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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본문: 사무엘하 13:1-19제목: 연애하나…설교 말씀본문에 연애로 병걸린 남자가 나옵니다.예전 한글성경을 보면 암논이 연애하나 라고 나와 있습니다. 연애하면 좋을 줄 알았는데 좋지 않은 반전이 있습니다. 감정이 강하다고 다 사랑이 아닙니다. 병든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 인생도 이렇게 하면 행복할 줄 알았는데, 전혀 다른 민낯이 드러납니다. 무엇과 연애하고 계십니까? 감정이 아무리 강해도 그 다음이 중요합니다. 암논을 보며 사랑이라 부르는 실체를 함께 띵크해보겠습니다.1. 죄의 삯인 사랑입니다. (부모로부터 대물림 되는 사랑)1-2절.죄를 짓고 있는 순간에 다윗은 암몬과의 전쟁에서 이겼습니다.다윗이 완벽사도행전 13장에 보면 사울을 왕으로 세웠는데 40년만에 폐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윗 보고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고 하셨는데, 어떻게 하나님 마음에 범죄자가 맞을 수 있겠습니까? (행 13:25) 행위로 훌륭한게 아니라 유다를 통해 내려오는 구속사가 사울보다 다윗에 맞았다는 뜻입니다. 둘 다 천인공노할 죄를 지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자녀로 여겨주셨습니다. 다윗이 위대한 것이 아닙니다.약속대로 이제 다윗은 재앙을 내리시는 것을 봐야 합니다. 이제부터 자녀를 통해 진짜 눈물 흘릴 수 밖에 없는 인생이 시작됩니다. 이것은 또한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이기도 합니다.본문에서 맏이 암논은 다른 아들이라고 하시면서 셋째 압살롬은 다윗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믿음의 조상도 잘생긴 아들은 편애하네요. 이게 원죄입니다. 그런데 여동생 다말도 예뻤습니다. 다말이라는 이름이면 다 예쁘고 믿음이 있습니다. 십자가의 핵심이 되는, 이 땅에서 보면 눈물 흘릴 수 밖에 없는 두 사람입니다. (유다의 며느리 다말, 다윗의 딸 다말)그래서 암논이 사랑했다고 합니다. 진짜 사랑이라면 문제가 없는데, 상사병에 걸렸습니다. 암논은 압살롬에 열등감을 느끼고, 다말이라도 데려와 존재감을 표출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때 다른 인물이 등장합니다.3-5절.열등감 심한 사람이 자리에 오르면 아부하는 사람만 곁에 따릅니다.당시 공주는 처녀이기에 몸을 조심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노립니다.6-7절.암논이 사람을 부르는게 마치 다윗이 밧세바를 취한 상황과 비슷하게 흘러갑니다.꾀병 걸린 암논을 보고 다윗이 몰랐을까요? 회개를 했어도 죄를 범했기에 자녀의 죄를 보기도 싫고 드러내기도 싫고 양육할 수도 없습니다. 자녀는 봐주고 싶어합니다. 그렇게 범죄가 연장되고, 간음과 살인을 불러들이고 있습니다. 당장 나단의 예언이 이뤄지고 있습니다.아버지가 간음하니 아들도 간음합니다. 그 아래 솔로몬은 천 명의 부인을 뒀습니다. 최고 족보의 집안이 무서운 범죄자 집안과 다를 바 없습니다.암논이 다윗이 전쟁할 때에도 사랑 타령을 많이 했고, 여러 첩을 들이는 것을 봤습니다. 그것을 빠르게 배우고, 불타는 정욕으로 동생을 범하는 사고를 칩니다. 아버지가 밧세바를 부르는 것, 아들이 동생을 부르는 것에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다윗이 회개했어도 습관이 된 죄는 끊기가 어렵습니다. 죄는 되물림되고 반복됩니다. 좋은 본은 애써 보여도 못 따라하는데, 악한 습관은 척만 해도 따라합니다. 이것이 죄의 되물림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부모가 행한대로 하기 싫다고 하지만 보고 배우고 금새 따라 합니다. 그래서 보여주는 것이 중요합니다.부모의 죄를 생각하는 것에 불편해 합니다. 훌륭하셨다고 말해야만 자녀에게 최선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훌륭해도, 엉망이어도 죄인일 뿐입니다. 그러니 회개는 내 죄의 뿌리를 정직하게 보는 것부터 시작됩니다. 요시야도, 에스라도 조상의 죄를 인정하고 자복했습니다. 잘못된 행동의 뿌리를 알지 못하면 고치기 힘듭니다. 고통을 가져다주는 습관은 몇 세대를 거쳐 왔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성격 형성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칩니다.죄의 반복으로 우리는 고통을 반복합니다. 집안의 역사, 나라의 역사를 직면할 때 나와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습니다. 집안을 보는 것은, 믿음의 집안을 보는 것입니다. 세속사적으로 보면 흉보는 것 같이 보입니다.남편 아내 자녀 부모를 향해 암논같다고 할 것이 아니라 암논이 나라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되물림된 죄의 싹을 봐야 합니다. 내가 다윗처럼 편애하고, 요나답처럼 간교하고, 열등감으로 충동적인 암논이라는 것을 봐야 합니다.적) 내가 병이 날 정도로 갖고 싶은 것은 무엇입니까?부모로부터 물려받았다고 핑계 대지만, 사실은 내가 스스로 붙들고 키우는 죄는 무엇입니까?내가 욕하면서도 그대로 닮아 가는 부모의 모습 중에 다윗의 편애, 암논의 열등감으로 인한 충동, 요나답의 간교함 중에 무엇이 있어요?후회로 시작되는 상처를 다윗이 자녀들에게 되물림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습관적으로 반복되는 죄로 아들의 양육을 포기했습니다. 옳고 그름으로 죄의 삯을 마주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면 죽을 때까지 되물림된 죄의 삯인 이기적인 사랑만 하게 됩니다. 그래서 부모의 탓입니다.2. 끝을 보는 사랑입니다. (내가 책임져야 할 사랑)8-9절.되물림 되었다고 핑계될 수 없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오라버니가 아프니 의심 없이 다말이 과자를 만드는데 암논은 그런 다말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렇게 다른 사람을 내보내고, 공동체를 끊어내고 사람을 밀어냅니다. 이것이 죄의 본질입니다. 죄가 많으면 공동체가 싫어지고 은밀한 방을 만들어냅니다.요즘은 모든 사람을 나가게 하라고 소리칠 필요 없이 방 문을 잠구고 핸드폰을 켜면 됩니다. 음란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중독적인 것 모두 마찬가지입니다.브래드 쇼.중독 = 외로움과 수치를 내려두고 무언가와 친밀한 관계를 맺으려는 시도라고 했습니다.사람 같지만 살리지 못하고 방 안에서 깊어지는 죄입니다. 치유되려면 빛으로, 말씀 앞으로, 공동체 앞으로, 주님 앞으로 나아와야 합니다. 세상의 기준을 채울수록 나아오지 않습니다.10-11절.자기 방 안에 다말과 단 둘이 있으면서 암논이 어떻게 합니까?압살롬의 누이라고 부르더니 갑자기 나의 누이야 라고 하면서 동침하자고 합니다. 이 말이 무섭습니다. 아가서에서 신랑이 신부를 부르는 사랑의 언어와 같습니다. 정욕은 가장 거룩한 단어도 가져다가 욕망의 도구로 흉내내는 데에 씁니다. 그렇게 끝을 보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12-13절.다말이 자신을 욕되게 하지 말라고 합니다.어리석다는 말은 머리가 나쁜게 아닙니다. 하나님을 모른 채로 행해선 안될 악을 저지르는 욕망을 말합니다.14절.암논이 그 말을 듣지 않고 억지로 동침합니다. 하나님 말을 안 듣는 사람은 사람의 말도 듣지 않습니다. 자기가 옳다고 믿으며 행동합니다. 듣지 않는 암논이 가장 어리석은 행동을 합니다. 자기 힘을 의지하고 탐내는 것을 힘으로, 돈으로 차지하려 합니다.암논이 다말 하나만 가지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악을 행합니다. 그렇게 계략을 짜고 연기해서 끝을 봤습니다. 하지만 한 끝이 더 남아있습니다.15절.암논이 다말을 얻자마자 미워하게 됩니다. 사랑이 미움으로 변한게 아니라 실체가 드러난 것입니다. 사랑이 아닌 정욕이었습니다. 그러니 바라던 끝을 보고 자괴감, 더 큰 미움만 남았습니다. [연애하나]의 히브리어 동사는 창세기에서 사감이 야곱의 딸 디나에게 연연하다와 동일한 뜻입니다. 암논이 충동적으로 다말을 범했습니다. 세겜은 너무 잘못된 행동을 했지만 마음만은 진실했습니다. 그런데 다윗의 아들 암논은 이방인보다 못한 행동을 했습니다. 이래서 행위로 분별할 사람이 없습니다.손 안에 넣고 나니 실증이 났습니다. 우리 중에도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갖고싶은 충동을 사랑으로 착각하면 안됩니다. 불신자들은 행동을 무슨 의미로 했는지도 모릅니다. 끝까지 가서 남는 것은 실증과 미움 뿐인 삐뚫어진 사랑, 정욕, 탐욕입니다. 이런 사랑은 늘 끝을 보려고 하고 참 사랑은 끝을 남겨둡니다.결혼 전 성관계는 관계를 파괴합니다. 같은 것 같지만 언제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우리는 짐승이 아니라 하나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격적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연애하나 끝을 남기지 않고 선을 넘으면 심한 미움으로 끝납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창조질서를 지키는 것은 정하신 끝을 남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남기지 않고 어기게 되면 미워버림을 당하게 됩니다. 결혼 후에도 그것 때문에 완전히 전락하게 됩니다.연애하므로가 되면 누리는 설렘, 더 깊은 사랑을 하고, 인내를 알게 됩니다. 교제가 끝나도 추억으로 간직하게 됩니다. 젊은 날에 성욕을 참는 것이 십자가의 길과 같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참는 사람은 십자가 지는 사람이고,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못 참는 사람이 바로 암논과 같은 사람입니다. 허락하지 않아서 떠났다는 것은 똑같은 것입니다.인격은 사람과의 관계에서, 영성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드러나는 성품입니다. 인내는 영적 진실성의 결론입니다. 부모에게서 되물림됬지만 내가 책임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나한테 편하게 하기 위해 핑계를 댑니다. 위기가 오면 마음대로 하면서 죄를 짓습니다.적) 사람을 내보내고 혼자 잠가 둔 은밀한 방은 무엇입니까?듣지 않고 내 힘으로 끊어 버린 말은 무엇입니까?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소유하고 통제하려는 사람은 누구입니까?내 사랑은 끝을 보는 사랑입니까, 끝을 남겨놓는 사랑입니까?반복되는 죄에 끌려다니는 것은 무엇이에요?3. 회초리 맞는 사랑입니다.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사랑)하나님이 고난을 통해 돌아오게 하시려는 사랑입니다.암논과 정반대인 사랑이 주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끝까지 자기 사람을 사랑하셨습니다. 끝까지 책임지는 사랑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받아 누려야 하는 사랑입니다.16-18절.나를 범하고 실증을 냅니다.다말의 말에 암논이 듣지 않고 내보냅니다. 다윗과 정확하게 똑같은 짓을 합니다. 탐하고 나니 매력이 떨어집니다. 모든 것의 중심에 다윗이 있습니다. 암논은 그저 피해자입니다.범한것도 모자라 쫓아내려는 암논에게 다말이 더 악하다고 외칩니다. 범한 악보다 버리는 악이 더 악합니다. 하나님 안에는 버리는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암논이 책임지지 않고 마치 장난감 다루듯 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암논은 듣지 않습니다. 이제는 이름도 부르지 않고 계집이라고 합니다.세상이 이렇습니다. 제일 사랑해줄 것처럼 하던이가 욕구가 채워지니 물건 취급하고 버립니다. 인간적인 사랑의 실체입니다. 먼지같은 남자가 욕하는 것은 정상입니다. 먼지와 뼈는 신분 차이가 너무 나기 때문에 뼈가 욕을 하지 않습니다.19절.암논은 문을 걸어잠구고 다말은 쫓겨났습니다. 이것이 세상의 논리입니다. 그런데 다말이 옷을 찢고 울부짖었습니다. 억울해서가 아닙니다. 이 사건의 죄는 암논의 죄인데, 다말은 수치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오픈했습니다. 회개의 자리로 간 것입니다.요시야가 말씀 앞에서 옷을 찢었듯, 다말도 옷을 찢고 하나님 앞에 정직해집니다. 인격과 명예가 더럽혀지는 수치를 당했다는 표시를 보이고, 전적 무능을 고백하며 울부짖고 하나님께 고백하며 거리를 지나가는 것입니다. 삶의 아픈 현장을 들고가며 회개하는 사람은 사명을 감당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말의 울부짖음을 성경에 기록하셨습니다. 이것을 다 아시고 보시고 들으시고, 네 말을 들었노라고 잊지 않으시고 기록해 주십니다.암논은 모든 것을 갖고 있음에도 빗장을 지르고, 다말은 모든 것을 드러내서 살았습니다. 피해자는 다말입니다. 암논이 성폭행했습니다. 당했지만 암논이 아니라 다말이 회개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회개하는 사람이 승리하는 사람이고,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용서했다고 죄 지은 사람의 죄를 덮어주는 것이 아닙니다.회개하는 인생을 하나님은 쓰시기 시작합니다. 억울함의 자리에 떨어진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면, 그 자리에서 인생을 돌아보고 해석하고, 당한 것보다 죄가 더 크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억울한 사건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상처가 별이 되고 약재료가 됩니다. 암논은 잠금으로 죽었습니다.암논도 다윗에게 상처받은 사람이긴 합니다. 하지만 피해만 부르짖다가 끝난 인생입니다. 암논과 다말, 누구의 상처가 클까요? 하지만 회개하지 않은 자의 결말은 압살롬에게 살해당하는 것입니다. 이 사건은 범죄한 다윗 집안을 치시는 하나님의 회초리입니다. 회초리는 아프지만 언약 안에 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다윗이 사건으로 무너졌습니다. 왕이 딸을 지키지 못했지만, 무너진 집을 하나님은 버리지 않으시고 이 집을 통해 예수님님이 오셔야 했습니다. 연약하기에 예수님이 오십니다.예수님이 이어져 내려가는 것을 택해야 합니다. 약함으로 자기를 내어주시고 끝까지 사랑하시는 모습을 보이시고 우리 이름을 부르시고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성소의 휘장을 찢으시고 우리가 하나님께 가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하나님의 문장은 수치를 당하였으나 구원으로 끝납니다. 삶에 많은 ~~하나들이 있습니다. 이것에 대한 답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만 있습니다. 회초리를 대신 맞아주시고 십자가 대신 지신 예수님이 우릴 불러주십니다. 맞아주셨기에 우리가 나음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인생의 모든 사건도 예수님 안에서 사랑이 됩니다. 죄를 무릅쓰고 부르짖으며 회개하면 됩니다. 그래도 반복된 죄의 고리에 다윗이 있는 것처럼 고통을 맛보아야 합니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죄를 고백하는 것 밖에 없습니다.죄를 고백하는데 시편 130편에서 말씀으로 확신을 얻고 자유함을 느끼게 됩니다.남자는 상처를 그대로 보여주시도록 하나님께 기대야 합니다. 목장은 최고의 대안이 맞습니다. 상처를 그대로 보일 때 죄가 힘을 잃습니다. 그래서 매일 큐티하고 죄를 고백해야 합니다. 죄는 공동체가 있어야 함께 고백할 수 있습니다.적) 평생 내 죄인 줄 알고 숨겼던 수치가 있습니까?하나님이 내 울부짖음을 들으시고 기억하신다는 것이 믿어집니까?회개하고또짓는 죄는 무엇이에요?
A
1 번아웃이 온 것 같습니다. 잘 헤쳐 나갈수 있길
2 지금직장 성수기 이후 직장동료와 저의 길이 확실해지길
B
1 지금직장 성수기 이후로 직장동료와 저의 길이 확실해지길
2 더이상에 일에 실수가 없도록 어느정도의 긴장감을 갖추면서 마인드 조절을 잘하기를
C
1 조울증이 재발되지않기를2 아빠가 등에 혹이 났는데 악성이 아니기를
D
1 건강관리 잘할 수 있길2 공부 꾸준히 하기3 신교제 ,신결혼 할 수있길4 어머니와 내자신이 용서 할 수 있길
E
1 하나님과 관계회복이 1순위가 되기를2 예배와 말씀 붙드는 삶을 살 수 있기를3 나라와 교회와 가족,공동체를 위해 기도 하는 삶을 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