이해해서 한 것이 아니라 신경질 내기 싫고 화내기 싫어 그냥 수긍한 것이었다. 그리고 어제 까칠하게 대화해서 죄송하다고 하니 요즘 연애사업이 잘 안되냐 하시며 농담 하시길래 나도 그냥 농담으로 받아 쳤다. 나는 작은아버지가 우리 아빠 제례는 넘겨도 된다는 생각이 있으신 것 같아 기분이 상했다. 할머니에게 아빠가 헌신적으로 또 물질적으로도 잘하셨는데 인정해 주시지 않는 작은아버지에게 서운한 감정이 들었다. 하지만 오늘 설교 말씀에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믿는 자로서 작은아버지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것에 대해 내 자신이 짜증스러웠다. 좋게 통화해도 될 것을 퉁명하게 대한 후에 사과를 하니 처음부터 잘 하면 되는데 그러지 못했던 것에 대해 스스로 실망했고, 남에게는 잘해주는데 반해 친척에게는 진정으로 잘해주지 못하는 내 모습이 위선적이라고 느꼈다. 어쨌든 오늘 성묘는 우리 식구와 사촌오빠네 하고만 다녀왔다.
■ 목자님
너는 화가 나면 좀 내야 할 것 같다. 그런데 왜 네가 그런 일을 하는지.. 네가 집안의 가장 어른은 아니기에 오빠나 동생도 할 필요가 있다. 엄마는 네가 그나마 잘 하니까 시키시는 것이지만 너는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기에 오빠와 동생이 할 기회가 없어지는 것이다. 그게 좋은 것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다음에는 엄마하고 얘기해서 집안의 순서가 있는 거니까 오빠가 하는 게 맞다고 해라. 착한 딸이 좋은 것 아니다. 엄마가 기본적으로 하시는 일을 더 도와드리고 그런 일들은 오빠가 연락을 하게끔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친척간의 문제를 네가 할 필요는 없다. 오빠한테 오빠 될 기회를 안주는 것 같다. 교회 다니더니 집안일 안 한다고 해서 네가 대신 하는 것은 가정의 일시적인 평화만 있게 할 뿐이다. 구원은 하나님에게 있는 것이지 네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어린양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