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2일 주일설교
첫째 여러 날을 기다려주며 함께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15절)
이 여러 날 후에라고 합니다. 왜 바울은 당장 예루살렘으로 출발하지 않고 여러 날 후에 출발할까요?
바울이 유두고가 떨어질 때까지 설교를 한 이유가 급해서 그렇게 늦게까지 설교를 했는데 유두고가 3층에서 떨어질 정도로 바울은 밤새 설교를 함.
그 정도로 급하게 예루살렘으로 갔는데 예루살렘 앞에서는 여러 날을 보냈음. 앞서 선지자 아가보가 예루살렘에 가면 결박을 당할 것이라고 예언을 하니까 함께하는 동료들이 울면서 바울을 막으려고 했음.
어제 본 말씀 > 여기서 바울은 우리 인생의 사명 따라왔다가 뭘 따라 가요? 사명 따라 간다고 울지 말라고 합니다. 이렇게 양육을 합니다. 이렇게 양육의 시간이 지난 이 여러 날 후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것 입니다. 여기서 원어로 보니까여장을 꾸러 올라갔다라는 문장에 이게 숨어 있는 주어 우리 한글 성경에 나오지 않지만 주어가 있는데 “우리가” 입니다. 그럼 우리가 넣어서 읽어볼게요.
이 여러 날 후에 우리가 여장을 꾸려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어요. 그러니까 바울이 올라갔다가 아니라 우리가 올라갔음 . 마찬가지로 우리 각 사람도 사명의 길을 혼자 갈 수가 없습니다. 함께하는 “우리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영적 진실성의 결론인 인내로 우리가 되기까지 여러 날을 인내하며 기다려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목장 식구들을 기다려야 해요. 그리고 자녀들을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가 함께 가야 하기에 구원에까지 구원의 때까지 기다려야 할 줄로 믿습니다.
이렇게 인내로 기다리며 여행짐을 싼 바울의 일행과 함께하는 사람들이 또 있는데 (16절) 사실 바울은 초대교회 일곱 집사 중에 한 분인 빌립 집사님하고 함께하길 원했을 것 입니다. 그런데 빌립은 동행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름도 등장하지 않은 가이사랴의 몇 제자만 함께 간다고 합니다. 가이사랴는 베드로가 이방인 고넬료를 전도했던 지역이고, 그냥 말씀만 전했는데 성령이 임한 지역이기 때문에 거기서 온 몇 제자는 이방인일 것으로 추정이 됩니다.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동행하는 우리예요. 그리고 오랜 제자라고 소개하는 구보로 사람 나손이 등장하는데요. 오랜이라는 단어를 원어로 보면 초창기라고 읽을 수가 있음. 태초에라고 하는 그런 단어가 오랜 사용이 됐거든요.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성령 받는 것부터 함께한 초창기 멤버 우리 식으로 하면 개척 멤버가 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핍박과 결박이 분명한 상황에서 어떻게 이 초창기 멤버 나서는 바울과 동행하고 심지어 그의 집을 이방인들이 가득한 바울 일행의 숙소로 내주기까지 할까요?
앞서 집을 내준 사람들은 바울에게 집을 내준 사람들은 분노가 난 유대인들에게 곤욕을 많이 겪었습니다.
잡혀가기도 하고 보석금을 내기도 하고 근데 어떻게 나손은 이렇게 자기 집을 내주고 같이 동행을 했을까 생각을 해봤습니다. 우리는 나손이 정통 유대인이 아니라 구보로 사람이라는 것에서 힌트를 얻을 수가 있습니다.
그가 구보로에서 태어나 이 선민 의식이 심한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겸손한 환경 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편견 없이 바울을 마주할 수 있었던 거죠. 받아들일 수 있었던 거죠. 우리 교회는 환난 당하고 빚지고 원통한 겸손한 환경에 있는 분들이 모여서 함께하는 공동체입니다.
가이사랴의 몇 제자, 그리고 구부로 사람 같은 겸손한 환경에 있는 성도님들이 모였기 때문에 장차 올 환난의 복음을 듣고도 함께하는 우리들이 되는 것 같아요.
잘 나갈 때는 좀 잊어버려도 죄송하지만 잘 나갈 때는 기억이 잘 안 나도 힘들 때는 반드시 생각나는 우리 공동체와 우리 목사님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영혼 구원을 위한 사명의 길을 향해 여러 날을 기다리며 함께 나아갈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이렇게 사명을 향해 함께하는 우리를 예루살렘에서 영접하는 형제들도 등장하네요.
17절 같이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예루살렘에 이르니 형제들이 우리를 기꺼이 영접하거늘 그냥 영접하는 게 아니에요.
기꺼이 영접합니다. 아주 기쁘게 자발적으로 자발적으로 적극적으로 영접한 거죠.
어떻게 예루살렘에 있는 이 형제들은 바울을 기꺼이 영접할 수 있었을까요?
자격 없는 나를 기꺼이 영접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알기 때문에 고난을 향해서 오는 바울을 기꺼이 영접할 수 있었다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기꺼이 영접하셨기 때문에 나도 기꺼이 힘든 지체를 영접할 수 있는 거예요.
생각해 보세요. 앞서 사도 바울과 동행한 사람들을 16절에서는 제자들이라고 했어요.
가이사랴의 몇 제자. 그런데 17절에서 바울을 영접한 사람들을 제자들이 아니라 형제들이라고 부르네요.
제자와 형제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사실 둘 다 같은 말이죠.
예 형제는 제자고 제자는 또 형제인데요. 누가가 16절과 17절에서 의도를 가지고 나눠놓은 것 같아요.
예루살렘을 향해서 고난을 감수하고 함께 가는 동료로서는 제자인 거고요.
사명의 자리인 예루살렘에서 있는 지체를 받아주는 역할로서는 형제라고 부른 것 같아요.
우리는 고난이 예정돼 있는 예루살렘으로 함께 가는 제자들이 되길 원합니다.
동시에 우리는 고난 가운데 있는 자들을 기꺼이 영접할 수 있는 형제들이 되기를 소망해요.
다른 사람이 나눔에 있는 그대로 저 사람 왜 저래 저것도 고난이야가 아니라 나도 그랬다 하며 기꺼이 영접할 수 있기를 그런 목장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목장에 오는 어떤 분이라도 기꺼이 영접하면서 그 영혼을 있는 그대로 어떤 중독이 있든지 간에 어떤 저가 있든지 간에 안아줄 수 있기를 소망해요.
하나님이 나 같은 사람도 저도 혼외자인데 혼외자도 영접해 주셨는데 영접하지 못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것이 우리가 제자이기 때문에 또한 형제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적용이라고 생각합니다.
연말인데 서로 이렇게 인사해 볼 수 있으면 좋겠어요.
목장에 끝까지 붙어 갑시다.
이렇게 함께하는 우리가 된 바울의 일행은 다음 날 야고보에게로 들어가는데
(18절)가이사리아에서 예루살렘까지는 약 100km정도 된다고 해요. 차가 있어도 쉽지 않은 거리인데 정말 이 먼 길을 여행한 바울은 쉬지 않고 그 이튿날 다음 날 바로 선교 보고를 하기 위해서 들어갑니다.
함께하는 우리가 되기 위해서는 여러 날을 기다렸지만 이미 도착한 사명의 예루살렘에서는 지체하지를 전혀 않는 거예요.
바로 들어가는 거예요. 우리도 구원을 위해서는 여러 날을 기다려야 될 때가 있어요. 하지만 마찬가지로 구원을 위해서 적용하기를 지체하지 않아야 할 때도 있습니다.
인내는 해야 되지만 차차 마귀는 쫓아내야 되는 거예요. 나중에 차차 언젠가 이런 게 아니라 정말 구원을 위해서 교회 가자 예수 믿어야 된다는 한마디를 하기 위해서 여러날을 참아야 될 때도 있어요.
그런데 구원을 위해서 말해야 할 때는 일시적인 평화가 깨지더라도 지체 없이 말해야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구원을 위해 칼날 위에 물방울이 돼야 돼요. 이렇게 깨어 있어야 십자가의 타이밍을 알 수가 있습니다. 지체하지 말고 야고보에게로 들어가야 할 때는 들어가는 그런 십자가의 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여기서 야고보가 누구예요? 바로 예수님의 형제이자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입니다. 그리고 모든 장로님들도 다 있었다니까 예루살렘 교회 당회가 다 모인 거예요.
그리고 누가는 바로 이 자리에 바울 혼자가 아니라 우리가 함께 들어갔다. 우리가 함께 들어갔다 이렇게 기록을 합니다.왜냐하면 정말 이 구속사가 강에서 바다로 흘러가야 되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살았기 때문에 더욱더 함께 가는 마음으로 기도해 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장차 올 복음을 듣고 그리고 온 공동체가 함께하기 때문에 담대하게 적용할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적용) 적용 질문드릴게요. 구원을 위해 여러 날을 기다려야 하는 VIP는 누구입니까?
내가 편견 없이 예수님을 영접하게 한 겸손한 환경은 무엇인가요?
고난 가운데 있는 형제들을 기꺼이 영접하고 계십니까?
지체하지 않고 들어가는 적용을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두번째)
말만이 아니라 손과 발이 가며 손해 보는 적용을 해야 합니다.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는 얘기도 있지만, 우리는 기본적으로 손과 발이 가는 손해 보호 적용해야 됩니다. (19절)예루살렘 당회에 들어간 바울은 하나님이 자기의 사역을 통해서 이방 가운데서 하신 일을 하나하나 낱낱이 말합니다. 생각해 보면 바울이 얼마나 할 말이 많았겠어요? 우리가 2박 3일 국내 선교만 다녀와도 할 말이 많잖아요. 간증할 거리가 많이 있잖아요. 근데 바울은 몇 년 동안을 그렇게 돌았으니 낱낱이 말하려면 하루가 다 모자랐을 거예요.
그런데 바울의 선교 보고를 들은 누가는 바울의 보고를 듣고 딱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 성령 행전이에요 오순절에 성령이 임해서 초대교회가 방언으로 말할 때도 이렇게 요약을 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에 성령 받은 사람이 120명이었어요. 120명이 각자가 막 말을 했습니다. 얼마나 많은 방언을 하고 많은 이야기를 했겠습니까? 근데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그 수많은 사람들의 많은 말을 한마디로 요약했어요. 하나님의 큰 일 이렇게 바울도 낱낱이 보고하지만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는 분명한 포인트로 전하는 거예요.
가족과 대화하는 우리의 언어가 이렇게 한 문장으로 정리될 수 있으면 좋겠어요.
하나님이 하신 일, 딸과 대화해도 하나님이 하신 일, 남편과 대화해도 하나님의 큰 일 이렇게 요약을 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우리는 어떤 말을 해도 은근히 내가 했다.
생색 낼 때가 많이 있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하지만 결국에는 하나님이 하신 구속사가 아니라 내가 했다는 세속사가 섞여 있을 때가 많아요. 저도 생색이 올라 올 때가 왜 없겠습니까? 주차 봉사를 끝내고 판교 로비 화장실을 들어가면 회기를 합니다. 그런데 화장실에 이렇게 써 있거든요. ‘은혜를 아는 만큼 생색이 없어집니다.’
바울은 험난한 산지 그리고 파도가 일렁이는 바다 유대인들에게 핍박을 받았어요.
하지만 자신이 섬긴 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하셨다라는 일관된 내용으로 보고를 하고 있는 거죠. 우리의 언어가 이렇게 구속사의 한마디로 정리될 때 우리의 배우자 자녀, 부모님들 그리고 우리 주변 사람들이 주님께로 돌아오는 구원의 역사가 있을 줄로 믿습니다. 이렇게 은혜로운 선교 보고를 받은 예루살렘 당회는 또 이렇게 반응을 해요.
(20절) 바울의 사역이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는 것을 인정하니까 영광을 돌렸겠죠.
하지만 예루살렘 당회는 예루살렘의 현실을 알려줘요. 실정을 알려줍니다. 유대인 중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라 수만 명이 있지만 율법의 열성이 있다.
율법의 열성이 있는 게 잘못된 건 아니죠.
그런데 율법에 너무나 열심히 있어서 예수를 믿지만 옳고 그름으로만 보는 연약함이 있어서 바울을 오해하고 있다는 거예요.
(21절)바울이 가는 곳마다 유대인이 회당에 갔습니다. 그리고 가는 곳마다 유대인들은 바울을 핍박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 가는 그 명절을 철저하게 지킨 사람들이에요. 그들이 예루살렘에 명절 때마다 올 때마다 뭐 했겠습니까? 바울 욕을 했겠죠 바울 욕을 했을 거예요. 비방을 했을 거고, 또 정말 바울에 대해서 얘기하느라 바빴을 겁니다. 이게 한 해 두 해 반복될 뿐만 아니라 한 지역에서 온 사람들만 그렇게 이야기하면 모르겠는데 여러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 똑같이 얘기하는 거예요.
바울에 대한 비방을 그러니까 옳고 그름으로 예수 믿으니 이게 오해로 쌓이고 편견으로 굳어질 수밖에 없는 거죠. 예루살렘 당회는 그래서 바울에게 이렇게 긴 처방을 하는데 같이 한번 읽어봅니다.
(2절- 4절) 예루살렘 장로님들은요. 말이 아니라 손이 가고 발이 가고 손해 보는 적용만이 이 오해를 풀 수 있다고 생각한 거예요. 정말 그렇죠 세상에서도 그렇잖아요. 오랜 시간에 걸쳐 쌓여온 오해를 짧은 시간에 그것도 적은 말로 푸는 방법은 없는 것 같아요. 불가능한 것 같아요. 그래서 바울에게 나시린 서약을 한 4명을 데리고 직접 가서 그런 수고를 해서 손과 발이 가는 수급뿐만 아니라 비용까지 내라고 하는 거예요. 손해 보는 적용을 하는 한 사람이 있어야 서로를 영접할 수 있다.
서로를 기꺼이 영접하는 방법은 손해 보는 것이다라고 가르쳐주는 거예요. 제가 이렇게 믿는 유대인들을 묵상할 때 우리나라가 참 정말 생각이 나더라고요.
참 우리나라에 켜켜이 쌓여 있는 그 지역 감정과 진영 논리가 있잖아요. 어떤 말을 해도 풀리지가 않습니다. 전국의 교회가 있어요. 경상도에도 교회가 있고 전라도에도 교회가 있어요. 그렇지만 지역 감정과 진영 논리를 풀어낼 수가 없더라고요.그래서 우리 교회가 성전에 같이 들어가고 비용을 내는 적용으로 대구와 광주, 광주와 대구 제프를 열었어요. 예루살렘 교회도 바울에 대한 오해를 풀기가 대단히 힘들었는데 우리나라에도 지역 감정은 풀기 어려운 숙제 같아요. 그래서 우리가 대구 광주 채플을 위해서 그 지역을 위해서 기도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그런 정말 율법의 열심이고 예수를 믿는 그런 분들을 위해서 우리가 기도해야 될 줄로 믿어요. 말만으로는 오해를 풀 수가 없습니다. 손이 가고 발이 가는 적용 손해 보는 적용으로 나아가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럴 때 이쪽이 옳고 저쪽이 틀리고가 아니라 구원을 위해서 함께 한목소리로 나아가는 한국 교회가 될 줄로 믿어요.
우리가 전도하려는 사람들에게도 우리가 오랜 시간 동안 존재적인 가해자가 되어서 상처를 주었을 것 같아요.
상처를 주었어요. 사실은 그러니 오래 기다리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손수건 앞치마 두르고 손이 가는 수고를 하고 손해 보는 적용을 해야 되는 줄로 믿습니다.
돈으로 하는 적용이 가장 쉬운데요. 하나님이 구원을 선물로 주시기 위해서 정말 우리가 손해 보는 적용할 수 있기를 바래요.
왜냐하면 구원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흩어지면 전도하고 남아 있으면 울면서 회개하고 기도하더라고요. 각자의 역할이 다릅니다. 설교를 하고 그러면서도 핍박하는 사울도 하나님이 쓰신 도구라고 선포를 했어요.
그러면서 어머니가 사울이라고 생각했던 제 간증을 했습니다. 영어로 약간 좀 틀렸어요. 제가 근데 마이 마더 리즈 위더 마이 파더 시티 헐 이렇게 했어요. 우리 엄마는 과부고 우리 아빠는 바람 피웠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 아들입니다. 이러면서 막 간증을 하고 나서 제가 어머니를 얼마나 핍박하고 어머니에게 원망을 했는지 그거를 나누고 나서 근데 내가 예수 믿어서 우리들 교에서 구속사 해석돼서 땡큐 땡큐 맘 알러뷰 맘 했다고 했더니 다 박수를 치더라고요. 그리고 저희 선교팀에게 파푸아 뉴기니 어로 된 모국어로 된 축복 흥을 불러주셨습니다. 구원받은 것이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는 것이 믿어지십니까? 구원을 위한 한마디를 하기 위해서 손과 발이 가는 적용으로 섬길 수 있는 일주일이 되길 원합니다.
그 은혜가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있기를 소망해요.
적용)
내가 하는 말을 요약하면 하나님이 하신 일이 됩니까?
아니면 은근한 내 자랑과 생색입니까? 말로 회복할 수 없는 관계에 있는 사람의 구원을 위해서 손과 발이 가는 적용 손해 보는 적용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세 번째)나의 죄를 항상 보아야 합니다.
어제 봤고 오늘 봤고 ㅣ이게 아니라 항상 봐야 돼요. 시도 때도 없이 25절 같이 말씀 보겠습니다. 주를 믿는 이방인에게는 우리가 우상의 재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피할 것을 결의하고 편지하였느니라 하니 바울이 하나님이 하신 일들 제가 이거 잠깐 보여드렸는데 놀랍잖아요.
그런데 이것보다 더 놀라운 우리가 사도행전에서 봤던 놀라운 일들을 다 얘기했어요.
근데 예루살렘 당회는 변한 게 없어요. 이방인들과 형제가 되지 못합니다.
바울한테는 이렇게 말했거든요. 형제요. 근데 이방인들한테는 그 이야기를 바울을 통해서 세워진 이방인들한테는 이렇게 얘기하는 거예요.
주를 믿는 이방인들 오피셜하게만 다가가는 거예요. 이렇게나 우리가 예수를 믿어도 우리의 편견과 가치관을 꺾기가 너무나 힘듭니다. 그러니 자기 죄를 보는 것은 죽은 사람을 살리는 것보다 더 큰 이 표적이 맞죠 엊그제가 종교 개혁 기념일이었어요.
10월 31일 우리는 매일매일 나를 말씀으로 개혁하고 회개하지 않으면 다시 돌아가게 돼 있어요. 매일매일 큐티하며 내주에 볼 수 있는 그 은혜가 우리에게 있길 소망합니다. 이렇게 예루살렘 장로님들도 바뀌지 않는데 나와 우리 목장 식구들이 오랜 시간 10년 20년 지나도 변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한 거죠. 그래도 혹시나 올해 말씀이 들려서 정말 적용한 일이 있다면 이제 올해 끝날 때쯤에 연말에는 파티를 해보시면 좋지 않을까 생각을 합니다. 제가 신임 목자로 저희 목장을 이렇게 인도를 하는데 연말에 진짜 파티 한번 해야 될 것 같아요.
하나님이 하신 기적이에요. 기적이에요. 당연한 게 아니고요. 기적이에요.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공예를 참석하고 나서 예루살렘 이 공예에 이제 믿는 성도들의 연약함을 체감했을 것 같아요. 인간적으로 보면 얼마나 답답합니까? 선교 보고를 이렇게나 했는데 믿는 유대인, 믿는 유대인, 믿는 이방인 이렇게 나눠놓는 거예요. 답답했을 것 같아요. 하지만 바울은 한마디도 토를 달거나 반박하지 않고 곧바로 질서에 순종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26절 ) 여기서 주어를 잘 보세요. 주어 우리가 여장을 꾸려서 왔는데 바울의 적용을 보세요. 바울이 한 거예요. 바울이 주요 가서 바울이에요. 한 사람이에요. 이방인들 성도들을 데리고서는 성전에 들어갈 수 없으니까 혼자 하는 거예요. 장막을 만들며 자비양 선고를 해온 바울인데요. 손수건과 앞치마까지도 쓰임 받은 그 바울이 이제는 네 사람의 결례를 위한 비용을 혼자 대고 그들과 함께 성전에 들어가는 겁니다.
이 예루살렘 당회의 처방을 따르는 거예요. 십자가를 홀로 지신 예수님처럼 우리는 십자가를 질 때는 내가 온전히 혼자 내 십자가를 지고 가야 된다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는 거죠. 그렇다면 바울은 어떻게 자기가 비용까지 대가며 예루살렘 교회의 질서에 한마디 대꾸 없이 순종할 수 있었을까요?
예루살렘이 바울에게 어떤 곳입니까? 스데반 집사님이 천국 천사의 얼굴을 하고 있을 때 무서운 얼굴로 무서운 열심으로 돌로 쳐서 죽이라고 증인 섰던 도시였습니다.
이렇게 내 죄가 너무나 선명하게 보일 수밖에 없는 예루살렘에서 바울은 구원을 위한 적용과 순종을 아무 군말 없이 곧바로 적용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죄패가 확실한 사람이 많은 사람 살리고 가는 거잖아요. 내 죄가 확실하게 보이는 사람이 생색 없이 섬기고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적용)
예수님을 믿고 공동체 안에 오래 있었어도 여전히 꺾이지 않는 나의 세상 가치관은 무엇입니까?
내 죄를 기억하게 하는 예루살렘은 무엇입니까? 내 죄가 보이기 때문에 이번 주에 곧바로 적용해야 될 것은 뭔가요?
목자1 부목자2 목원1 4명이 목장모임을했습니다. 각자 회피하고싶은것들에 대해 나눴고 두려워하지말고 직면하기 적용을 하기로했습니다. 목원7명이 모두 올해안에 다시 다같이 나오기를 기도부탁드립니다
기도제목
A
1. 가족구원, 신교제, 신결혼
2. 교육청 발표(11/18)에 내 영광 드러내고 싶어서 분주했는데, 돌이켜 회개하여 잠잠히 일상의 업무부터 밀리지 않고 할 수 있도록
3. 함께하는 ‘우리’를 위해 기도하는 시간 빼먹지 않기
B
1. 소화 잘될수 있도록
2. 업무 익숙해지도록
3. 건강회복
D
1. 좋은 환경
2. 좋은 습관
3. 행동하기
E
1.신결혼 준비 더 구체적으로 할 수 있도록
2.체력관리
3.일 더 똑똑하고 지혜록게 할 수 있길
4.알콜중독 완전히 끊을 수 있길
5.우리목장 식구들 건강 지켜주시고, 완전체 7인 이번달안에 다같이 모일 수 있길
F
1. 회피하지말고 직면해서 회복되기를
2. 동생 16일예배 목장 함께하기를
3 제주도 안전히 잘 다녀오길
4. 신교제 신결혼
5. 엄마 동생 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