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2.21.(주일) 예레미야 51:33-44 「타작마당에서 부르는 노래」
최대규 목사님
33.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딸 바벨론은 때가 이른 타작 마당과 같은지라 멀지 않아 추수 때가 이르리라 하시도다
34.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나를 먹으며 나를 멸하며 나를 빈 그릇이 되게 하며 큰 뱀 같이 나를 삼키며 나의 좋은 음식으로 그 배를 채우고 나를 쫓아내었으니
35. 내가 받은 폭행과 내 육체에 대한 학대가 바벨론에 돌아가기를 원한다고 시온 주민이 말할 것이요 내 피 흘린 죄가 갈대아 주민에게로 돌아가기를 원한다고 예루살렘이 말하리라
36.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보라 내가 네 송사를 듣고 너를 위하여 보복하여 그의 바다를 말리며 그의 샘을 말리리니
37. 바벨론이 돌무더기가 되어서 승냥이의 거처와 혐오의 대상과 탄식 거리가 되고 주민이 없으리라
38. 그들이 다 젊은 사자 같이 소리지르며 새끼 사자 같이 으르렁거리며
39. 열정이 일어날 때에 내가 연회를 베풀고 그들이 취하여 기뻐하다가 영원히 잠들어 깨지 못하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40. 내가 그들을 끌어내려서 어린 양과 숫양과 숫염소가 도살장으로 가는 것 같게 하리라
41. ○슬프다 세삭이 함락되었도다 온 세상의 칭찬 받는 성읍이 빼앗겼도다 슬프다 바벨론이 나라들 가운데에 황폐하였도다
42. 바다가 바벨론에 넘침이여 그 노도 소리가 그 땅을 뒤덮었도다
43. 그 성읍들은 황폐하여 마른 땅과 사막과 사람이 살지 않는 땅이 되었으니 그리로 지나가는 사람이 없도다
44. 내가 벨을 바벨론에서 벌하고 그가 삼킨 것을 그의 입에서 끌어내리니 민족들이 다시는 그에게로 몰려가지 아니하겠고 바벨론 성벽은 무너졌도다
하나님, 바벨론의 멸망 소식이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의 소식인 줄로 믿습니다. 그 말씀을 잘 듣겠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여러분, 지난 수요일, 토요일 큐지컬을 보셨나요? 네, <최고의 선택> 참 명장면, 명대사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제가 제일 기억에 남는 명대사는 “예, 예”입니다.^^ 그리고 “주님, 오늘 한 영혼 올라갑니다”예요.^^ 네, 아마 보신 분은 웃으시겠죠? 나오미와 룻이 흉년 가운데서 탄식의 노래가 아닌 남은 것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한 해를 마감하는 이때에 여러분의 입에서는 어떤 노래가 흘러나오고 계신가요?
남유다 백성은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1차로는 왕족과 귀족이, 2차로는 에스겔 선지자와 왕과 대장장이와 군인들을 비롯한 만 명이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남유다에서는 괜찮게 살아갔던 사람인데요, 그발강 가에서는 바벨론의 채찍 아래서 처참하게 살아가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입에서는 어떤 노래, 어떤 고백이 나왔을까요? 시편 137편이 그들의 애가를 다루고 있는데 이렇게 돼 있습니다.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시 137:1).
얼마나 힘들었는지 그렇게 고백을 해요. 그러면서 2절에,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시 137:2)
‘수금’은 기쁨을 상징하는 악기인데요. 그것을 나무에 걸었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도 기쁨이 없다’, ‘내 인생의 즐거움이 하나도 없다’라는 뜻입니다. 이런 노래를 그들이 불렀습니다.
절망에 빠진 그들에게 오늘 예레미야가 50장, 51장 바벨론 멸망의 예언을 전해줍니다. 내일 본문에 나오는데요. 바벨론으로 향하는 스라야의 손을 통하여서 그들에게 전해줍니다. 예레미야 51장 61절에 이렇게 돼 있습니다.
“(스라야에게 말하기를) 너는 바벨론에 이르거든 삼가 이 모든 말씀(렘 50~51장)을 읽고 말하기를……”
예레미야가 스라야에게 이렇게 전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이 그중에 속해 있는 거죠.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거대한 제국 바벨론의 끝이 “추수 때의 타작마당” 같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타작마당’은요 곡식을 타작하기 위해서 땅을 밟고 밟아서 단단하고 딱딱하게 만드는 것을 말하죠. 바벨론의 끝이 그렇게 될 것이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현실은 어떻습니까?
오히려 남유다 포로 된 백성이 짓밟히고 힘든 상황인 거예요. 우리도 그렇잖아요. 여러 산적한 문제들에 치이고 짓밟히는 삶이 지금 우리의 삶입니다.
그러면 이 타작마당에서 우리는 어떤 노래를 불러야 하는지 오늘 세 가지로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타작마당에서 부를 수 있는 우리의 노래는,
1.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노래입니다(33절).
우리 33절을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33.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딸 바벨론은 때가 이른 타작 마당과 같은지라 멀지 않아 추수 때가 이르리라 하시도다
바벨론의 세력은 나날이 더 포악해지고 강해집니다. 바벨론은 하나님 없는 세상이죠. 또,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을 말합니다. 그런데도 화려하고 참 좋아 보입니다. 이 세상의 가치관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계속해서 물밀듯이 밀려온다는 것입니다.
이번 주에 제가 전화를 받았어요. 한 청년이 도박 빚을 졌는데 또 몰래 대출을 받아서 도박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한 여자 집사님의 전화도 받았습니다. 자기 아들이 여자가 되려고 자꾸 여성 호르몬을 막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참 마음이 무겁고 짓밟히는 것 같았습니다. ‘바벨론이 이렇게 짓밟고 있구나.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참 마음이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절망하는 마음이, 절망의 상황이 소망이 오직 하나님께만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자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너희는 포로의 자리에서 회개하고 기다려라. 왜냐하면 멀지 않은 때에 내가 바벨론을 추수할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멀지 않다”고 하셨어요. 그런데 우리는 그것이 먼 이야기라고 자꾸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멀지 않다고 하시는데 ‘아직 많이 남았어’, ‘아직 아니야’라고 생각하는 교만이 바벨론인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바벨론같이 바벨론에 섞여서 살고 싶어 하지만, 오히려 포로로 사는 게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있는 길이라고 하십니다.
이 바벨론이 타작마당처럼 막 밟히고 난 다음에는요, 그 타작마당 위에 곡식단을 깔아놓고 다시 돌로 막 짓밟아서 알곡이 나오게 합니다. 그리고 나온 그 짚 볏(볏짚)을 키를 가지고 막 털면 빈 껍데기는 바람에 날아가서 버리고 알곡은 무거우니까 바닥에 떨어지는 거죠. (바벨론이) 이런 추수를 당하게 될 것이라 하세요. 이것이 바벨론의 운명이라 하십니다. “그렇게 너희를 짓밟는 바벨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너희가) 동경하는 바벨론의 운명은 바람에 날아가는 겨와 같다. 불태워지는 껍데기에 불과하다”라고 우리 가운데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포로로 사는 게 참 쉽지 않습니다. 마음이 왔다 갔다 해요. 예배드리면 ‘그래! 바벨론은 아니야’라고 하지만 이 문을 나가면 ‘바벨론이 좋다’라고 합니다. 참 마음이 힘들죠. 그래서 하나님이 막연한 포로 기간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추수를 기다리는 농부의 마음처럼 살라고 이 말씀을 주신 것 같아요. 여러분, 농사해보신 분은 알죠? 농사는 반드시 스케줄이 있습니다. 심을 때가 있고 거둘 때가 있어요. ‘그 타이밍이 있다’라는 겁니다. “너희의 포로 기간은 그냥 끝이 없는 그런 기간이 아니라 반드시 끝이 존재하는 시간”임을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바벨론의 멸망은 반드시 끝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다”라는 것입니다.
포로 1세대들이 예루살렘에 돌아가지 못하고 이 땅에서 죽었겠지만 포로생활을 하면서 한 가지 간절한 소원이 있겠죠. “하나님, 포로 2세대들, 포로 3세대들, 우리의 자손들은 하나님이 약속의 땅에 가게 도와주세요. 그리고 저는 이 땅에서 우상숭배하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천국 가는 인생이 되게 도와주세요.” 이렇게 간절함으로 기도했을 겁니다. 그들이 흘린 눈물을 하나님께서 정말 기억하셔서 그것을(그 기도를) 버리신 것이 아니라 심으셨고, 때가 되면 기쁨으로 단을 거두게 되는 인생으로 만들어 주셨을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포로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의 노래가 돼야 하는 거예요.
저도 어린 시절부터 짓밟히는 오랜 시간을 보냈습니다. 사람들은 ‘그게 뭐가 힘들었어요?’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제가 그 고난으로 목사까지 된 거 보니까 참 저에게는 절대치의 고난이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태어나면서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그 이후까지 중증 아토피의 질병의 포로로 살았습니다. 1980년대에는 의사조차도 진단을 못 해줬습니다. 병원 가면 뭔지도 모르겠다는 거예요. 이게 뭔지 모르겠다는 겁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피와 고름이 흐르고 매일같이 간지러운데 의사는 “이게 뭔지를 모르겠다”는 게 답변이었어요. 그러니까 참 마음이 너무 답답하더라고요. 밤마다 너무 가려워서, 저는 초등학생 때 제 손을 늘 묶고 잠을 자게 되었습니다. 그런 현실이 너무 버거운 어린 시절을 보냈어요. ‘1, 2년만 지나면 괜찮겠지, ’조금만 지나면 차도가 있겠지‘라는 생각을 했지만 아무 차도가 없으니 너무 인생이 괴로웠습니다. 저희 어머니는 자녀가 이 질병의 포로에 있으니 평생 다니지 않았던 교회를 나가게 되시고 예수님을 믿게 되셨습니다. 교회 다니면 병이 나을 줄 알았는데, 그렇게 열심히 새벽 기도, 철야(예배), 주일예배 다니면 병 나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상황은 더 악화되니까 저는 ’하나님을 믿어도 아무 소용이 없다‘라는 불신의 포로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중학생 때를 지금 생각해 보면요, 저의 간절한 소원은 늘... 하나님이라는 이름은 들어봤으니까 “하나님, 제발 제발 죽게 도와주세요. 내가 오늘 밤에 자면 천국이라는 곳이 있다면 천국에서 눈을 뜨게 해주세요. 제발 제발 저를 좀 데려가 주세요”라는 기도를 밤마다 밤마다 드리면서 잠을 청했습니다. 평생 이렇게 남들에게 보일 수도 없고, 나 스스로도 ’이렇게 살 수 없다‘는 생각을 하니까 ’그냥 죽는 게 낫다‘ (하며) 아무런 소망을 가질 수 없는 그때를 보냈습니다. (물 한잔 마실게요. 너무 목이 타네요.^^)
제가 교회에서 제일 듣기 싫었던 말이 “하나님의 때가 있을 거야.” ^^ 제가 이 말을 참 듣기 싫었어요. 그런데 제가 또 (그 말을) 하고 있네요. 아무리 불러도 해결해 주지 않는 그 하나님을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게 저는 너무 싫은 거예요. 중학생 때, 고등학생 때는 반항 심리가 있잖아요. “하나님” 이렇게 하기 싫으니까 제가 너무 또 화가 날 때는 “하나!” 이렇게 불렀어요. 하나’님‘이라고 하는 게 싫더라고요. “나한테 ’님‘이라는 소리를 듣고 싶어요? 하나!!” 이렇게 참 겁대가리가 없었죠. 겁이 없었죠. 그러면서 막 기도도 아니고, 원망도 아니고 그런 것들을 막 쏟아내는 시간들을 (보냈어요.) 그런 원망의 포로에도 제가 사로잡혔습니다. 그러다가 제가 고등학생 때 우연히 참석하게 된 수련회에서 제 마음을 그냥 있는 그대로 주님께 토해냈을 때, 우리 하나님께서 십자가 지신 예수님의 모습으로 (저에게) “여전히 너를 사랑하고 있다. 너를 알고 있다” (해 주셨어요.) 저는 ‘(하나님이) 나를 알고 계실까’ 이런 생각을 했거든요. ‘나를 알고 계실까, 나의 고통을 알고 계실까?’ 그런데 “너의 아픔과 너의 고통을 알고 있다”라는 말씀으로 저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날, 교회를 십수 년 다녔지만 예수님을 제 인생의 구주로 영접하는 밤이 되었어요. 생각해 보니 제가 하나님의 때를 기다린 게 아니라 하나님이 저를 기다리셨더라고요. 나는 “그때가 언제입니까!”라고 소리쳤지만 하나님은 제가 하나님께 두 손을 들고 나올 그때를 기다리셨더라고요.
포로는 대우받는 자리가 절대 아닙니다. 무시와 조롱을 받는 자리예요. 그런데 그 자리에 있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기 때문이죠. 목장 보고서를 보니까 “자랑할 만한 골짜기가 없어서 비참하다”고 하시는 나눔을 하신 분이 계시더라고요. 그런데 그게 축복이라는 것이죠. 우리가 포로의 삶을 끝낼 수는 없지만 우리가 매일매일 내가 어떤 삶을 살지는 선택할 수 있습니다.
한국인의 기본적인 감정이 ’모멸감‘이랍니다. 우리가 다 모멸감을 가지고 있답니다. <모멸감>이라는 책을 보니까요, 이 모멸감이라는 게 한국 사람들에게는 있대요. 무슨 말이냐면, 살인죄를 저지르는 사람에게 그 이유를 물었더니 대부분 “그놈이 나를 깔봤다” 이렇게 대답하는 사람이 많았다는 거예요. “무시받았다” 이런 대답을 했다는 거예요. 우리나라는 상명하복이 있고 비교와 평가가 많은 문화이니, 한국 사람들은 조금만 화가 나면 이렇게 얘기하는 거예요. “억울하면 너도 출세해!” 이런 말이 너무 일반적으로 늘 사용된다는 거죠.
그런데 우리들교회에 와서 늘 듣는 말이 무엇입니까? “무시를 잘 당하세요. 잘 무시당하세요.” 그런데 여러분, 이것은 ’무시를 해도 괜찮다‘는 말이 아니고 ’어떤 무시를 당해도 무조건 참으라‘는 말도 아니라, ’예수님도 무시를 당하셨는데 나라고 왜 무시당하면 안 되는가‘라는 뜻입니다. ’나는 절대 무시당해선 안돼!‘라는 생각을 깨뜨리라는 말이죠. 세상은 무시를 당하면 ’화를 내라‘고 하지만 말씀은 “고난 중에 빚어지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포로생활은 무시를 잘 당하는 것이에요. 이것이 타작마당에서 우리가 불러야 하는 노래입니다.
적용 질문을 드릴게요.
Q. 요즘 어떤 노래를 같이 부릅니까? 어떤 찬양을 많이 부릅니까?
Q. 뛰쳐나가고 싶은 포로의 자리는 어디입니까?
Q. 내 시간표가 아닌 하나님의 시간표를 믿고 의지해야 힐 일은 무엇입니까?
Q. 무시 잘 당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Q. 70년 포로 생활 중에 몇 년이 남은 거 같습니까?
내가 너무 짓밟히는 타작마당에서 부르는 노래가 무엇이냐면,
2. 하나님께 호소하는 노래입니다(34-36절).
하나님께 호소하는 노래. 누구에게 호소하는 노래요? 하나님께 호소하는 노래! 우리 34절, 35절 읽겠습니다. 시작!
34.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이 나를 먹으며 나를 멸하며 나를 빈 그릇이 되게 하며 큰 뱀 같이 나를 삼키며 나의 좋은 음식으로 그 배를 채우고 나를 쫓아내었으니
35. 내가 받은 폭행과 내 육체에 대한 학대가 바벨론에 돌아가기를 원한다고 시온 주민이 말할 것이요 내 피 흘린 죄가 갈대아 주민에게로 돌아가기를 원한다고 예루살렘이 말하리라
34절, 35절은 바벨론에게 당한 고통에 대해서 예루살렘이 막 호소하는 거예요. 고통을 호소하는 것입니다. 모든 고통을 쏟아내는 장면입니다. 마치 목장에서 우리가 고발하고 쏟아내는 것 같죠. 느부갓네살를 향하여서는 ‘큰 뱀’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당시 세계관에서 가장 파괴적인 존재를 의미하는 거죠. 영적으로는 ‘사탄 마귀’. 그런 사탄의 존재가 요즘 시대에는 진리를 삼켜버리고 빼앗는 ‘인본주의’나 ‘세속주의’의 이름으로 우리 가운데 있는 것 같습니다.
이 거대한 바벨론은 남유다 백성들, 예루살렘 모든 사람들을 다 빼앗았고,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을 쓸모없다고 버리거나, 그들을 짐승처럼 바벨론의 포로로 끌고 가 노예로 부리고 학대하고, 그들을 빈 그릇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이것이 당한 것이 너무 많으니까, 이걸 지금 호소하고 있는 거예요. “내가 이렇게 당했습니다. 내가 이렇게 고통받고 있습니다. 내가 이렇게 빈 그릇입니다!”라고 막 소리쳐서 예루살렘과 시온이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부목자님이 목장 나눔에서 이런 나눔을 하셨습니다.
결혼 전에 본인은 돈을 잘 쓰지 않고 맹목적으로 돈을 많이 모았는데, 한 달에 본인은 생활비가 5만 원이었다는 거예요. 그런데도 돈이 남았다는 겁니다. 결혼 후에 아내에게 생활비로 30만 원을 줬습니다. 그런데 나는 그게 뭐가 부족하냐며, 뭐가 힘드냐며, 아내에게 그렇게 잔소리를 했습니다. (이렇게 나눔을 하신 거예요. 제가 이 나눔을 보면 생각해 보기를 아내는 여자 목장 가서 남편이 저 느브갓네살이라고 또 나눔을 할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건 제 상상인데 그러면서 이 부목자님이 또 나눔을 계속하세요.) 그렇게 악착같이 돈을 모아서 아파트를 장만했는데, 목장에서 아파트를 팔라는 처방을 해서 아파트를 팔았더니 부동산 가격이 급등했고, 도리어 전세를 구하기 위해 큰 대출을 받아야 되는 상황이 되었다는 거예요. 그런데 정작 아파트를 팔아야 한다고 했던 목장에서 ‘왜 아파트를 팔았냐?’고 기억을 못 하시는 거예요. 이분 입장에서는 참 너무 억울하고 분하고 그런 마음이 들겠죠. ‘내가 왜 목장에 와가지고… 왜 이런 나눔을 해가지고…’ 그런 마음이 또 들었겠죠. 그런데 이걸 속으로 삼켰으면 지옥을 살았을 텐데… 이분이 목장에서 솔직하게 쏟아내고, 고발하고, “너무 괴롭다”라고 한 것이 그냥 하소연이 아니고 오늘 말씀에 보니까 하나님이 들으시는 기도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화풀이 한다”고 하는데 엉뚱한 곳에서 화풀이하면 우리 인생이 망쳐지지만 우리가 목장에서 화풀이하면 그것이 하나님이 들으시는 기도가 된다는 거예요. 억울함과 분노와 슬픔과 애타는 마음을 쏟아내야지만 우리 안에 이 무언가가 들어갈 빈 공간이 생깁니다.
이 뇌 과학적으로도 뇌의 편도체가 흥분하면 전두엽이 마비되는데, 우리가 막 화가 나면 이 전두엽이 마비가 돼서 무언가를 들을 수 없다고 합니다. 화가 나면 우리 귀가 들을 수 없는 귀가 된대요. 근데 화가 나는 사람한테 “왜 안 들어라?”고 하면 안 들리는 게 뇌 과학적으로 맞대요. 그래서 화가 좀 잠잠해질 때까지 기다려야 되겠죠. 그러니까 화를 쏟아내야 되는 거죠.
이 바벨론에 포로된 자들이 짓밟힌 타작마당같이 짓밟힌 상황에서 어떤 노래를 쏟아냈을까요? 시편 137편 8절 9절
8. 멸망할 딸 바벨론아 네가 우리에게 행한 대로 네게 갚는 자가 복이 있으리로다
여기까지는 참 괜찮아요. 근데 9절
9. 네 어린 것들을 바위에 메어치는 자는 복이 있으리로다
참 너무 당한 것이 괴로워서 이렇게 노래하는 겁니다. “이 바벨론 너희의 어린 자식들을 내가 돌로 내려 찍어버리겠다. 그게 우리 행복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그들 안에 그런 아픔들이 너무 많은 겁니다.
근데 하나님은 그들의 저주와 탄식을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오늘 36절에 이렇게 말씀하시죠.
“내가 너의 송사를 들었다. 내가 너의 송사를 다 들었다. 내가 너를 위하여 보복하겠다. 내가 너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내가 너를 위해 싸우겠다. 내가 바벨론과 싸우겠다”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내 삶에 이렇게 계속 고난이 찾아오는 그 가운데 주님이 뭐라고 하시는 거예요? “내가 너희 속에 있는 바벨론과 싸우겠다. 내가 싸우고 있다”라고 주님이 말씀하시는 겁니다.
저도 부부목장을 하는데, 저희 부목자님 두 분이 경제적으로 고난이 있으세요. 빚도 지고 사업적으로 망하고 이러면서 참 힘든 시간을 보내는데, 하루에 주일 예배도 몇 번씩 드리면서 말씀 듣고... 담임 목사님 어록도 막 줄줄 외우시면서 막 얘기하시면서 “제가 죄인이죠. 제가 제 죄를 봐야죠.” 막 이렇게 고백을 하세요. 그런데 항상 목장 끝날 때쯤에 이런 나눔을 하시는데 “하… 그래도 날 이렇게 만든 놈 제가 다 총으로 쏴 죽여버리고 저도 죽고 싶은 심정입니다! 목자님 마치시죠. ” 이렇게^^;;. 그러면 또 옆에 있는 그 돈 때문에 고난 당하시는 부목자님이 “나를 이렇게 만든… 내가 이렇게 부도날 때까지 그렇게 만든 놈! 내가 수년 동안 하나님이 손 봐달라고 그렇게 기도하는데 팔 하나 안 부러뜨려 주시고 너무 서운합니다. 목자님 마치시죠.”^^;; 양 옆의 부목자님들 때문에 제가 정말 죽을 것 같은데… 저는 참 이렇게 이런 이야기를 불편하게 좀 들었어요. ‘아휴, 참... 회개를 좀 하시지 왜 자꾸 저렇게 하시나.’
그런데 하나님이 오늘 말씀 보니까 기도로 들으신다는 거예요. 바벨론을 향한 억울함을 쏟아놓고 난 뒤에 우리 안에 회개의 공간이 생깁니다. 처음에는 “저놈 죽여 버려야지”라는 그 기도를 했는데 이 예레미야의 편지를 읽고 말씀을 읽고 기도가 바뀌죠. 이 포로기의 중반쯤 됐을 때의 그들의 기도가 예레미야애가 3장에 나와 있는데,
40. 우리가 스스로 우리의 행위들을 조사하고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41. 우리의 마음과 손을 아울러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들자
“그 어린아이를 내가 찍어버리겠다”라는 막 그런 쏟음을 하고 난 뒤에 하나님이 포로의 시간을 겪게 하시면서 이들이 뭐예요? “하나님께 우리가 돌아가자” 이렇게 고백하게 된다는 겁니다. 더 나아가 그들은 원수 바벨론의 평안을 위해서 기도하는 자까지 되었습니다. 그래서 참 포로 시간이 너무 중요한 것 같아요.
예레미야 29장 7절에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바벨론의 성읍)의 평안을 구하고 그를 위하여(바벨론을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포로를 하면서 내가 모든 걸 쏟아내고, 쏟아내고 난 다음에 말씀을 통해서 내 죄를 보고 결국에는 ‘나를 이렇게 만든 사람이 나를 하나님께로 인도했다’라는 것을 알고 그를 위해 기도해 주게 되었다는 거예요.
아파트를 팔고 손해 본 이 부목자님의 나눔이 어떻게 이어졌을까요? 이렇게 고백합니다.
“모든 것이 나의 우상인 아파트를 팔라고 하신 세팅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아무리 아껴봐야 하나님께서 원치 않으시면 아무 의미가 없구나’ 하며 그때부터 나의 물질 우상을 내려놓게 된 것 같습니다. 그때는 손해이고 그때는 너무 힘든 시간이었지만 지금 돌이켜 보니 제 우상을 무너뜨리시고 가정을 지키신 하나님의 구원 사건이라고 생각됩니다.”
너무 힘들었죠. 쏟아냈어요. 막 쏟아냈어요. “어떻게 목장에서 내가 처방 듣고 했는데 그걸 기억 못하세요!!”라면서 또 쏟아냈어요. 그런데 말씀을 듣고 ‘아! 이게 그렇게 하나님이 목장을 통해서 나에게 인도해 주신 것이 하나님의 구원 사건이구나!’라고 이분이 이 고백을 하시면서 뭐예요?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는 부목자로 섬기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포로생활 중에 이 타작마당에서 짓밟힐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습니까? 기도하고, 예배하고, 회개하고. 하루하루를 그냥 잘 살아내는 거죠. 예전에 우리가 참 이렇게 지금보다 윤택하지 못할 때가 있잖아요. 그 시절에는 우리가 기도의 영역이 정말 넓었던 것 같아요. 여름에 더울 때는요. 에어컨이 많이 없을 때니까 “하나님 덜 덥게 해 주세요.” 이런 기도까지 했던 것 같아요. 이렇게 추울 때는 “덜 춥게 해 주세요.” 이런 기도도 했습니다. 그리고 비 많이 올 때는 “비 좀 잘 안 오게 해주세요. 교회 예배 가야 되는데” 이런 기도도 많이 했습니다. 근데 요즘에는 자녀들에게 해 줄수 있는 것이 많으니까 기도의 영역이 많이 줄어드는 것 같아요. 우리가 뭔가를 해 주는 것보다 기도해 주는 게 가장 잘해주는 거라고 생각이 돼요.
제가 어릴 때, 두 손 놓고 자전거를 타다가 균형을 잃고 넘어졌습니다. 아스팔트에 다리가 쫙 갈려가지고 피가 난 상태로 집에 돌아왔습니다. 엄마를 딱 보자마자 눈물이 탁 쏟아지는 거예요. “엄마!!” 이렇게 한 거예요. “엄마!!” 그때 엄마가 와서 “아휴, 괜찮아? 어떻게!!! 약 바르자!!’라고 할 줄 알았는데, 저희 어머니가 뭐라고 하시냐면 딱 저를 보더니 “안 죽어” ^^ “안 죽어. 안 죽어. 그렇게 피난다고 안 죽어.” 이렇게 하시는 거예요. 저는 그때 심각하게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 엄마가 어딘가에 따로 계실 것 같아.’^^ 제가 하루는 이렇게 자고 있는데, 새벽에 목말라서 딱 깼는데 발밑에 누가 있는 거예요? 놀래 가지고 보니까 저희 어머니가 계신 거예요. 근데 뭘 하는지 보니까 무슨 뭘 말하고 계신데 뭔 소리인지 모르겠는데, 기도를 하고 계신 것 같은 거예요. 막 눈물 흘리시면서 ‘아, 내 엄마가 맞구나. “안 죽어”라고 하신 것을 회개하시는 건가.’ 뭐 이런 생각도 하면서^^;
고대 근동에서는 눈물을 병에 담아서 보관했습니다. 그러면서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라는 기도를 했어요. 하나님이 이 짓밟히고 또 짓밟힌 이 타작마당에서 우리가 흘린 눈물을 주의 병에 담아 계수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모든 마음을 하나님께 목장에 가서 고하는 것! 하나님이 들으신다고 하시니 여러분 이번 주도 그런 한 주를 보내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적용 질문드릴게요.
Q. 빈 그릇이 되었다며 호소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쏟아내지 못하고 아닌 척하고 있는 것은 또 무엇입니까?
Q. 억울함을 내가 해결하려고 합니까, 하나님께 송사하고 있습니까?
Q. 엉뚱한 곳에서 화풀이합니까, 목장에서 고발하고 있습니까?
아까 또 목사님 말씀해 주셨잖아요. 또 (목장에서 다른 사람들이 내 말을) 안 들으면 ‘내가 안 들리는 말을 하나 보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 또 하나님은 다 아신다고. 들으시고 보시고 계시니까. 맞죠?
내가 짓밟힌 타작마당에서 우리가 부르는 노래는 세 번째,
3. ‘말씀대로 될지어다’의 노래입니다(37-44절).
말씀대로 될지어다!! 우리 37절 38절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37. 바벨론이 돌무더기가 되어서 승냥이의 거처와 혐오의 대상과 탄식 거리가 되고 주민이 없으리라
38. 그들이 다 젊은 사자 같이 소리지르며 새끼 사자 같이 으르렁거리며
이 바벨론이 돌무더기가 될 거라고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바벨론 성벽은 당시 건축 기술의 집합체입니다. 대단한 건축 기술이에요. 두께가 7m~8m, 넓게는 30m까지 되고 그 성벽 위에 4두 마차, 말 4마리가 끄는 마차가 지나다닐 수 있을 정도로 튼튼하고 강한 성벽이었습니다. 외벽과 내벽 이중 구조로 돼 있고, 외벽 앞에는 유프라테스강이 깊게 흐르기 때문에 적군이 절대로 침범할 수 없는! 왜냐하면 강을 건너야 벽을 타잖아요. 그 강을 넘어올 수도 없는데 어떻게 벽을 탑니까? 그런데 벽도 높고 두꺼워서 뚫을 수 없는데. 바벨론의 성벽 자체가 아무도 침범할 수 없고 뚫을 수 없는 완전한 건축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하나님께서 뭐라고 해요? “그걸 내가 하루아침에 돌무더기가 되게 하겠다.” 우리가 그렇게 이중 삼중으로 쌓은 학벌과 인맥과 우리의 실적도 하나님이 부르시면 하루아침에 돌무더기가 된다는 거예요. 그것을 의지할 것이 아니라고 하시는 겁니다.
여러분 다윗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다윗, 소년 다윗, 블레셋 군대 앞에 있는 작은 소년 다윗, 이 갑옷도 몸에 안 맞아서 그 갑옷도 못 입고 나아가는 소년 다윗의 손에는 뭐가 들려 있습니까? 작은 돌멩이 5개. 근데 그 돌멩이 5개도 하나님의 손에 들리고 하나님을 위해서 쓰이니 그 골리앗 장군을 무너뜨리게 되잖아요. 성벽 인생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쓰시는 게 아니라 작은 돌멩이 인생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위해서 쓰이고자 하면 하나님을 위해 쓰임 받고자 하면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그 돌멩이를 쓰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뭐라고 생각해요? “이 돌멩이 필요 없어! 성벽이 돼야 돼! 크고 강한 성벽이 돼야지만 나를 지킬 수 있고 가정을 지킬 수 있고 내가 이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어!”라고 우리가 그렇게 착각하는데 하나님 뭐예요? 그것은 돌무더기가 될 것이다. 오히려 다윗의 손에 있는 그런 돌멩이가 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우리 가운데 말씀해 주시는 겁니다.
뛰어넘어서 우리 41절 말씀 한번 볼까요? 41절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41. 슬프다 세삭이 함락되었도다 온 세상의 칭찬 받는 성읍이 빼앗겼도다 슬프다 바벨론이 나라들 가운데에 황폐하였도다
바벨론의 멸망에 대한 슬픔을 얘기하는데 “슬프다” 이 말은 이 ‘멸망 때문에 슬프다’가 아니라 원어를 보면요. “어쩌다가… 쯧쯧쯧…” 이런 의미예요. “어쩌다가…” 조롱의 말입니다. “네가 그렇게 잘난 체하더니, 네가 그렇게 교만을 떨더니 네가 그렇게 자랑하는 그것 때문에 결국엔 네가 망했구나. 어쩌다가……”라고 하면서 “결국 바벨론은 이 조롱을 듣게 될 것이다.”라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이 바벨론도 알아듣고 남유다 포로된 자들도 이걸 깨달았으면 이제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 알 텐데 이게 안 들리니까 바벨론은 더욱더 교만해지고, 남유다 포로된 백성들은 ‘내가 이렇게 포로 생활하는 게 뭔 의미가 있지?’라고 하면서 그냥 종노릇만 하는 겁니다. 이 포로도 하나님이 주신 사명인데 그냥 종노릇만 하는 거예요, 사명감 없이.
그런데 여러분, 이 예레미야의 예언은 정말 비현실적인 위로도 아니고 희망 고문도 아닙니다. 예레미야의 이 예언은 실제 성취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진짜 실제 역사 가운데서 일어난 일이 되었습니다.
BC 539년 이 말씀이 선포된 지 수십 년이 지난 그날, 당시 바벨론의 벨사살 왕은 이 성경만 믿고 오늘 읽은 39절 말씀대로 “취하여 기뻐하다가 영원히 잠들어 깨지 못하게 하리라”의 결론이 되었습니다. 이 왕은 많은 귀족들을 모아놓고 밤새 술 잔치를 벌이다가 그 강수로를 타고 몰래 들어온 페르시아 군대에 의해서 하룻밤 만에 다 점멸되었습니다. 예레미야의 예언이 실제 역사가 된 것이에요.
그리고 오늘 읽은 44절 “바벨론 성벽은 무너졌도다” 이건 그냥 시적 표현이 아니에요. 그냥 시적 기도도 아닙니다. 이것은요. BC 520년에 페르시아의 다리오 1세가 바벨론의 성벽을 뜯고 성문을 뜯고 그 성벽을 무너뜨린 실제 역사가 되었습니다.
이 예레미야의 말씀은 희망 고문이나 그냥 위로가 아닙니다. 실제 성취될 말씀이었다는 거예요. 당장 이루어질 일 아니지만 예레미야 이렇게 말한 것은 그 일이 우연히 일어날 일이 아님을 알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바벨론도 망하고 페르시아가 부강해지고, 이걸 하나님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그냥 역사 속에서 우연하게 다 일어난 그런 일들이야”라고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성취된 것이에요. 창조를 받아들이기 싫어하는 사람은 이 세상의 역사를 길게 늘어뜨려 놓고 “이 세상은 우연하게 다 일어난 일이야”라고 하지만 이 세상은 하나님의 목적과 이유에 따라 창조된 것이죠. 이 세상에 우연히 일어난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다 이유가 있는 것이에요.
바벨론의 멸망은 우연하게 때가 지나서 바벨론이 약해졌기 때문에 우연하게 일어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의 끝이 무엇인지 보여주시려고 하나님 말씀대로 되게 해 주신 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일의 원인과 이유와 목적, 결론이 되신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가정에 한 사람이 말씀을 들으면 놀라지 않게 되는 거죠. 왜요? “말씀대로 이루어졌구나” 질병에 걸려도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것이구나. 구원의 사건이구나”, 부도가 나도 “구원의 사건이구나”, 자녀가 이렇게 힘들어도 “구원의 사건이구나. 말씀대로 되어지는구나.”라고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가정에서 말씀을 듣고 적용하는 한 사람을 우리가 무시해서도 안 되는 것이에요.
우리가 세상 성벽-이 바벨론처럼 거대한 성벽-을 짓고자 우리가 매일 같이 열심히 삽니다. 세상 성벽을 바라보면서. 그런데 그렇게 열심히 난리를 쳐도 100% 죄인인 우리는 그걸 죄짓는 데밖에 못 써요.
하나님은 하나님 백성을 한 번도 성벽으로 지키신 적이 없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고 광야에 살 때에 성벽이 있었습니까? 하나님이 친히 성벽과 산성이 되어 주셔서 그들을 지키셨습니다. 오히려 성벽 짓고 안심할 때 하나님 버리고 우상을 섬겼죠.
우리의 가정, 내 삶, 내 자녀 내 직장도 우리가 든든한 성벽을 지으려고 애쓰는 게 아니라 우리가 믿음과 말씀의 성벽을 짓고자 애쓸 때에 절대로 무너지지 않는 하나님의 자체가 성벽이 되어 주셔서 지키시고 보호하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기도해야 되겠죠.
“하나님이 성벽 되어 주십시오”
이 믿음의 성벽을 세우는 청년들이 있는데요. 청년들이 해외에도 많이 유학도 가고 취업도 하잖아요. 해외에 온라인 청년 목장이 있습니다. 이번에 담임 목사님이 성지 순례를 또 갔다 오셨는데 이 몰타라는 지역에 담임 목사님이 가셔서 설교하실 때에 유럽에 있는 청년들이 이제 다 거기에 모인 거예요. “올 수 있는 친구들 다 와라.” 그래서 몇 명이 이렇게 모였습니다. 주일 예배를 함께 드리고, 담임 목사님과 이렇게 만나서 대화도 하고 우리는 한국에 있는데도 잘 못 만나는데 유럽에 있는 그 친구들도 만나고 너무 부럽네요. 맞죠? 막 예배드리고 만나서 막 이런저런 얘기를 했는데 이 친구가 스위스에서 목자를 하는 친구예요. 목사님이 “아이구, 네가 이렇게 친정엄마 역할도 잘하고 너무 잘하고 있구나.” 이 격려에 이 친구도 너무 이제 뿌듯하고 감사한 거예요. ‘격려도 받았다. 잘하고 있구나’라고 생각했어요. 목사님이 가시다가 이 자매한테 딱 이 한마디 질문을 하신 거예요. “너는 형제가 믿음만 있으면 결혼할 수 있겠니?”라고 물어보셨는데. 3초간의 정적.^^ 그런데 “예전에는 못 할 것 같지만 이제는 ‘네’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렇게 그 자리에서 대답을 했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제 오랜만에 모였으니까 오프라인 목장을 이렇게 하면서 나눔을 하는데 질문이 “당신은 레아가 좋으십니까? 라헬이 좋으십니까?”
이 질문이었어요. 딱 질문을 듣는데 “왜 꼭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을 골라야 하나? 그냥 둘 다 짜증 난다!”라고 이렇게 답하고 ‘난 여전히 요셉이 되고 싶구나’ 이런 나눔을 했다는 거예요.
근데 예레미야 45장 5절의 말씀을 큐티하면서 “네가 너를 위하여 큰 일을 찾느냐 그것을 찾지 말라” 이거를 딱 묵상하고 ‘아, 내가 이렇게 또 나를 위해서 세상일을 찾고 있구나. 이 뼈 때리는 말씀으로 나를 찾아오셨구나’라는 생각을 했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목사님이 “믿음만 있으면 되겠니?”라는 그 질문이 “배우자도, 내 커리어도, 나의 모든 삶도 하나님께 맡기고 믿음 하나로 살면 안 되겠니?”라고 주님이 물어보시는 것 같다“ 이런 고백을 하더라고요.
또 이렇게 목자가 있으니까 부목자가 있잖아요. 그 부목자는 이렇게 기도를 딱 써 가지고 올렸더라고요. 기도문을 제가 한번 읽어드릴게요.
“하나님, 저 오늘 떨어졌어요. (취업에서 떨어진 거겠죠.) 놀라거나 슬프진 않지만 서운하고 무기력했어요. 이제 한국 가야 될 수도 있는데… 한국 가야 할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은데… 이대로 가면 정말 나는 이룬 것이 하나도 없는 것 같아서 너무 속상해요. 생명이 상급이라고 하시는데 전 여전히 눈에 보이는 게 중요하고 큰 일을 원해요. 그런데 이 마음을 저도 어쩔 수가 없어요. 여전히 솔직한 마음으로는 ‘이 정도 했으면 안 되겠냐고 내일 뭐 죽는 것도 아니고 한 텀 정도는 좀 이제 열어주시고 천천히 좀 훈련시키면 되지 않느냐고 왜 나한테만 이렇게 빡빡하시냐고’ 서운한 마음이 들어요. 그래도 그것 때문에 그냥 자려고 그랬는데 쓰큐까지 하니까 (쓰큐 알죠? 쓰면서 하는 큐티) 쓰큐까지 하니까 기쁘게 봐주세요. 진짜 반항하고 싶었는데 큐티엠도 듣고, 듣큐도 하고 이제 쓰큐까지 했어요. 의지할 게 하나도 없고 서운함을 토로할 곳도 없으니까 결국 또 말씀 앞이에요. 짜증 나요.^^ 근데 생명은 책임져 주시겠다고 하시니 저 좀 살려주세요. 저는 아주 거지로는 못 사니까 돈도 좀 주세요.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겠지만 그냥 제 마음이 그래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그렇죠. 우리가 다 이렇죠. 이것이 바로 근데 타작마당에서 부르는 말씀에 매달리는 노래라는 생각이 듭니다. “믿음만 있으면 되겠니?”라는 질문에 “네”라고 대답하는 것이 어려울 수 있죠. 하지만 바벨론을 그리워하지 않고 부러워하지 않고 “네”라고 대답하는 말씀의 성벽을 쌓는 우리 모두를 위해서 여러분 목장에서 늘 응원해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지난주 목사님이 제가 설교를 마치고 담임 목사님이 저한테 이렇게 물어보셨어요. 제 딸이 이름이 가은인데 “너는 가은이 사건이 축복이라고 생각하니?” 이렇게 물어보시는 거예요. 순간 제가 멈칫했습니다. 멈칫하고 제가 “제 딸이 이 사건을 통하여서 정말 신앙고백이 달라졌어요. 진짜 하나님을 좀 만난 것 같아요”라고 이렇게 제가 대답을 했는데 제가 대답을 잘했다고 생각했어요. ‘아, 대답을 잘했다.’ 그런데 목사님이 또 물어보시는 거예요. “아니 그렇지 않아도… 그렇지 않아도 축복이니?”라고 물어보시는 거예요. 근데 제가 선뜻 대답이 안 나왔습니다. ‘하나님만 상급이 되는 이 고백이 잘 안 되는구나. 여전히 되었다 함이 없구나. 우리가 늘 듣지만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것, 하나님만 상급이 되는 것 그것이 좋은 줄 알지만 여전히 안 되는구나’ 저도 여전히 안 되는 제 모습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말씀대로 될지어다’의 노래를 불러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그렇게 그리워하고 좋아하는 바벨론 성벽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이 성벽 되시는 것. 그것으로 우리 인생을 하나님이 빚어가신다면 결국에는 결국에는 “정말 하나님만 상급되신다” 이 고백이 우리 가운데 나오게 될 줄로 믿습니다.
적용 질문드리겠습니다.
Q. 말씀대로 믿고 살아서 누리게 된 응답이 있습니까? 교만하게 살다가 “어찌하여”라며 조롱당한 일이 있습니까?
Q. 든든한 성벽이라고 생각하며 지켜내고 싶은 것은 무엇입니까?
Q. 말씀의 성벽, 믿음의 성벽을 잘 세우고 있습니까, 세상 성벽만 쌓고 있습니까?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포로에 끌려간 남유다 백성들은 시편 137편 “슬프다. 기쁨이 없다”라는 노래만 불렀는데, 그들이 포로생활을 끝내고 돌아올 때는 시편 126편에 이런 노래를 불렀습니다.
1.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 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도다
2.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그 때에 뭇 나라 가운데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다 하였도다
3.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큰 일을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
4. 여호와여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내들 같이 돌려 보내소서
5.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6.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포로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가 믿음으로 이 고백을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가 뿌린 눈물의 씨앗이 반드시 하나님께서는 기쁨의 단으로 우리 가운데 주실 것이라고 구원의 열매로 안겨주실 것이라고 그렇게 믿음으로 고백하는 여러분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찬양하겠습니다.
♬ 주 부르심 따라
예수 이름 부르며
나의 인생을 드렸네
사람들 이해 못하고
결과 어떠하든지
주만 따라 가길 원했네
이제와 돌이켜보니
그저 부끄러울 뿐
모두 다 주의 은혜라
벼랑 끝에선 나를
주의 손이 이끌어
여기까지 인도하셨네
하나님 사랑
날 떠나지 않고
끝까지 사랑하셨기에
오직 예수와 십자가만 바라보면서
나의 생명도 아낌없이 드리기 원했네
내 노래가 상한 영혼 일으켜
다시 살게 하는 노래가 되길
주 뵈올 때 착한 일꾼이라
칭찬받기 나 원하네
내 노래가 상한 영혼 일으켜
다시 살게 하는 노래가 되길
주 뵈올 때 착한 일꾼이라
칭찬받기 나 원하네
눈물로 복음의 씨 뿌려
기쁨에 담궈두리
한 알의 밀알처럼 죽어
다시 살리라
내 노래가 상한 영혼 일으켜
다시 살게 하는 노래가 되길
주 뵈올 때 착한 일꾼이라
칭찬받기 나 원하네♬
기도제목 모든 게 짓밟힌 채로 살아가는 것 같습니까? 하나님을 기다리는 노래를 부르게 도와주시옵소서. 하나님께 호소하는 노래를 부르게 하여 주십시오. 말씀대로 될지어다! 지금 아버지 눈앞에 보이는 것이 없다 할지라도 “말씀대로 이루신 그 말씀대로의 삶이 되어지기를 원합니다!” 라고. 이 시간 “주여” 한 번 부르고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만이 상급이 되지 않아서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포로가 되어 짓밟히는데도 하나님만이 상급이 아니라 바벨론의 높은 성벽을 바라보면서 또 부러워하고 포로가 끝나기만을 바라고 있는 것이 저의 모습이고 우리들의 모습이 아닌지 돌아보며 주님께 회개합니다. 주여,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지금의 삶이 세상에 밟히고, 가족에게 밟히고, 돈에 밟히고, 무시를 당하고, 조롱을 받는데… 이것이 끝나기만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잘 당하는 것이 우리가 불러야 되는 노래라고 하시는데… 주여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잘 견디며 잘 기다리며 잘 회개의 때를 보낼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하나님의 때가 되면 추수한다고 하십니다. 그때 내가 기다리지 못해서 가라지가 되지 않을지… 하나님, 우리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기다리게 도와주시옵시고, 하나님, 그때 알곡처럼 하나님 품에 안기는 인생이 되어 세상을 쫓다 불타 없어지는 바벨론 편에 서지 않고 하나님 편에 서서 기쁨으로 주님께서 단을 거두는 인생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하나님, 우리가 쏟아내는 것을 들으신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좋은 고백만 “할렐루야 아멘”만 들으시는 게 아니라 “하나님 죽겠어요 못하겠어요. 하나님 정말 저 사람 다 없애주세요. 하나님 정말 괴로워 미치겠어요.”라는 기도도 다 들으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이 불편한 마음으로 들으시는 게 아니라 “너 왜 그러냐”라고 들으시는 게 아니라 주님이 싸워주시겠다고, 내 편이 되어주셔서 싸워 주시겠다고 주님이 들어주신다고 합니다. 그 주님께 우리가 나아가 목장에서 구하고 하나님께 구하여 하나님, 정말로 우리의 기도가 바뀌고, 사명이 바뀌고, 우리의 삶이 바뀌는 인생으로 주님, 만들어 주시기를 원합니다. 우리 울고 웃는 이 목장을 통하여서 결국에는 사람 살리는 목장들이 다 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내 계획대로 세운 성벽이 아니라 말씀대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성벽을 다 무너뜨리고 하나님이 성벽 되어 주신다고 하시니… 하나님 아버지, 이 나라도 인권과 아버지, 온갖 세상의 좋은 성벽이 아닌 하나님이 성벽이 되어 주셔서 악법을 막아 주시옵시고, 태아생명보호법이 제정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담임 목사님의 영육과 모든 결정과 사역 위에 성령의 기름을 부어 주시옵소서.
오늘도 빈손으로 나오지 않고 귀한 예물을 드립니다. 기쁘게 받아주시고 하나님께 드릴 것만 있고 사람들에게 나눌 것만 있는 삶이 되게 도와주시옵시고, 프로젝트와 아이디어와 모든 결정에, 관계에 하나님 성령의 기름을 철철 부어 주시옵소서. 오늘 연약한 마음으로 주 앞에 나온 모든 분들에게 예수의 피 묻은 손으로 안수해 주시사 나음을 있게 도와주시옵소서. 회복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도우시길 간절히 원하오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기도제목
A. 말씀의 성벽을 세워주셔서 감사합니다. 보내신 처소를 잘 지키겠습니다. 모든 것을 손해나지 않고 계수해 주세요.
B. 주님께만 구걸하여 큐티의 은총을 삼십배 육십배 백배로 받은 것을 믿습니다.
C. 하나님보다 빠른 열심을 멈추고, 때를 기다리는 찬양하며 2025년 마무리 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