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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6.07.(주일) 열왕기하 22:12-20 「나도 네 말을 들었노라」
김양재 목사님
오늘 읽을 말씀은 열왕기하 22장 12절에서 20절까지입니다.
12. 왕이 제사장 힐기야와 사반의 아들 아히감과 미가야의 아들 악볼과 서기관 사반과 왕의 시종 아사야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13. 너희는 가서 나와 백성과 온 유다를 위하여 이 발견한 책의 말씀에 대하여 여호와께 물으라 우리 조상들이 이 책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며 이 책에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모든 것을 행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내리신 진노가 크도다
14. 이에 제사장 힐기야와 또 아히감과 악볼과 사반과 아사야가 여선지 훌다에게로 나아가니 그는 할하스의 손자 디과의 아들로서 예복을 주관하는 살룸의 아내라 예루살렘 둘째 구역에 거주하였더라 그들이 그와 더불어 말하매
15. 훌다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너희는 너희를 내게 보낸 사람에게 말하기를
16.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곳과 그 주민에게 재앙을 내리되 곧 유다 왕이 읽은 책의 모든 말대로 하리니
17. 이는 이 백성이 나를 버리고 다른 신에게 분향하며 그들의 손의 모든 행위로 나를 격노하게 하였음이라 그러므로 내가 이 곳을 향하여 내린 진노가 꺼지지 아니하리라 하라 하셨느니라
18. 너희를 보내 여호와께 묻게 한 유다 왕에게는 너희가 이렇게 말하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네가 들은 말들에 대하여는
19. 내가 이 곳과 그 주민에게 대하여 빈 터가 되고 저주가 되리라 한 말을 네가 듣고 마음이 부드러워져서 여호와 앞 곧 내 앞에서 겸비하여 옷을 찢고 통곡하였으므로 나도 네 말을 들었노라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20. 그러므로 보라 내가 너로 너의 조상들에게 돌아가서 평안히 묘실로 들어가게 하리니 내가 이 곳에 내리는 모든 재앙을 네 눈이 보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사자들이 왕에게 보고하니라
하나님 아버지, 오늘 주님이 “나도 네 말을 들었노라” 하시니 주님이 내 말을 들어주시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말씀하여 주시옵소서. 듣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요즘은 말 들어 주는 서비스도 있더라고요. 24시간 익명으로 내 이야기를 들어 주는 채팅 서비스도 있고요. 또 훈련된 경청자와 연결해 준다는 플랫폼도 있습니다. AI도 그렇고요. 사람들이 AI에게 왜 이렇게 많이 묻습니까? 금세 정답을 말해주는 것도 있지만, 그보다는 내 말을 끊지 않고 들어주니까 그게 좋죠. 내 말을 끊지 않고 들어 줄 사람이 이 땅에 누가 있겠어요? 그죠?
예, 그러니까 그만큼 사람들이 외롭다는 거예요. 내 말을 들어 줄 사람이 없다는 건데, 그런데 참 이상해요. 우리는 그렇게 내 말 들어 줄 사람을 찾으면서 정작 하나님 말씀은 잘 듣지 않아요. 맨날 “내 말 좀 들어봐~!!” 그러면서 하나님 말씀은 튕겨낼 때가 많은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세요. “나도 네 말을 들었다!” 이보다 더 큰 위로가 또 있겠습니까? 오늘, 우리 모두 하나님이 내 말을 들어 주시는 복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도대체 하나님은 어떤 사람의 말을 들으실까요?
오늘 본문을 보면서 함께 생각해 보겠는데요.
“나도 네 말을 들었노라”는 하나님이 그 말을 들으시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고요. 그 사람은 첫째로,
1. 함께 여호와께 묻습니다.(12-14절)
12절, 13절입니다.
12. 왕이 제사장 힐기야와 사반의 아들 아히감과 미가야의 아들 악볼과 서기관 사반과 왕의 시종 아사야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13. 너희는 가서 나와 백성과 온 유다를 위하여 이 발견한 책의 말씀에 대하여 여호와께 물으라 우리 조상들이 이 책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며 이 책에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모든 것을 행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내리신 진노가 크도다_왕하 22:12-13
지난주에도 들었는데요. 요시야가 율법책의 말을 듣자마자 어떻게 했죠? 옷을 찢었어요. 그리고 오늘 본문이 이어지는데요. 요시야는 가장 신임하는 5명, 그 5명에게 명령을 내려요. 그런데 5명을 다시 한번 살펴보니까 여기에 ‘누구의 아들’이 두 번 나오고 ‘시종’이 한 번 나왔어요. 예, 그러니까 이 5인방이 되려면 믿음의 부모가 너무 중요하고, 또 종의 자리가 중요하더라고요. 그리고 대제사장과 율법학자가 또 말씀으로 받치고 있더라고요. 말씀이 있는 사람, 부모의 믿음이 중요하고 그러니까 이 종의 자리가 중요하고.
그래서 이런 5인방에게 어떤 명령을 내렸나요?
“(발견한 책의) 말씀에 대하여 여호와께 물으라!”고 해요. 명령이라고 하면 보통 ‘이거 해라, 저거 해라’ 뭐 이런 거 아니겠어요? 자기 힘을 보여줄 수 있는 뭔가를 시키죠. 그러나 요시야가 시킨 것은 ‘묻는 것’이에요. 왕이면 자기가 답을 내릴 수 있잖아요. 알건 모르건 다 자기가 정할 수 있어요. 그게 권력 아니에요? 법 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잖아요.
그러나 요시야는 하나님께 질문하라고 해요. 하나님께 답을 구합니다. 세상 왕은 답을 정하지만, 회개한 왕은 하나님께 묻습니다. 권력은 명령하게 하지만 회개는 질문하게 해요. 요시야는 지금 ‘내가 왕이다!’ 하지 않고 ‘하나님, 제게 답이 없습니다’ 하면서 엎드리는 거예요.
그런데 더 중요한 게 있어요. 누구를 위해 여호와께 물으라고 하지요? “나와 백성과 온 유다를 위하여.”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왕이잖아요. ‘나를 위하여 물으라’ 해도 이상할 게 하나도 없어요. 그러나 ‘공동체를 위해’ 물으라고 합니다. 이것이 회개한 사람의 특징이에요.
요시야가 말씀을 듣고 회개했잖아요. 내가 100% 죄인인 것을 알면 비로소 가족과 지체와 이웃을 위하게 돼요. 왜 그렇습니까? ‘당신이 나보다 옳도다’ 인정하기 때문이에요. 그동안 ‘내가 더 옳다, 나만 옳다’ 외치며 그들의 마음을 찢기 바빴던 자기 모습이 보이기 때문이에요.
우리가 큐티하며 하나님께 물으며 답을 구하는 것은 물론 나 자신을 위한 일이죠. 그런데 하나님의 답은 우리 자신만 살리고 끝나는 게 아니에요. 여러분 한 사람이 말씀을 들으면, 우리의 죄 고백과 나눔은 나를 살리고 가정을 살리고 교회를 살리고 나라를 살리는 대안 맞습니다! 지금은 모르나 아니, 희미하나 후일에는 확실히 알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목장은 너무 중요한 거예요. 목장에서 서로 자기 죄를 고백하면 다 너무 놀라는 거예요. 누가 그래요. “큐티에서 남 주냐?!” 맞아요. 큐티하면 남 주는 것 맞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예배가 너무 소중하잖아요. 그러니까 예배를 잘 드리기 위해서, 가정도 교회도 나라도 없으면 예배를 못 드리니까 저절로 이 이타적인 기도가 나오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요시야의 명령을 들은 이 다섯 사람은 그 명령을 이행하는데요.
14절이에요.
14. 이에 제사장 힐기야와 또 아히감과 악볼과 사반과 아사야가 여선지 훌다에게로 나아가니 그는 할하스의 손자 디과의 아들로서 예복을 주관하는 살룸의 아내라 예루살렘 둘째 구역에 거주하였더라 그들이 그와 더불어 말하매_왕하 22:14
글쎄, 12절에 나왔던 다섯 사람 이름을 그대로 다시 기록하는 거예요. 성경에 토씨 하나가 얼마나 중요한데! 이 5명이 왕의 명령을 함께 들었고 그것을 함께 수행했다는 걸 지금 강조하는데요. 이 다섯 사람이 얼마나 중요하면 똑같은 이름을 한 절 지나서 두 번이나 언급했을까요? 그래서 제가 이름의 뜻을 좀 살펴봤어요.
대제사장 힐기야의 이름 (뜻)은 ‘여호와의 분깃’이고요. 아히감은 ‘나의 형제가 도움을 준다’, 아사야는 ‘여호와께서 만드셨다’는 뜻이에요. 악볼은 ‘들쥐’라는 뜻이고, 사반은 ‘너구리’라는 뜻이고, 훌다는 ‘두더지’라는 뜻이에요.
그래서 이름을 한번 제가 이렇게 꿰어 봤어요. “사람은 두더지(훌다) 같고 들쥐(악볼) 같고 이제 너구리(사반) 같고 평범하고 형편없지만, 여호와께서 만드셨기에(아사야) 여호와의 분깃(힐기야)이 되어 형제가 도움을 주지 않으면(아히감)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의미가 이름의 뜻에서도 이렇게 나타나네요.
천국에서는 똑같이 만날 것인데 ‘요시야가 사람을 구원의 관점에서 차별하지 않고 등용했구나’라는 생각을 해봤어요. 요시야의 아버지가 두 살 때 살해당했잖아요. 그러니까 그게 보이는 거예요.
이 차별 없는 환경의 5인방이 이 땅에서 또다시 차별받을 만한 ‘여선지 훌다’에게 물으러 갔어요. 당시에는요, 예레미야 선지자도 있은 지 한 5년쯤 됐어요. 스바냐 선지자도 있었어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왕도 제사장도 서기관도 그 어떤 사람도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곳이면 다 함께 물으러 가야 한다’는 가치관이 그들에게, 요시야에게도 함께 있었다는 거예요. 그러므로 이 당시 훌다를 찾았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메시지라고 생각을 합니다.
훌다는요, 이곳에서만 딱 등장해요. 그런데 그 남편인 살룸은 5인방에게서도 언급되지 않았던 믿음의 3대를 언급했네요. 할아버지 할하스는 ‘빛나는’이라는 뜻이고, 아버지 디과는 ‘희망’이라는 뜻이에요. 살룸은 ‘보상’이라는 뜻인데요. 그의 직책은 예복 담당이었어요.
그런데 살룸의 직책이 10장 22절에 나오는, 같은 예복이라도 바알의 예복 맡은 자의 직책과는 비교가 되죠?
22 예후가 예복 맡은 자에게 이르되 예복을 내어다가 바알의 모든 섬기는 자들에게 주라 하매 그들에게로 예복을 가져온지라_왕하 10:22
예, 그래서 (살룸의 집이 신앙이) 독실한 집안이었다는 걸 추정할 수 있어요.
그런데 아주 중요한 구절이 나오죠? 이들이 “예루살렘 둘째 구역”에 살았다고 하는 거예요. 늘 행간을 생각해 보라고 그랬잖아요. 다윗과 솔로몬 시대의 예루살렘이 ‘첫째 구역’이라면, 이 ‘둘째 구역’은 B.C. 722년에 북이스라엘이 망하고 남유다로 내려온 수많은 피난민으로 인해 히스기야가 서북쪽에 성벽을 쌓아서 신시가지를 형성한 곳이에요. 그러니까 열왕기하 20장 4절에 나오는
4a 이사야가 성읍 가운데까지도 이르기 전에 ……_왕하 20:4a
이 말씀처럼, 그 당시 둘째 구역은 수도가 아니고 변두리에 속한 이 난민촌에 가깝다는 거죠.
우리도 이북에서 내려왔는데, 북한에서 많이 내려왔잖아요. 그런데 남쪽이 북한 사람들을 다 받아줬잖아요. 그래서 이 남한을 축복한 큰 이유가 북쪽에서 내려온 사람을 다 받아주었기 때문이라고 그래요. 그런데 왜 받아줬겠어요? 그때는 다 같이 못사니까 받아줬어요. 그런데 요새 남한이 잘살잖아요. 북에서 내려온 사람을 ‘탈북자’라고 부르잖아요. 그렇게 생각하면 저도 탈북자거든요. 그러니까 이게 쉬운 일이 아니에요.
여기(예루살렘 둘째 구역)는 난민촌에 가까웠어요. 그중에서 살룸은 예복을 담당했는데, 예복 담당은 아주 비천한 신분은 아니지만 - 왕실의 관리 계층이기는 해요- 그런데 그곳에도 공무원이 살아야 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순종을 잘하고,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하니까 살았다고 보여집니다.
예복 담당은 대제사장 직속이에요. ‘예복’이잖아요. 직속이니까 왕에게 예언을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어요. 그건 사령관이 하면 되는데 여긴 부하잖아요. 그렇죠? 그러나 또 한편 옷을 만지니까 왕과 직접 알현할 수 있는 기회도 주어질 수가 있었어요. 어떤 형편이라도 나만 준비가 되어 있다면 내 자리가 행운의 자리일 수도, 아닐 수도 있는 거예요.
결국 이 5인방이 이 난민촌에 살룸의 아내를 찾아온 거예요. 그래서 이 집도 이름의 뜻으로 제가 또 (꿰어봤어요.) 꿰어야 보배니까.
“결국 빛나는 할하스 할아버지의 신앙으로 디과 아버지의 희망을 가지고 살다 보니까 (이 훌다는 두더지라는 뜻이라고 그랬어요.) 두더지 같은 아내 훌다를 주셔서 살룸에게 최고의 보상이 주어져서 찬란하게 성경에 언급이 되는 가문이 된 줄 믿습니다!”
그러니까 요시야의 명령을 따라 함께 물으러 간 사람들은 그냥 심부름꾼이 아니었어요. 함께 말씀 앞에 섰던 거예요. 그래서 그들이 훌다와 어떻게 했다고 해요? 14절 마지막에 “더불어 말하매”라고 하잖아요. 함께 말씀으로 나누었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그들이 특출해서가 아니라 왕의 명령에 복종해서 갔기에 말씀을 함께 묻고, 함께 들은 ‘그 자리’가 나중에 하나님의 사람을, 하나님의 백성을 살리는 자리로 이어진 거예요.
어떻게 이어졌을까요? 대제사장 힐기야는 율법을 발견한 사람이고 서기관 사반은 그 책을 읽은 사람이에요. 그리고 그 사반의 아들 아히감이 나오는데, 아히감은 나중에 예레미야가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 그를 구해 주었어요. 그 아들은 또 유다 멸망 후에 바벨론이 그 지역 총독으로 세운 그달리야예요. 그는 남은 백성이 그 땅을 떠나지 않고 살아가도록 이끌었어요. 이제 그게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이죠. 그러니까 사반의 집안이 이렇게 두고두고 말씀의 역사와 연결돼서. 그 서기관 사반이 그 가치를 제대로 모른 채 읽기만 한 것으로 시작된 그 말씀의 회복이 그냥 아들, 손자~~~ 쭉 내려갔다는 거예요. 이렇게 하나님께서 보여주시지만 아사야는 이곳에 이름 한 번만 등장해서 너무나 알려지지 않은 평범한 자였어요. 그런데 우리 엄마가 하나도 알려지지 않은 평범한 사람이잖아요.
그런데 이 5인방은 역사에 남을 5인방이 된 거예요. 훌다 선지자를 소개해 가지고. 저는 이제 큐티 하는 공동체에서 역사에 남을 지도자들이 나올 줄 믿습니다! 아멘!!! 제가 예언을 오늘 했어요.
왜냐하면, 훌다의 예언을 듣고 행한 요시야가 성경 전체의 성군이 되었기 때문이에요. 할렐루야! 모든 말씀을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인데.
자, 그럼 훌다를 찾아간 게 또 왜 이런가? 훌다는 평범한 아낙이고 예복 만드는 양복 기술자의 부인이에요. 근데 훌다는요, 아내의 역할이 먼저였기 때문에 지금 여기 남편 직업부터 언급했어요. ‘훌다’는 두더지라는 뜻인데, 집에서 이 두더지처럼 자기 역할만 잘하고 있어도 얼마든지 살룸의 아내로 생명책에 오르고 주의 일에 쓰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성경 전체의 성군인 요시야가 대선지자 예레미야를 제치고 물어본 여선지자가 되었어요. 여러분 여성에게 (목사) 안수를 주고 안 주고를 떠나 복음을 전하는 데는 차별이 없어요. 그런 데는 성차별이 없어요. 아셨어요? 자기 유익을 구하느라고 날마다 성차별 얘기를 하는데 이제 복음을 전하는 데 차별 없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성이라는 역할을 주셨으면 순종해야 합니다. 여자의 머리가 남자이기 때문이에요. 남자와 비교하고 남자 위에 군림하려고 하면 앞으로 남고 뒤로 밑지는 거예요. 하나님이 이 땅에 그런 역할을 주셨거든요. 그런데 그래서 보니까 훌다의 적용이 집에서는 남자 살리고, 교회에서는 ‘남자 목사 살리자’가 주제였다고 생각을 하는 것이 지금 5인방이 다 남자 이름들만 나오잖아요. 그러니까 이 사람들 살리는 거예요. 그리고 훌다는 여기밖에 이름이 나오지를 않아요. 그래서 이제 그렇게 남자가 살아야 이것이 구속사 큐티 목회의 근간이에요. 오늘만 얘기한 게 아니고 40년 전부터 이 얘기를 했어요. 남자가 살아야 여자가 사는 것이고 가정이 살아나는 거예요. 왜? 남자가 머리이기 때문이에요 여자가 열등해서 그런 게 아니에요. 역할에 순종을 해야 돼요. 연약해도 질서를 무시하면 그 가정, 그 조직은 살 수가 없어요. 요즘 이런 말을 듣지 못하니까, 이 젊은 세대가 ‘복종하라’만 들어도 경기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정말 전도해서 가치관을 넣어줘야 돼요. 그래야 가정이 살고 나라가 사는데, 어려서부터 이거를 들어야 되는 거예요! 여러분 여자가 열등해서 아니라니까요. 근데 이 땅에서는 돕는 배필로 그 역할을 주셨어요. 근데 내가 이 얘기를 하려니까 하나님은 도리어 우리들교회를 부흥시키셨잖아요. 그렇다고 전부 ‘나같이 하면 교회가 부흥한다’ 이딴 얘기를 또 하는 게 아니에요. 그냥 이 얘기를 하려니까 이 나라를 살리려니까 저에게 이제 이 메시지를 좀 주목하라고 이렇게 하신 거예요.
성경에 나오는 드보라, 미리암, 훌다 여선지자 3명이 있는데, 드보라도 번개 같은 남편에게 순종을 했더니 40년 동안 사사를 하면서 1만 명을 동원할 수 있는 군대 장관 바락이 드보라를 받쳐주었기 때문에. 그러니까 이 여자가 아무리 잘나도 그런 여자를 인정하는 남자는 또 없는 거예요. 워낙 우리가 “여자의 머리가 남자다” 그러면은 남자는 (여자를) 사랑을 해야 되는데 ‘그래 나로다~~’ 이러시면 또 안 되는 거예요. 근데 이제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이제 그 바락이 히브리서에는 믿음장에 4명이 들어간 자리에 삼손, 입다, 기드온 그리고 ‘바락’이 올라갔어요. 그러니까 이렇게 서로가 순종하고 사랑하는 이 역할! 그래서 제가 얼마나 놀랐겠어요? ‘믿음장’에 바락이 올라가 있어요! 그래서 저를 그냥 인정해 준 모든 남자 목사들은 전부 다 믿음장에 올라갈 줄 믿습니다!
저는 천국에 변소간만 있어도 괜찮아요. 이 사명 때문에 이 땅에 제가 왔기 때문에. 훌다도 이 살룸에게!- 양복 만드는 기술자 살룸에게- 순종을 했더니 지금 요시야가 인정을 해줬잖아요. 그리고 도리어 요시야가 성군으로 꼽히고 있어요. 그러니까 질서에 순종한 드보라와 훌다를 인정한 이 바락과 요시야를 하나님은 도리어 더 높이고 있다는 걸 우리가 알 수 있어요. 그러니 우리는 남자를 살려야 돼요! 그게 밑지는 게 아니에요. 남자를 살려야 돼요! 그리고 그 남자들은 상사를 살리고 회사를 살려야 돼요! 이게 질서예요. 여자가 남자에게 복종하듯이 남자는 이 땅의 질서에 대해서 또 순종을 하셔야 돼요.
자, 미리암은 최초로 모세의 누이 여선지자 칭호를 받았죠. 미리암의 노래도 있어요. 대단한 이 똑똑한 사람이에요. 그런데 가족이자 지도자인 모세를 비방해 가지고 나병에 걸렸잖아요, 나병이. 그러므로 ★★이 땅에서 위대한 것은 역할이고 질서인 거예요. 능력 위주로 하면 거기는 지옥인 거예요. 나병이 걸리는 거예요. 요시야가 보낸 5인방이 이런 훌다와 더불어 말한 거예요. “훌다가 여호와의 말씀을 대언을 했지만은 높고 낮음이 없이 모두 요시야와 같은 반열에 올라갔다!” 성경에 지금 이렇게 기록을 하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 보시기에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기 때문에,
그러나 이 요시야는 우리의 성군으로 꼽히지만 우리 훌다는 여러분들 지금 처음 듣는 거예요. 너무나 사라가 순종했어도 우리는 ‘사라와 리브가의 하나님’ 그러지 않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그러는 거예요. 이 역할에 순종해야 되는 거예요.
여러분 진짜 묻는다는 건 뭐예요? ‘내가 모른다. 내가 틀릴 수 있다’는 마음으로 묻는 거예요. 원하는 답 이미 정해놓고 묻는 건 진짜 묻는 게 아니에요. 큐티도 그래요. 내가 답을 다 정해놓고 말씀으로 확인받는 게 큐티가 아니에요. 내가 모르는 거 내가 틀린 것을 인정하고, 진짜 정답인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게 큐티예요. 근데 우리가 혼자 있으면 어떻게 이렇게 묻는 마음을 가질 수가 있겠어요? 혼자 있으면 ‘내가 옳다’는 생각밖에 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함께하는 지체가 필요해요. 하나님께 혼자 질문하기 전에 함께 질문해야 돼요. 함께하는 것 자체가 나를 비춰주는 거울이 되는 거예요. 함께 물을 때 진짜 묻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고, 진짜 듣는 마음이 준비되는 거예요. 이렇게 함께 여호와께 묻는 사람의 말을 하나님이 들어주신다는 거예요.
근데 중요한 건 “나는 그런 공동체가 없는데요?” 저도 이제 문밖 출입을 못했던 시절이 있잖아요. 그런데 내가 회개를 하니까 보이는 거예요. 그 병원 옆에 또 우리 집에서 3명 모여서 그 하는 ‘우리 큐티 모임’. 내가 이제 그런 힐기야 5인방과 훌다의 이 구속사의 공동체를 이제 만들어 낼 수가 있는 거예요. 누가 갖다 줘서가 아니라. 그런데 여기 그렇게 (공동체가) 있는데도 안 오는 거는 정말 바보예요! 있는 공동체에 들어와서 누리시기를 바라요. 이 구속사 공동체는 절대적인 거예요. 그러나 여러분들이 들어갈 수 없는 그 처지도 있을 수 있어요. 그럴 때 내가 회개하면 하나님이 이런 공동체를 반드시 주실 줄 믿습니다!
적용 질문
Q. 내가 요즘 가장 많이 묻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혹시 인터넷입니까, AI입니까?
Q.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물었던 적은 언제입니까?
Q. 함께 여호와께 묻는 지체가 있습니까? 사람을 차별해 가면서 묻지는 않습니까?
Q. 기도 제목이 나를 위한 것입니까, 가정, 교회, 나라를 위한 것입니까?
이게 지난주 부부 목장 나눔인데요. 한 분이 이렇게 나눔을 했어요.
목사님 설교 중에 ‘법’이라는 단어가 들리면서 차별금지법 기도 요청이 생각났어요. ‘그게 맞나?’ 싶었거든요. ‘하나님은 완전한 사랑의 하나님인데 성소수자를 죄인으로 보실까? 아니면 사랑하는 자녀로 보실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음지에서 티도 못 내고 하나님 믿는 성소수자들도 있을 텐데, 그분들의 고난도 클 것 같고, 기도하면서 ‘왜 저는 이런 존재로 태어났나요?’라고 하는 분들도 있지 않을까 싶었어요.
여러 교단들이 동성애에 대해 입장이 조금씩 다르더라고요. ‘사귀는 것까지는 괜찮다, 결혼까지는 괜찮다, 관계 자체는 안 된다’ 등 다양한데 목사님이 그 법이 제정되지 않게 해달라고 하셨을 때 맞는 말씀인지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이제 목자님이 피드백을 안 하시더라고요. 목장보고서에 기록을 안 한 건지? 그죠. 이게 지난주 나눔이에요.
제가 동성애자들 사랑하죠. 우리가 내 자녀를 사랑하죠. 그런데 자녀가 안 좋은 길로 가면은 (막잖아요.) 우리는 아이들이 하고 싶은 걸 다 해주는 것이 사랑은 이제 아니라고 그랬습니다. 성경에 동성애는 죄라고 써 있어요.
근데 이런 거 다 떠나서 저는 교회 개척할 때부터 우리는 이제 인구절벽시대에 낙태와 동성애는 다른 거 다 떠나서 생명이 끊어지기 때문에! 이것 때문에 온 교회가 기도하는 것은 다음 세대를 위함이라고 수도 없이!! 지난 주일에도 이렇게 했지만, 잘 모르겠다고 하십니다. 이건 정치 문제가 아니에요. 우리나라 존폐를 위협합니다. 생명이 없는데 이 나라가 없는데 예배는 어떻게 드려요?
자, “나도 네 말을 들었노라” 하시니 하나님이 그 말을 들으시는 사람이 있다고 그랬죠. 첫째가 함께 여호와께 묻습니다. 둘째는
2. 장차 내릴 재앙을 듣습니다.(15-17절)
여호와께 물으니까 이 재앙의 말을 잘 듣는 거예요. 15절에서 17절입니다.
15. 훌다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너희는 너희를 내게 보낸 사람에게 말하기를 16.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곳과 그 주민에게 재앙을 내리되 곧 유다 왕이 읽은 책의 모든 말대로 하리니 17. 이는 이 백성이 나를 버리고 다른 신에게 분향하며 그들의 손의 모든 행위로 나를 격노하게 하였음이라 그러므로 내가 이 곳을 향하여 내린 진노가 꺼지지 아니하리라 하라 하셨느니라_왕하 22:15-17
여러분! 요시야가 그렇게 옷을 찢고 그렇게 간절히 물었잖아요. 근데 돌아온 대답이 뭡니까? 재앙이에요! 진노예요! 누구의 진노입니까? 하나님의 진노예요. 하나님이 내리실 재앙이에요.
훌다는 자기 생각을 말하는 게 아니에요. 여호와의 말씀을 전할 뿐이에요. 하나님은 이 재앙을 요시야가 읽은 그 율법책에 기록된 말씀대로 내리겠다고 하세요. 그러니까 모세 때 기록된 그 율법책은 그냥 역사책이 아닌 거예요! 모세가 신명기 설교를 할 때도! 그것이 처음 기록된 때도! 이제 다시 발견되어 요시야 귀에 들렸을 때도! 훌다 선지자가 예언할 때도! 그 율법책은 살아있고 활력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되어서 성경은 늘 이루어지는 말씀인 줄 믿습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대로 되었다!” 이러잖아요.
그런데 왜 재앙입니까? 그것은 우연이 아니에요. 하나님은 뭐라고 하세요? “이 백성이 나를 버렸기 때문!”이라고 하세요. 잘 보세요. 조상의 문제가 아니에요. 지금 여기에 있는 “이 백성이” 문제인 거예요! “이 백성이” 다른 신에게 분향했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이 백성이” 그들의 모든 행위로 나를 격노하게 했기 때문이라고 하세요!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인데 그들이 그 자리를 버리고 떠났기 때문에 하나님이 재앙을 내리시겠다고 하시는 거예요.
하나님은 그렇게 일방적으로 무서우신 분이 아니에요. 우리가 얼마 전에 봤지만, 이 ‘재앙을 내리겠다’는 표현은 딱 남북 이스라엘의 3명의 왕에게만 썼어요.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 아합과 남유다의 므낫세예요. 다윗과 반대되는 가장 악한 왕들이에요. 이런 재앙이 이제 옷을 찢는 회개로 하나님께 물은 요시야에게도 선언이 되는 거예요. 아주 이번에는 강력하게 “그 진노가 꺼지지 아니하리라!” 하시며 지울 수 없는 마침표를 딱 찍으셨어요. 이 얘기는 뭐예요? “재앙은 반드시 임할 거야!!” 확정이에요. 돌이킬 수 없어요!
요시야는 이렇게 장차 반드시 임할 재앙에 관한 말씀을 들었어요. 이미 율법책에서 읽은 재앙이에요. 근데 그것에 대해 어찌할 바를 모르니까 하나님께 물었어요. 답 주시기를 기대했을 거예요. 그런데 돌아온 답이 뭐예요? “답이 없다. 재앙은 온다. 못 돌이킨다. 못 피한다!” 이게 답이었어요.
여러분, 옷을 찢는 회개를 한 요시야라도 이 말씀을 듣기란 어려웠을 것 같아요. 절망 가운데 하나님께 묻는 것이 더 절망하기 위한 건 아니잖아요. 그래도 절망에서 벗어날 해결책을 기대하면서 말씀도 보고 기도도 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요시야도 마찬가지였겠죠. 그런데 ‘절망의 마침표’를 찍어주시니 너무 힘들었을 것 같아요. 그러나 여러분! ★어떠한 경우에도 하나님만이 100% 옳으십니다! ★이걸 인정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것이라도 오늘 내게 주시는 응답으로 들을 수 있어요. ★반대로 응답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말씀이 있다면 그건 아직 내가 하나님이 100% 옳으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거예요. 믿음의 분량만큼 들을 수가 있어요.
근데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 보면요. ★하나님은 왜 요시야에게 장차 임할 재앙을 말씀해 이렇게 주실까요? 하나님은 침묵하실 수도 있잖아요. 위로와 소망의 말씀만 주실 수도 있잖아요. 요시야가 얼마나 불쌍해요. 그리고 또 얼마나 가상해요. 근데 하나님은 이렇게 하지 않으셨어요. 요시야의 감정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 백성의 생명이고! 그보다도 더더욱 중요한 게 구원이라는 말씀입니다! ‘응답’은 하나님의 뜻 그대로 알려주시는 것이에요. 내가 원하는 답이 응답이 아니에요. 많은 경우에, 아니 대부분의 경우, 내가 원하는 답은 ‘오답’이에요. 사실과 달라요. 구원과 반대돼요. 우리는 합격을 응답으로 받기를 너무 바라죠. 성공의 소식을 듣기를 원해요. 그런데 그다음이 뭐예요? 하나님 없이 합격하고 성공하면 결국 내가 하나님 자리에 딱 가는 거예요. 구원의 길이 멀리멀리 떠나고 말아요. 하지만 반대로 내가 원치 않던 불합격과 실패의 소식을 들으면, 이 땅에서 기댈 것이 없어지면 없어질수록 하나님을 찾게 되죠. 하나님을 가까이하게 돼요. 그렇다면 뭐가 진짜 응답이에요? ★내가 원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뜻하시는 구원이 진짜 응답이잖아요. 구원을 위해서 지금 불합격이 필요하면 불합격이 응답이고요. 또 합격이 필요하면 합격도 응답이 될 수 있어요. 근데 실패가 지금 나를 구원으로 이끄는 끈이라면 실패가 응답이에요.
지난주 선거도 그렇죠. 당선된 사람보다 낙선한 사람이 훨씬 많아요. 당선이 상 같아요? 교만해지면 그 당선이 벌이에요. 낙선이 벌 같아요? 하나님께 돌아오면 그 낙선이 상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듣기 싫은 말씀, 무서운 말씀도 “아멘” 하며 받아들여야 합니다!! 장차 내릴 재앙을 오늘 내게 주시는 말씀으로 들어야 해요.
여러분 “복음은 장차 받을 환난”이라 그랬잖아요. 데살로니가전서 3장 4절에.
4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장차 받을 환난을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는데 과연 그렇게 된 것을 너희가 아느니라_살전 3:4
미리 들었으니까 환난이 와도 요동치 않는 거예요. 예방 주사예요. 예방 주사 조금 아프지만 우리는 절대로 죽지 않아요. ‘장차 임할 환난’을 미리 듣는 것 자체가 ‘복음’이에요. 요시야가 지금 딱 이래요. 재앙을 미리 들었어요. 그래서 그 재앙이 와도 무너지지 않고 오히려 그 말씀 앞에서 옷을 찢으며 회개하는 마음으로 개혁을 계속 이어갈 수 있었던 거예요.
그러니 여러분, 어떤 말씀도 잘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특히 장차 임할 재앙의 말씀도 주님의 응답으로 들으시길 축복해요! 왜냐하면 바로 이런 사람의 기도를 주님도 들으시기 때문이에요.
훌다는 어떤 인생을 살았길래 이런 기가 막힌 예언을 요시야에게 했을까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내가 살아본 바에 의하면 쉽지 않은 인생을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요시야에게 이 말 하나 해서 천국에 지금 찬란하게 올라가 있으니까 우리는 오늘, 이 말씀을 잘 듣고 들어내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Q. 장차 내릴 재앙이 듣기 싫어 주님을 멀리했던 적이 있습니까?
Q. 그것을 회개하고 돌이켰습니까? 후회만 하고 있습니까? 여전히 그 자리에 있습니까?
Q. “하나님만이 100 프로 옳으시다”는 고백에 얼마나 "아멘"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떨어져도 감사해!” 그러면 여러분 가운데는 “‘떨’자도 싫어!” 그런 분들이 있어요. 그래서 “떠나야 되겠어 우리들교회를~” 그러는 분도 있어요. 그러니까 이게 이제 참 듣기가 힘든 거예요.
자, 하나님이 들으시는 그 사람은 함께 여호와께 물으니까 장차 내릴 재앙을 잘 들어요. 그러면 하나님이 들으시니까 세 번째는
3. 하나님이 들으시니 평안합니다.(18-20절)
하나님이 들으시면 우리는 평안해요. 18절 19절입니다.
18. 너희를 보내 여호와께 묻게 한 유다 왕에게는 너희가 이렇게 말하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네가 들은 말들에 대하여는 19. 내가 이 곳과 그 주민에게 대하여 빈 터가 되고 저주가 되리라 한 말을 네가 듣고 마음이 부드러워져서 여호와 앞 곧 내 앞에서 겸비하여 옷을 찢고 통곡하였으므로 나도 네 말을 들었노라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_왕하 22:18-19
하나님이 요시야를 뭐라고 부르십니까? ‘유다 왕’이라고 부르세요. 앞서 15절에서는 그냥 ‘너희를 내게 보낸 사람’이라고 하셨어요. 앞에서 하신 말씀은 유다 전체에 내린 재앙의 말씀이니까 요시야도 백성의 하나로 ‘one of them’인 거예요. 특별할 게 없어요. 그런데 이제 하나님이 요시야를 ‘유다 왕’이라고 하세요. 그를 높이시는 거예요.
그리고 아주 아주 특별한 말씀을 주십니다. 무슨 말씀이에요? 제일 먼저 말씀하시는 게 놀랍게도 “네가 듣고” 뭘 들었어요? “이 곳과 그 주민에 대하여 빈 터가 되고 –빈털터리가 되고- 저주가 되리라” 한 그 말을 그 재앙의 말을 듣기 힘든 말, 듣기 싫은 말을 요시야가 잘 들었다는 거예요. 네가 잘 들었다는 걸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거예요.
내가 이 재앙의 말을 잘 인정하는가로 우리들교회는 직분이 정해지죠. 성공하고 학벌이 있다고 직분이 주어지는 게 아니고, ‘재앙이 왔을 때 어떻게 해석하는가? (재앙의 말씀도) 잘 들어내는가?’ ‘그 재앙의 말을 네가 듣고’ 이어서 ‘마음이 부드러워져서’ 재앙의 말을 들었으면 마음이 부드러워져서! 딱딱하게 굳어 있던 마음이 말씀 앞에서 녹은 거예요. 강한 마음이 아니라 이제 약한 마음이 된 거예요. (내) 힘이 빠진 마음이에요. 똑같은 말씀을 듣고도 어떤 사람은 돌처럼 튕겨내고 요시야는 스펀지처럼 빨아들였어요. 같은 말씀인데 마음이 다른 거예요.
다윗도 사울이 그렇게도 괴롭히니까 사울을 죽여야 할 것 같지만 ‘기름 부은 왕’이기 때문에 죽이지 않았잖아요. 근데 내 편인 요압이 내 편을 위해서 너무 잘하는데, 그냥 내 편 같지만 요압과 (다윗의) 구속사의 가치관이 너무 다른 거예요. 이걸 여러분들이 어떻게 분별하겠습니까? 그래서 사울의 군대 장관 아브넬을 막 죽이잖아요. 그죠? 네 편 내 편 딱 갈라 가지고. 사무엘하 3장 39절에
39 내가 기름 부음을 받은 왕이 되었으나 오늘 약하여서 스루야의 아들인 이 사람들을 제어하기가 너무 어려우니 여호와는 악행한 자에게 그 악한 대로 갚으실지로다 하니라_삼하 3:39
요압을 포함한 이 사람들을 제어하기가 너무 어려우니 여호와는 좀 갚아달라고. 소위 내 편인 요압을 설득할 수가 없는 거예요. 사울이 ‘기름 부음 받았다’는 것은 예수 믿는 거를 말함이에요. 그러니까 즉, 구원을 위해서 내가 참기도 하고 나가기도 해야 되겠는데 요압은 자기 야망만 있기 때문에 같은 편에 있는 것 같은데도 그 요압을 설득해 낼 수가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다윗이 “오늘 내가 약하다”고 그러는 거예요. 근데 중요한 때는 또 요압이 다윗의 편을 들어주잖아요. 오늘 (큐티 본문에서) 우리아를 죽이잖아요. 그죠? 다윗은 그냥 점점 이제 요압에게 끌려다니는 거예요. 죽을 때까지 다윗 죽을 때까지 요압을 못 죽였어요. 사람마다 (곁에) 이런 (요압 같은) 사람이 있는 거예요. 오늘 내가 너무 약하여서. (마음이)부드러워졌어요. 다윗은 이제 죽을 때까지 이제 회개하고 가는 거죠.
그러니까 요시야도 어떻게 합니까? 여호와 앞에서 겸비합니다. 낮은 자리에 서는 거예요. 자신이 지금까지 얼마나 높은 자리에 서려 했는지, 얼마나 자기 주제를 파악하지 못했었는지 깨닫고, ‘내가 아무것도 아니구나’ 고백하는 거예요. 이 마음으로 옷을 찢는 거예요. 여기는 지난주에 없었던 ‘통곡’까지 했다고 해요. 회개로 통곡까지 했다는 거예요.
‘마음이 약해지고 스스로 낮아지고 옷을 찢으며 통곡하는 것’ 세상에선 이런 걸 뭐라고 합니까? ‘실패자, 루저’라고 해요. 그래서 이렇게 안 되려고 얼마나 열심히 사는지 몰라요. 내 자식이 이렇게 되지 않게 하려고 내 모든 걸 불사르면서 아이들을 이제 불태웁니다. 몰아세웁니다. 그러나 오늘 하나님은 오히려 이런 루저(실패자) 같은 모습을 칭찬하세요. 요시야의 업적, 성품 이런 거 하나도 칭찬하시지 않아요. ★하나님의 칭찬은 말씀에 대한 우리의 반응에 있어요. 말씀을 들은 것을 칭찬하세요. 요시야가 말씀을 듣고 “아! 내가 하나님 앞에서 완전히 빈 터구나! 빈털터리구나! 내세울 게 하나도 없구나!”를 깨달았어요! 그걸 칭찬하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다윗이 항상 회개를 하잖아요. 너무 절체절명의 (상황이라서) 사울이 자기를 죽이려고 하니까 암몬의 도움을 받았잖아요. 근데 도움을 받으면 안 되는데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이 타협할 때가 있어요, 평생을. 그랬는데 사무엘하 10장에서 그게 고마워서 암몬에 조문 사절단을 보냈는데 여기는 그걸 모르니까 이제 조롱을 하고 엉덩이 볼기짝을 다 드러내는 수치와 조롱을 당했는데. 우리는 이 사건만 보니까 “야 저것들 너무한 거 아니야!” 근데 다윗은 내가 도움받지 않아야 될 때 (사울 때문에 암몬의 도움을 받은 거죠.) 그런데 사울은 사실은 하나님이 붙여주신 훈련이고 사실은 이쪽(사울)이 같은 편인 거예요.
여러분 이게 옳고 그름으로 생각하면 어떻게 분별이 되겠어요? 그러나 다윗은 이거를 이제 회개하는 거예요. “내가 도움받지 않아야 될 사람한테 도움받아서 이 지금 수치를 당하는구나!”
그래서 늘 그렇게 “내가 내세울 게 하나도 없구나!” 이걸 이제 깨달은 거 그걸 칭찬하세요. 하나님이 높이시는 사람은 ‘회개하지 않는 승리자’가 아니에요. 하나님이 높이시는 사람은 ‘회개하는 패배자’예요. 세상에서는 승리와 패배가 전부잖아요. 그러나 하나님께 패배도 승리도 중요한 게 아니에요. ★진정한 승리는 회개인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지금 ‘저주의 예언을 듣고 여러분들이 어떻게 해석하는가?’ 그것 때문에 우리들교회는 목자도 세워지고 다 세워지는 거예요.
분별이 100% 완전하지는 않지만은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요시야에게 하나님이 엄청난 상을 내리시는데 무엇입니까? “나도 네 말을 들었노라” 이게 지금 우리에게 주신 말씀인 줄 믿습니다! “나도 내 말을 들었노라” ‘과거에 들었었다’도 아니고 ‘미래에 들을 것이다’도 아니고 ‘이미 들어서 다 알고 있다’는 뜻인 거예요. 한 번 들으신 분이 앞으로도 또 들으실 거예요! 이미 들으셨고 또 들으십니다! 누가요? 하나님이! 하나님이 내 말을, 내 생각을, 내 형편과 상황을, 내 마음을, 내 슬픔과 눈물을 내 회개를 이미 들어서 다 알고 계시다고 하잖아요. 이게 얼마나 위로가 되십니까! 그래서 기도하자고 하는 거예요. 세상 모든 사람이 내 말을 들어주지 않아도 하나님 한 분이 들어주셨으면 되는 거예요.
시편 116편에서 1절 2절에
1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그를 사랑하는도다 2 그의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_시 116:1-2
‘사랑과 기도’ 이건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붙들고 의지하는 마음이에요. 이런 마음이 왜 생겼어요? 하나님이 들으시기 때문에. 귀 기울이셨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하게 된 거예요. 우리는 세상에 내 말 하나 들어주는 사람 있으면 그냥 그것 때문에 우리는 온 인생을 걸 수도 있어요. 그러나 남편이 나를 너무 사랑해 주고, 아내가 너를 너무 아껴주면 우리 눈이 하나님을 향할 필요가 있겠어요? 세상에서 상 다 받았는데 하늘에서 받을 상을 왜 기대하겠어요? 그럴 사람 없을 거예요.
★이 땅에서 오직 주님만이 내 말을 들어주시고 내 형편에 귀를 기울여 주시기 때문에 오늘 내가 기도할 수 있는 거예요. 정말 하루 종일 “주여! 주님! 아버지!” 그냥 진짜 자다가도 제가 아버지 이름을 부르는 거예요. (사람을) 그렇게 그렇게 (자꾸) 부르면요, 남편도 싫어하고 아내도 싫어할 거예요. “여보! 여보! 여보!” 밥 먹다가도 “여보! 여보!” 나 밖에 나가도 “여보! 여보! 나 봐! 내 말 들어!” 이러면 얼마나 지겹겠어요?
근데 그렇게 부를 이름이 있어서 제가 얼마나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이게 너무 그냥 위로가 돼서 설교 준비하면서 제가 눈물을 많이 흘렸어요. “나도 네 기도를 들었노라. 나도 네 기도를 들었노라.” 진짜 이렇게 이 땅에서 부를 이름 또 기도할 그런 것(믿음, 마음) 주셔서 너무나 감사해요. 내일도 모레도 글피도 천국 가는 그날까지 주님은 우리 말을 들어주시고 주신 줄 믿어요!
그래서 (들어주신) 결론이 뭐예요? 20절에
20. 그러므로 보라 내가 너로 너의 조상들에게 돌아가서 평안히 묘실로 들어가게 하리니 내가 이 곳에 내리는 모든 재앙을 네 눈이 보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사자들이 왕에게 보고하니라_왕하 22:20
하나님이 그 말을 들으셨어요. 그러므로 봐야 할 게 뭐예요? 평안이에요. 참으로 재앙이 장차 임하기로 작정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 사는 동안에는 평안하리라는 거예요. 이게 하나님의 약속이에요.
‘평안’이 뭐예요? 하나님이 여기 힌트를 주시잖아요. “모든 재앙을 네 눈이 보지 못하리라” 재앙을 보게 하시는 이도, 보지 못하게 하시는 분도 오직 하나님이시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평안은 상황으로 결정되는 게 아니에요. 우리는 상황만 보여서 상황만 보여서 힘들지만요. 상황이 아무리 좋아도 하나님이 재앙을 보게 하시면 ‘평안이 없어요.’ 상황이 아무리 나빠도 하나님이 재앙을 보지 못하게 하시면 ‘평안한 거’예요. ★문제없는 게 평안이 아니에요. 많은 문제 때문에 하나님께 피하면 그게 ‘평안’이에요. 문제가 하나도 없어서 하나님을 잊어버리면 ‘평안이 없는 거’예요.
그렇다면 진정한 평안 ‘샬롬’이 뭐예요? 하나님과 통하는 거예요.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리고 하나님 내 말을 들어주시고. 이렇게 하나님과 통하면 막힘없이 교통하는 것이 이게 ‘샬롬’이에요.
히스기야도 요시야도 “내가 사는 날 동안 태평이 있고”(왕하 20:19). 지금 ‘평안이 있다’고 하는 말이 바로 이 말 아닐까요? 똑같은 상황인데 나에게는 그 재앙이 피해 가는 거예요, 똑같은 상황인데. 이게 구속사의 해석 아니겠습니까!
이 ‘통함’을 열어주신 분이 우리가 아니죠. 예수 그리스도죠. 근데 우리는 오히려 통하지 못하게 막은 장본인이에요. 유다 백성처럼 택자이면서도 하나님을 등지고 귀를 막고 듣지 않는 게 우리 자신이잖아요. 그러니까 우리의 화평은 우리의 샬롬이신 우리 주님께서 우리와 원수 된 것, 중간에 막힌 담을 헐어주시고 자기 육체로 무너뜨려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면 하나님께 물을 수가 있어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가 있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내 기도를 하나님이 들어주시는 그 화평 속으로 이제 들어가서 이 샬롬이 우리 모두에게 다시 한번 임하기를 축복합니다!
Q. 말씀 앞에서 내 마음은 부드럽습니까, 딱딱합니까?
Q. 요즘 내가 구하는 평안은 무엇입니까?
Q. 하나님과 얼마나 통합니까? 말씀과 기도로 주님과 교제할 수 있어서 행복합니까?
***목장 기도제목A: 목장에 돌아오도록B: 출장 잘 다녀오도록C: 주신 자리 지키기D: 소년부 아이들이 매주 참석할 수 있도록E: 7/4 군무원 시험에 붙회떨감 할 수 있도록F: 하루만 살도록G: 대한민국을 지켜 주시고 이름도 빛도 없이 피 흘려 죽어 간 전사자와 선교사들의 기도를 기억하여 주셔서 예배할 수 있는 나라 되도록 기도합니다. 할 줄 아는 기도도 없는 비천한 저희를 고쳐 주시고 전적으로 무능력한 우리의 기도가 아니라 모세와 약속하신 것과 같이 기도에 응답해 주시길 간절하게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