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키실 때에 기뻐하리로다 (시편 52:1-53:6)
2025.11.23 주일예배 -김현우 목사
사도행전 큐티가 어제로 마쳤다. 사도행전은 누가가 데오빌라 각하에게 썼던 편지이다보니 인사로 시작했다. 그런데 마지막 절에는 인사가 없이 주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 라고 마친다. 사도행전이 인사도 없이 끝난 이유는 성령행전이 마치지 않기 때문이다. 여전한 방식으로 말씀 묵상하면서 우리들 행전을 잘 써가는 우리 모두가 되길 소망한다.
오늘 본문은 시편 두 편이다. 오늘은 52편에 집중하도록 하겠다. 공통적으로 이 두 편은 다윗의 지혜의 교훈 마스길이고 악인으로 고통하는 환경에서 내가 포로된것이 보이고 내 혀가 간사한 것이 보여서 주님만이 내 소망이시고 내 기쁨이라고 고백하는 노래이다. 그중 52편은 구체적인 한사람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말씀이다. 도엑이라는 한사람 때문에 52편이 나온다. 나를 힘들게하는 한사람을 묵상하다보니 오히려 내가 그사람과 다를것이 없다는 것이 보여지고 이 죄가 보여 아둘람 굴에서 천국을 누리고 있다는 내용이다. 그러니까 굴 속에서도 작은 집에서도 천국을 누리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53편은 돌이키실 때에 기뻐하리로다 이다. 포로가 되었는데 하나님께서 돌이키셨다고 고백한다. 6절 하반절. 다윗이 이것을 쓰고나서 이스라엘이 포로가 되는데 그건 수백년 뒤의 일이다. 다윗은 지금 내가 바벨론의 포로된 것을 생각하기도 하지만 이것의 포로가 되었다고 고백하는 것 같다. 미움의 포로, 옳고그름의 포로, 의의 포로가 되어있었는데 하나님이 날 돌이키셨네요. 감사합니다. 하는 고백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날 힘들게하는 사람, 포로가 되어있는 억눌린 환경이 오히려 내가 죄와 사망에서 해방되어 영원한 천국을 누리게하는 귀한 환경인줄 믿는다.
1.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기에 내 죄를 심판해 주십니다.
52편에 표제어가 나온다. 에돔인 도엑이 사울에게 이르러 다윗이 아히멜렉의 집에 왔다고 그에게 말하던 때에. 고자질 하던 때라고 할수있다. 이 당시 다윗은 장인어른인 사울에게 쫓겨다녔다. 왜냐하면 사울이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노래를 들었기 때문이다. 나보다 더 대단한 사람이 있다고 하니 질투해서 죽이려고 하는 것이다. 가족이 날 질투하고 죽이령하는 것도 힘든데 이제는 나와 상관도 없는 심지어 계급도 나보다 한참 낮은 도엑이 날 고발한다. 이런 상황에서 노래를 한다.
1절
포악한 자여 라고 했으니까 표제어에 나오는 도엑이라고 할수 있다. 다윗은 어찌하여 스스로 자랑하냐고 묻는다.다윗의 위치를 알려주어서 다윗을 죽게하는것으로 끝이 아니라 자기는 사울에게 잘보여 세상 성공하려는 것이다. 이기적인 계획이 악한 계획이다. 포악한 자가 악한 계획을 스스로 자랑할때 다윗에게는 그것을 대적할 또다른 계획이 없었다. 그러나 다윗에게는 그 계획을 뛰어넘는 든든한 뒷 배,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항상 있다. 여기서 인자하심은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의미하는 헷세드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무한한지 생각하려면 우리의 유한한 사랑과 비교해보면 좋겠다. 우리는 자녀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한계를 보인다.
제가 딸을 양육할때 아침 점심까지는 제가 봐도 제가 참 자상한 아빠이다. 너무나 심한 장난을 치는 것도 다 받아준다. 그런데 저녁이 되면 체력도 방전, 인내심도 방전. 낮에는 잘 받아주던 똑같은 장난을 저녁에는 분조장 아빠가 되어 받아주질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저희 딸이 유치원 등원거부, 초등학교는 등교거부를 했다. 유치원 학교에서 너무나 잘하는데 선생님한테 혼날까봐 무서워서 못가는 것이다. 내가 넉넉하게 있을때는 잘해주다가 화를 내는 것이다.
우리의 인자와 사랑은 한계가 이렇게 확실하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의 사랑에는 한계가 없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항상 있도다. 이것이 다윗이 비빌 언덕이었다. 그러니까 이렇게 악한 사람이 날 고발하고 힘들게해도 버텨낼수 있는 것이다. 비빌 언덕인 하나님을 다시한번 붙드시길 소망한다.
요즘 보면 악플을 읽다가 잘못된 선택을 하시는 분들이 있다. 다윗이 그런 상황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도엑이 손가락 파이터가 되어 다윗에 대한 악플을 쓰는 것이다. 그런데 다윗이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변하지 않는다는 자존감이 있기때문에 나를 향한 악한 계획, 악플을 담대하게 읽을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이 날 사랑하신다는 것이 어떤 상황에서도 붙들어야할 자존감인줄 믿는다. 존재 자체만으로도 사랑해주시는 하나님의 인자가 항상 있기때문에 존재만으로도 자존감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저는 정말 자존감이 낮다. 근래에 방송출연 제의를 받았다. 제 얘기를 했을때 다른 사람들이 악플을 쓰면 어쩔까 생각하니 아직은 감당이 안되겠더라. 오늘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이렇게 자존감 없는 저를 다윗의 고백으로 같이 나누게하신 이유가 있는 것 같다. 하나님이 우리 자존감이다. 라고 고백하며 갔으면 좋겠다.
2절
다윗은 악한 계획을 직면하며 2절을 말한다. 도엑의 혀에 인격이 있는듯 하다. 자기가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잖아요. 거기다가 자기가 고발해야하는 사람은 왕의 사위이다. 그러니까 칼날 위의 물방울처럼 사울 앞에서 간사를 행해야하고, 동시에 다윗에게는 날카로운 칼로 찔러대는 것이다.
다윗은 왜 도엑의 혀가 이렇게 악을 행하는지 직면하고 진단한다.
3절
선의보다 악과 거짓을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마땅히 사랑해야할 것보다 사랑해야하지 말것을 사랑하기에 아부하거나 상처를 준다는 것이다. 객관적으로 말하지 못하고 지나치게 아부하거나 상처를 주는 인생을 사는 것이다. 하나님이 아니라 죄인인 자신을 사랑하니 아부가 되고 상처가 된다.
도엑의 혀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이야기가 아닌가 생각한다. 자기가 낳은 자식에게 상처주고 싶은 사람이 어딨겠는가. 그러나 저는 어머니께 상처를 많이 받았다. 어머니께 말좀 조심하시라고 말의 힘이라는 책을 사드린적도 있다. 돌아보니 어머니가 상처되는 말이 무엇인지 제가 너무나 잘 알고있더라고요. 그런 말만 골라했던 것이 저였다. 어머니는 감정적이라 그 말을 하시는건데 저는 계산적이라 어머니가 이런 말에 상처받겠지 하고 말한 것이다. 악을 더 사랑한 제 모습을 보게 된다. 제가 도엑이 맞다.
이렇게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는 우리의 혀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를 주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누구보다 가장 사랑하는 것이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도엑이 된다. 자식을 사랑하지만 내가 원하는 사랑만을 주니 상처를 주고 받는다. 이렇게 남도 나도 죽인다. 결혼도 마찬가지이다. 나중심적이고 이기적인 행복이라는 목적에 초점이 가있기 때문에 상처를 주고 받을수밖에 없는 구조 속에서 산다. 나때문에 아침차리고 나때문에 적용하니 상처받을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공동체를 사랑해야 상처뿐인 가정에서 상처가 약재료가 되어 사람살리는 가정이 될줄 믿는다.
다윗은 셀라 라고 한다. 깊이 묵상하는 시간을 갖고 나서 혀에 대해 묵상하더니 이렇게 말한다.
4절
포악한 자여! 하더니 셀라의 깊은 묵상을 마치니까 포악한 자가 아니라 간사한 혀여 라고 노래한다. 간사한 도엑의 혀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의 혀를 묵상하는 것 같다. 도엑이 아니라 혀에 대해 집중한다. 모든 혀가 간사하구나 하고 고백하는 것이다. 이렇게 간사한 혀는 남을 해치는 모든 말을 좋아한다고 한다. 남의 수치를 나누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다. 우리가 목장 세시간은 힘들어도 남의 뒷담화 세시간은 쉽지 않은가. 마치 그 사람을 위한듯하면서 그사람의 수치와 죄를 드러내는 것이 우리의 혀다. 내 혀지만 내 잘못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 또 우리 혀이다. 하지만 남을 고발할때는 따발총이 되는 것이 우리의 혀다. 그러나 우리의 혀가 창조하신 주님의 의도에 맞게 행동할때가 바로 공동체에서 우리의 수치를 나눌때 비로소 제기능을 한다.
제가 어머니의 죄와 수치를 나눌 때는 여전히 자존감이 낮고 여전히 아침 저녁으로 자살충동이 올라오고 힘들었다. 그러나 저의 죄와 수치를 나누기 시작하니 자존감이 높아지고 자살충동은 낮아지는 것을 경험했다. 진짜 나를 사랑하는 방법은 내 수치와 죄를 말씀 안에서 나누는 것이다. 혹시 공동체 안에서 죄와 수치를 나누다가 힘든 일을 겪을까봐 걱정이 되시는분이 있는가? 놀랍게도 말씀 안에서 공동체 안에서 나누면 하나님이 지켜주신다. 내가 당해야할 수치를 받기를 각오하면 하나님이 지켜주신다. 여호와의 인자는 항상 있도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공동체 안에서 말씀으로 깨달은 내 죄를 고백할수 있고 그것이 날 보호하고 지키는 방법이다.
혀에 대해 묵상한 다윗은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기 시작한다.
5절
하나님이 영원히 멸하는 지옥에 대한 말씀이 성경에 천국보다 더 많이 나온다. 이 심판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영원하다고 말한다. 왜 이렇게 무시무시한 심판을 선포할까? 그러니 이 땅에서 심판당하고 고난받고 회개하고 멸망당하지 않는게 최고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 간사한 혀가 지금이라도 회개하는 것이 최고라고. 잠시 장막에서 뽑아내시는 심판을 당하는 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죄를 짓든 말든 가만히 내버려두시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수많은 차가 있는 곳으로 뛰어간다면 가만히 지켜보시겠는가? 말리시겠는가? 사랑은 방치가 아니다.
딸이 미운 4살이던때 아내와 산책을 나갔다. 딸이 손을 뿌리치고 차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저러다 죽으면 내 탓 아니다~ 난 인격적으로 잘 길렀어~ 하는게 사랑인가? 안돼!!! 하면서 뛰어가고 분조장이 발동해 네살 아이의 엉덩이를 얼마나 때렸는지 모른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말실수가 있지 않는가. 공동체 안에서 낱낱이 드러나는 것이 수치가 아니라 하나님이 챙겨주시는 것이다. 내 죄가 공동체 안에서 드러나면 하나님이 안돼!! 하면서 말리시는 사건이다. 이것이 공동체 안에서 우리가 누릴수 있는 사랑인줄 믿는다.
다윗이 쓴 23편에 이 모습이 나온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하고 노래 부르다가 주의 인자가 나를 평생 따르리니 한다. 따른다는 표현이 마치 졸졸 쫓아가는 것처럼 느껴지잖아요.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사냥개가 멧돼지나 사슴을 따라가는 것처럼 전속력으로 따라가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차도로 뛰어가는걸 전속력으로 따라가서 막아주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런 의미에서 이스라엘이 포로가 되더라도, 고발당하더라도 우리를 돌이키게 하시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저와 여러분이 그런 사랑을 받고 사는 사람들이다.
목자님의 고백이다. 아들이 고등학생일때 상상도 못한 일을 할줄 몰랐다. 휴학을 한다고 하질 않나 결국 자퇴한다고 하질 않나. 그런 일이 있은지 벌써 몇십년이 지났다. 고난이 축복이라는 말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자연히 목장 참석할 마음도 없었다. 기대했던 둘째아들이 실망시키니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그래도 저를 불쌍히 여기신 하나님이 결국 저를 목장도 참석하고 수예도 가게 되었다. 어느날은 한숨쉬면서 휘문에 가는데 아들이 속썩이지 않았다면 절대로 제가 교회를 다니지 않았을 저를 하나님이 강제로 견인하셨음이 느껴졌다. 저는 열심히 하면 성공한다고 믿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열심히 산 사람은 당연히 성공시켜주신다고 생각했다. 열심히 살았는데도 아들이 저렇게 되니 세상이치에 맞지 않아 답답하기만 했던것이 심각한 제 문제였음을 알았다.
심판같은 사건인것 같고 있어선 안될 사건같지만 하나님이 부르신 사랑이라고 고백하시는 것이다. 항상 있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적용
힘든 사건과 상황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이 항상 있다는 것이 믿어지십니까?
걱정하는 것처럼 말하면서 다른 사람의 수치와 죄를 드러내어 해롭게 한 적이 있습니까?
이런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심판의 사건을 허락하신 것은 무엇입니까?
2. 의인은 심판 앞에서 하나님을 두려워합니다.
6절
의인의 특징은 악인의 심판을 보고 비웃기도 하지만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한다고 한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고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것이 의인인줄 믿는다.
도엑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다. 사울이 아히멜렉 가문을 다 죽이라고 했을때 사울의 군사들은 아무도 못했는데 도엑이 제사장 죽이는 일을 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용기가 아니라 심판받을 죄악이다. 내힘으로 산다고 하는데 잘되는건 축복이 아니다.
심판의 때는 역전이 된다.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심판이고 믿는 우리에게는 구원이다. 그러므로 붙회떨감은 이상한게 아니다. 붙어서 감사하는건 세상도 할수있다. 떨어져서 자책하는 것은 세상사람들이 하는 일이다. 그런데 우리는 붙어서 오히려 내 죄를 보며 회개하고 떨어지는 사건에 감사할수 있는 것이다. 왜이렇게 저에게 떨어지는 아이들만 연락하는지. 그런데 이렇게 떨어진 아이들이 큐티를 더 잘한다.
그렇다면 의인들이 뭐라고 하며 박수칠까?
7절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하나님 대신 모든 재물이 풍부하고 내 의를 쌓아 내 곳간에 의가 가득 찼으니 나는 옳고 당신은 그르다라고 생각하는것이 악인의 특징이다. 하나님보다 더 의지해서 골드를 쌓아야한다고 하고, 그게 있으면 자존감이 올라가는 것이 악인이다. 이런 자들이 하나님의 영원한 심판을 피할수 없다고 한다. 하나님 만난 자존감,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항상 있도다의 자존감으로 나아가야할줄 믿는다.
이당시 다윗은 어떤 상황이었나요? 사울에게 피하느라 있으면 먹고 없으면 금식하고 있었다. 아히멜렉 제사장에게 떡좀 달라고 구걸했던 사람이 다윗이었다. 그러나 굴속에서도 자기의 힘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경험했으니 나의 풍부함, 든든함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항상 있도다를 경험한 다윗이 이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내가 의지할게 딱 생기면 바로 요동치고 흔들린다. 다윗이 편해지니까 밧세바를 범하지 않는가. 겸손한 환경이 없으면 우리는 의인일 수가 없다. 그러니까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을 보며 어쩜 저럴수있어? 할게 아니라 나도 두려워. 주님 붙드는 인생 살아야겠다 하는 것이 의인이 할수있는 고백을 해야한다.
청년부 자매의 나눔이다. 모태신앙으로 태어났지만 아버지를 화장하는 시간 내내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진심으로 만나고 천국가서 아빠를 만날수있는지 물어봤다. 목사님은 큐티를 대답하셨다. 결국 목사님들 처방은 늘 큐티구나 하고 막연한 느낌을 받았따. 자기 연민에 빠져 며칠간 무기력하게 쳐져있었다. 하지만 아빠 소천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하나님 대신 의지하고있었던 남자친구와 이별을 겪고 큐티하라는 말씀이 생각났다. 지금 상황이 너무 힘들어서 인정하기 싫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온전히 하나님께만 의지할수있는 최적의 환경이라고 생각하고 큐티를 매일 했다. 제가 가진 불신과 의문점들을 큐티하며 당사자인 하나님께 직접 물으니 그동안 수많은 궁금증에 대해 하나하나 답변해주셨다. 심지어 인지하지 못했던 부분까지 다 짚어주셨다. 두려움의 연속이었고 저를 많이 사랑하심을 느끼며 얼마나 하나님을 오해하고 있었는지 느꼈다. 그래서 전에는 이해되지 않았지만 지금은 목사님들이 왜 결론으로 늘 큐티를 말씀하시는지 이해가된다. 공동체와 말씀이 있어 다시 살아날수 있었다. 물론 아무리 하나님을 붙들고가도 아빠의 빈자리에 눈물나지만 조금씩 주님께 나아가는 중이다. 점차 회복해가는 날 보며 아버지가 마지막까지 절 위해 수고해주셨음을 느꼈다.
적용
다른 사람의 고난과 심판의 사건을 들을 때, 내 죄가 보여 두려워한 적이 있습니까?
내가 의지하는 것은 GOD입니까, GOLD입니까?
하나님 외에 언제든지 의지할수 있을 것 같은 것은 무엇입니까?
3. 어디서든지 천국을 누리게 하십니다.
다윗은 그러나 의 신앙을 보인다. 이땅에서 포악을 보이며 다른사람을 해치고 고발하는 도엑과 사울이 여전히 있지만. 하나님의 집에 있는 다윗의 이 고백은 어디서 했을까? 사무엘상 21. 22장의 동선을 보면 다윗은 아둘람 굴에 있었을 것이다. 어디에도 안전한 곳이 없어 굴에있는 다윗은 내가 하나님의 집에 있다고 느끼며 자신이 푸른 감람나무 같다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원한 인자하심을 느끼기 때문이다. 메마른 광야, 캄캄한 아둘람 굴에 있어도 자신이 푸른 감람나무 같다고 하는 것이다.
저는 로즈마리를 키우려고 여러개 갖다놔봤지만 다 죽었다. 감람나무는 더 예민하다. 그런데 햇빛도 들지 않는 아둘람 굴속에서 다윗이 푸른 감람나무 같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계시록에 보면 하나님이 태양이 되시기 때문에 천국은 태양이 필요없다고 한다. 다윗이 이 고백을 하는 것이다. 빛도 들지 않는 아둘람 굴속에서 하나님이 친히 태양이 되어주시니 나는 푸른 감람나무 같다고 말이다.
제가 우리들교회 처음 왔을때 2005년식 그랜드 카니발을 끌고 다녔다. 20년 가까이된 차에서 녹물이 흘러내렸다. 어쩜 그렇게 판교 채플에 독일차 일본차..주눅이 들었다. 집도 없었으니 나보다 넓고 좋은집 사는 사람들 보면 주눅들었다. 저는 저보다 한살 어린 아파트에 산다. 그런데 그곳에서 열명이 둘러앉아 목장을 할수 있으니 저희 집은 하나님의 집이 맞고 감람나무가 맞다. 그게 우리의 자존감이고 이 고백이다.
제가 비정상적인 가정에서 자랐다. 형은 아버지가 다르고. 정서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부족했다. 부모님이 다 있는 아이를 보며 저 스스로를 계속 갉아내고. 주님이 저를 만나주셨기에 이렇게 아둘람 공동체에 왔고 아무것도 없는 인생이 여호와의 집의 푸른 감람나무 같다고 고백할수 있게 되었다. 제가 해줄말이 있는 인생이 되었다. 이것이 저와 여러분의 자존감이 되어 사명 감당할수 있길 소망한다. 내가 아파봤기때문에 우리는 푸른 감람나무가 되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살리게된줄 모른다. 어떤 상황에서도 천국을 누리는 것은 하나님이 내 멱살을 잡아 견인하신 것이다.
9절
내가 천국을 누리는 이유는 놀라운 일을 다 행해주셨기 때문이다. 어떤 환경에서도 나를 푸른 감람나무로 쓰시기 때문에 영원히 감사하리이다. 다윗은 또 성도 앞에서 주의 이름을 사모한다고 말한다. 아둘람 공동체, 빚지고 환란당하고 원통한 400명의 사람들 아니겠는가? 공동체가 있어야 한다. 하늘 위로로 사는 사람들, 이것이 우리가 함께 찬양하며 노래불러야할 공동체인줄 믿는다. 오직 주님때문에 기뻐하게된 공동체가 천국의 맛보기인줄 믿는다.
하나님의 사랑이 비합리적이다. 원수를 위해 자기 외아들을 주셨는데 이게 어떻게 합리적인가. 인간의 수준으로는 이해할수없다. 그러나 그 사랑을 받은 공동체가 있기에 우리도 비합리적인 사랑의 수고를 할수있는줄 믿는다.
적용
나는 ‘그러나’의 인생을 살고 있습니까, ‘그것 때문에’의 인생을 살고 있습니까?
내가 천국을 누리게 해준 최고의 환경은 무엇입니까?
나에게 있는 환난당하고 빚지고 원통한 ‘예배 공동체’는 누구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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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제목
A
- 공부하기전에 항상 큐티 먼저 할 수 있도록
- 가정예배를 진심으로 사모하며 드릴 수 있도록
- 사람들을 정죄하지않고 잘 묵상할 수 있도록
- 신교제,신결혼을 위해 기도할 수 있도록
B
- 간사한 혓바닥을 눌러주시고
남을 험담하는게 아니라 내 죄를 제대로 보고 갈 수 있도록
- 수련회 스텝 모임에서 내 수치를 잘 나누고 갈 수 있도록
- 일하기전에 매일 큐티할 수 있도록
- 신교제,신결혼을 위해 기도할 수 있도록
C
- 회사에서 세상 가치관을 잘 분별할 수 있도록
- 언니네 가정의 영적후사 생길 수 있도록
- 말씀을 사모할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