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문
2025.09.21.(주일) 사도행전 8:1b-8 「그 날에」 김성우목사님
1b. ...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2.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
3.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4.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5.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6.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한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을 따르더라
7.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못 걷는 사람이 나으니
8.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
** 말씀
하나님 아버지, 오늘 우리가 사도행전 8장 말씀 앞에 섰습니다. 주님, 이 시간 말씀하여 주시옵소서. 감사하며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오늘 사도행전 8장 1절 우리가 읽었던 성경 구절은 그 날에 이렇게 시작되죠. 그날이 어떤 날입니까? 그날에 우리가 쭉 큐티해 봐서 알겠지만 이제 스데반이 순교한 날입니다. 죽음의 날이며 슬픔의 날이며 비통의 날이죠. 그런데 성경은 스데반의 순교를 어떻게 기록하고 있는지 우리 어제 큐티 본문 마지막 절 사도행전 7장 60절에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뭐라고 기록돼 있죠?) 자니라 죽었더라, 돌아갔더라, 순교했더라가 아니라 자니라 잔다고 표현합니다. 여기 잔다는 표현은 좀 독특한 표현이죠. 이 말뜻은 말 그대로 이 원어의 뜻은 깊은 수면에 빠지다, 잠들다라는 뜻이에요. 말 그대로. 헬라어에는 죽음이라는 단어가 두 개 이상 있습니다. 성경 곳곳에 이제 죽음이라는 그 단어가 쓰이는데 왜 스데반에게만큼은 자니라라고 표현했을까요? 왜 스데반의 죽음은 잔다라고 표현했을까요? 창세기 47장 30절에 야곱의 죽음을 동일하게 누워 잔다, 잠들다라고 표현합니다. 신명기 31장 16절에 모세의 죽음도 잠들다라고 표현하죠. 신약에서는 누가복음 8장 52절에 회당장 야이로의 딸 기억나시죠? 회당장 야이로가 딸을 위해 막 이렇게 예수님 부르는데 예수님이 혈루병 여인을 고치고 늦게 오시잖아요. 그때 예수님이 오셔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잔다. 이 아이가 잔다.라고 하세요. 요한복음 11장에 나사로 너무 유명한 본문이죠. 나사로에게도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다. 이렇게 표현합니다. 성경 곳곳에서 성도의 죽음을, 사도행전 13장에서도 다윗의 죽음을 잠들었다라고 표현하는데 곳곳에서 이제 성도의 죽음을 자니라, 잠들었다라고 표현합니다. 이렇게 기록하죠. 왜 그렇습니까? 왜 잔다라고 기록했을까요? 자는 사람은 깨어나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죽음은 끝이 아니라 부활이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부활입니다. 잠든 사람은 일어나게 되어 있어요. 우리도 아침에 자다가 왔잖아요? 일어나~ 이렇게 하면서 아이들도 깨우고~ 남편도 깨우고~ 아이도 깨우고~ 언제 일어나나요? 누군가가 일어나라고 나를 흔들어 깨울 때, 아니면 자명종 소리에, 알람 소리에... 우리가 일어나죠. 마지막 날에도 그럴 것 같아요.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깨우실 것 같아요. 일어나 눈을 뜨며 활짝 웃으며 다시 만나는 그것이 바로 부활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도의 죽음을 잔다라고 표현합니다.
최근에 이제 목장 탐방을 다녀왔는데 그 목장에서 이제 부목자님이 나누시는데 참 힘든 일을 겪으셨더라고요. 부목자님의 이 장남 아들이 죽는 사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는 사건- 앞에서 너무 상심이 되어서 어차피 기도해봤자 하나님이 하시는 대로 할 텐데 기도를 왜 하나. 우울과 무기력의 자리에 앉아 있었다고 합니다. 너무 상심이 되었고 너무 힘든 사건인데 이렇게 이야기해 주시는데 그 아이가 마지막에 죽는 날에 이렇게 얘기했다 그래요. 엄마 아빠, 천국에서 다시 만나요! 아이가 이렇게 얘기했다고 그래요. 다시 만납니다. 성도의 죽음은 자는 거죠.
세월이 얼마나 빠릅니까? 벌써 이제 공기가 아까 1부 때는 좀 차가웠어요. 우리가 땀을 뻘뻘 흘리던 그때가 지나고 이미 또 이제 아침저녁으로 서늘한 날을 맞이하는데 참 세월이 빠른 것 같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있는 이유는 사명이 있기 때문이에요. 사명이 끝나면 우리는 보고픈 우리 만나고 싶은 그 얼굴들을 다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1절에 그날은 죽음의 날, 비통의 날, 슬픔의 날이 아니라 부활이 임하는 기쁨의 날입니다. 다시 만날 날, 그리고 생명이 임하는 날인 것이죠.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이유는 죄인 된 우리에게 믿는 자마다 생명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우리의 삶의 그날! 그날에! 우리의 삶에 이 기쁨-이 부활-이 임하려면 첫 번째로
큰 박해가 있습니다. (1b절)
우리 1b절 같이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1b. ...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사도들에게 예루살렘은 앞으로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아갈 인생 여정의 출발점일 뿐 종착역이 아니었어요. 그들에게는 가야 할 아득히 먼 길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지금 어떠합니까? 예루살렘에 지금 주저앉아 있죠. 떠날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설교 한 번만 하면 3천 명이 확 모이고~ 설교 한 번만 하면 5천 명이 모이고~ 그 자기들을 적대하던 대제사장들조차도 이 복음 앞에 굴복하니 예루살렘의 성공에 안주하고 말았습니다. 주님의 마지막 유언을 망각해 버린 것이죠. 우리가 큐티를 쭉 해와서 알지만, 주님의 마지막 유언이 뭔가요? 주님이 승천하시기 직전에 하신 말씀이 무엇인가요? (오! 너무 잘 아시네요.) 사도행전 1장 8절이죠.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예루살렘에서 멈춘 게 아니에요. 사마리아로 나아가야 합니다. 유대로 나아가야 돼요. 이것이 스데반의 순교를 기점으로 예루살렘의 박해가 시작된 이유입니다. 예루살렘을 떠날 생각일랑 하지도 않는 사도들로 하여금 이제는 예루살렘을 넘어서게 하는 하나님의 섭리였죠. 박해는 사도행전에서 처음 쓰인 단어입니다. 여기서 처음 사용되는 단어예요. 그런데 이 박해 앞에 한 단어가 같이 쓰이는데 뭐죠? 큰 여기서 이 큰 박해. 박해 앞에 크다라는 게 붙어 있어요. 큰 박해. 크다는 이 원어로 메가스인데 이 박해가 얼마나 큰지 이 메가스. 여기에서 유래된 영어 단어가 이 100만 배라는 이제 뜻이죠. (우리 많이 들어봤잖아요. 메가커피, 메가스터디 우리 어렸을 때는 메가톤 바도 있었는데 아시나요? 메기는 메가톤 이러면서 같은 세대네요?) 메가스라는 단어가 쓰이죠. 큰 박해. 옛날 성경에는 큰 핍박 박해가 아니라 핍박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감당하지 못하는 상상하기 힘든 박해. 핍박에 임한 것이죠. 그런데 이 박해가 임하니까 어떻게 됩니까? 머물러 있던 그들이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1절 제가 한번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1b. ...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움직이기 시작하는 거죠. 이 흩어지다는 다시 움직이는 거죠. 예수님의 마지막 지상 명령이 다시 머물러 있던 그들에게 살아 움직이기 시작하는 거예요. 예루살렘에만 머물렀던 그날! 부활, 그 생명이 이제는 예루살렘을 넘어서 유대와 사마리아 땅으로 흩어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흩어지다라는 이 단어는 헬라어로 [디아스페이로]인데 이 단어는 이제 어떤 뜻이냐면 농부가 씨를 이렇게 흩어 뿌리는 모습을 표현하는 단어입니다. 여기에서 이제 [디아스포라] 우리 많이 들어봤잖아요. 디아스포라가 파생됩니다. 근데 이제 농부가 이제 씨를 흩어 뿌리니까 농부 입장에서는 능동적으로 이렇게 뿌리는 거죠. 옛날 예루살렘 그 당시에서는 씨를 그냥 흩어 뿌렸다고 해요. 그래서 흩어 뿌리니까 어떤 씨는 좋은 밭에, 어떤 씨는 돌밭에, 어떤 씨는 길가에, 가시덤불에 예수님의 비유가 생각나죠.
근데 흩어 뿌리는 게 농부입장에서는 능동적인데 씨앗의 입장에서는 어떻습니까? 수동적인 거죠. 씨가 어디에 뿌려질 것인지. 씨가 아니라 농부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말입니다. 본문 1절이 ★다 흩어지고라고 번역되어 있어서 마치 예루살렘 교인들이 능동적으로 흩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헬라어 원문에는 이 단어가 수동태로 쓰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그들이 흩어졌음을 밝히는 것이죠.
큰 박해로 인해 흩어집니다. 나에게만 머물러 있던 지경이 이제는 흩어지니까 이 지경이 넓어져요. 다른 사람에게까지 나아갑니다. 내 가족, 내 인생, 그리고 내 구원, 나에게만 국한되어 있던 이 관심이 이제는 예루살렘 밖으로. 우리는 어떻습니까? 심지어 구원조차도 내 구원에만 관심 있어요. 회개도 상대가 용서하든 말든 내 회개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나만 하나님께 용서받으면 되지~ 이게 아닌 것이죠. 여기서 우리는 나아가야 됩니다. 지경이 넓어져야 돼요. 박해로 인해 다른 사람의 구원, 이 스데반의 그날에 이 부활의 기쁨이 흩어 퍼져 나가기 시작합니다. ★박해로 인해서 자신밖에 몰랐던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관심이 생기니 날마다 해 줄 말이 샘솟듯 솟아나는 것이죠. 박해로 인해서 내 자아가 무너지니 무너진 만큼 내 영을 하나님께서 세우십니다. 우리는 날 때부터 죄인이에요. 우리는 뼛속까지 죄인입니다. 많이들 이 말씀에 인정하시는데 어떤 뭔가 죄를 지어서 윤리적인 죄인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끝없는 자기중심성! 끝없이 이 나만을 생각하는 이 자기중심성이 죄성의 핵심이에요. 담임 목사님의 저서 「하나님, 속이 시원하겠습니다」를 읽어보면 자기중심성은 내가 정말 중요한 존재인가 하는 불안에서 비롯되는 병적인 자기 집착을 말한다고 합니다. 이런 사람은 늘 자기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자기가 중심인물이 되어야 하죠. 일종의 심한 자의식으로 사실 이것은 자신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더없이 소중한 존재여야 한다는 필요가 좌절된 데서 오는 절박한 반응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떠합니까? 이 자기중심성을 깨뜨리기를 원하십니다. 예루살렘을 깨뜨리십니다. 이 예루살렘만, 유대만, 우리만 복음을 받는 이것을 하나님은 큰 박해로 깨뜨리시고 깨어지면 어떻게 됩니까? 생명이 흩어지는 것이죠. 퍼져 나갑니다. ★말씀 앞에 내가 죽는 것이 부활이에요. 큰 박해로 자아가 깨뜨려져야 이제 우리는 타자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사명입니다. 그런데 깨뜨림에는 항상 아픔이 옵니다. 깨어지니까 얼마나 아파요. 그러나 새는 알을 깨고 나와야 진정한 세계를 볼 수 있습니다. 깨뜨림은 아픔이요, 슬픔입니다. 알은 곧 세계죠. 나만의 세계가 깨어져야 부활의 생명이 퍼져 나갈 수 있습니다. 알을 깨뜨리면 또 다른 세계를 맞이하듯 개인과 교회의 큰 박해 뒤에는 하나님께서 새로운 국면을 허락하십니다. 그런데 깨어지지 않기 위해서 내가 이것을 꽉 붙들고 있으면 어떻게 됩니까? 내 돈과 내 능력과 체면과 외식으로 이걸 붙들고 있으면 박해가 길어지겠죠. 이게 깨어져야 부활이 임하기 때문에. ★잘 당하고 잘 흩어지는 것이 디아스포라입니다. 우리는 일주일 동안 집에서 박해를 계속 당하면 어디로 흩어집니까? 목장으로. 박해를 많이 당하고 목장으로 흩어지는 게 디아스포라예요. 그리고 그 목장에서 부활의 기쁨이 넘쳐나는 겁니다. 그런데 당한 것이 없는 사람은 집에만 머물기를 원해요. 우리 집 꾸미고... 우리 집 요즘 그 화이트 톤으로 인테리어 하는 게 유명하던데 그래서 목장초대를 안 한 대요. 이 집이 더러워질까 봐. 가서 우리 애들이 좀 소파에서도 뛰고 이래야 되는데 이것이 깨어져야 돼요. 내 집을 오픈해야 됩니다. 이게 디아스포라예요. 당한 것이 없는 사람은 예루살렘에 머물고 싶어 하죠. 스데반의 박해로 이 사도행전 11장에 보면 이 흩어진 사람들이 어디로 흩어졌는지 나오는데 이 사람들이 아프리카도 흩어지고, 아시아로도 흩어지고 하는데 거기에 안디옥이라는 지명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안디옥이 어떤 곳이냐 하면은 예루살렘과 더불어 사도행전에 사도 바울의 선교의 전략적 중심지였습니다. 이 안디옥 교회가. 이 교회가 어떻게 세워졌느냐? 바로 이 박해로 인해 흩어진 사람으로 인해서 안디옥 교회가 세워진 것이죠. 내가 받는 박해로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세우십니다. 흩어진 나로 인해서 하나님의 교회가 세워집니다.
이 서론에 말씀드렸던 이 집사님은 이 감당할 수 없는 큰 박해-큰 핍박-이었죠. 자신의 아들이 하나님께 부름을 받는 이것. 근데 이 일을 통해서 사명이 생긴 거죠. 어떤 사명입니까? 자녀가 먼저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집에 찾아가 할 말이 생긴 겁니다. 내 아들도 그랬다. 내 아들도, 내 장남도 하나님이 먼저 부르셨다. 이 한마디만 하면 어떻습니까? 복음이 흘러가는 거죠. 사명이 생긴 거예요.
저 역시 마찬가지예요. 제가 이제 고등부를 담당하고 또 이렇게 많은 성도님들을 만나 봤을 때 알코올 중독 아버지의 폭력과 폭언을 행하는 그런 아버지를 둔 사람만 만나면 마음이 그냥 이렇게 가난해집니다. 그 사람이 아무 말을 하지 않아도 마음이 가요. 그리고 어머니가 집을 나간... 어젯밤에 고등부 친구가 저한테 전화 와 가지고 엄마가 집 나갔어요. 이러는 거예요. 그런 말만 들어도 마음에 깊은 슬픔, 그리고 아픔이 이렇게 올라옵니다. 나도 그랬다. 나도 그랬다.
예수의 복음이 내 속에서 예수의 생명이 내 안에서 알을 깨고 너에게로 전달되어져야 합니다. 이것이 흩어지다입니다. 마지막 그날에 우리 예수님께서 우리의 눈물을 닦아주실 것이에요. 우리는 이 사명을 가지고 흩어져야 합니다. 박해가 축복입니다. 고난이 축복입니다.
적용 질문드립니다.
Q. 내가 당한 큰 박해는 무엇입니까?
Q. 큰 박해로 흩어져서 내 지경이 넓어졌나요? 큰 박해로 그저 예루살렘에 숨어 지내고 있지는 않나요?
Q. 깨어져야 할 자기중심성-자기 신화-는 무엇입니까?
두 번째로 그날-스데반에게 임했던 그날- 이 부활의 그날이 임하려면
큰 울음이 있습니다. (2-3절)
2절입니다. 우리 2절 다 같이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2.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
그날에-죽음이 아닌 부활의 그날, 생명이 임한 그날에- 큰 울음이 있다고 합니다. 큰 박해 뒤에 큰 울음이 따르는 것이죠. 동일하게 크게로 번역된 헬라어는 본문 1절에 사용된 [메가스]입니다. 그리고 우리 말의 울다로 번역된 헬라어는 [코페토스]라는 단어인데 이게 뭐냐 하면 그냥 눈물을 흘린 것이 아니라 소리 내어서 통곡하면서 가슴을 치고 울었다라는 뜻입니다. 근데 이때 당시에 스데반의 죽음을 보고 울면 안 됐어요. 산헤드린 공회에서 판결을 한 죄인을 향해서는 울면 안 됐습니다. 왜냐하면 로마법이 아니라 산헤드린 공회의 유대법에 의해서 사형을 당한 사람은 하나님께 저주받은, 하나님께 버림받은 사람이었어요. 이 사람은 죽어 마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울어서는 안 됐어요. 그런데 오늘 어떻습니까? 가슴을 치고 통곡하며 울죠. 소리 내서 우는 이것은 내가 저 스데반의 저 죽음에 내가 동참하겠다라는 표현입니다. 오늘 울었더라 큰 울음 그 앞에 스데반을 장사하고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장사하고는 함께 가져가다, 함께 가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 울음은 내가 스데반과 함께 하겠다. 그 믿음과 함께 하겠다라는 고백이죠. 내가 어떤 처벌을 받고 징벌을 받더라도, 공회와 지도자들이 스데반을 정죄하고, 죄인이라고 했을 지언정 이 울음은 나 역시 저 사람과 같은 죄인입니다라는 울음이에요. 나도 함께하겠습니다. 저 믿음과 함께하겠습니다.라는 고백이죠.
그런데 성경은 이 크게 운 사람들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나요? 8장 2절 초반부에 뭐라고 나와 있나요? 경건한 사람들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경건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이에요. 이렇게 인간을 넘어선 울음이죠. 상대의 아픔을 함께하는 자들을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라 성경은 기록합니다. 결국 이렇게 스데반의 죽음 앞에서 함께 운 사람들이 어떻게 되나요? 이 사람들이 흩어지죠. 그리고 이 산들이 흩어져서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어 땅끝까지 하나님의 교회를 세우는 사명을 감당하게 됩니다. 헨리 나우헨에는 영어의 care[케어]라는 단어가 돌봄이라는 뜻이잖아요. 이 care이라는 단어가 비탄(悲嘆)이라는 고트어 카라(kara)에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진정한 돌봄은 고통에 연대할 때 가능한 것이죠. 우리 자신의 고통 가운데 타인과 연대되지 않고서는 이 고통당하는 자들의 고통을, 그들의 기쁨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이러한 고통과 비탄을 제거하지 않으시고 진정으로 약자들과 고통 당하는 자들과 연대하게 하시는 거죠. ★나의 고통이 다른 사람과 연결되는 겁니다. 이것이 돌봄이고 이것이 울음이에요.
저는 오랫동안 눈물이 없었습니다. 어머니가 집을 떠난 그날도 울지 않았어요. 돌아왔는데 마음속에 분노와 아픔과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원망만 있었고, 아버지에 대한 미움과 증오만 있었지 울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아내가 떠난 그 현실에 아버지께서 저 모르게 이제 술을 드시고 절규하면서 우는 모습을 몇 번 보기는 했어요. 분노가 제 감정을 고장 나게 만들어 버렸죠. 눈물이 나지 않았습니다. 오랜 세월 아버지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한 채 살아왔습니다. 그저 손가락질만 했어요. 그러니 떠나지... 이러면서. 그런데 우리들교회에 와서 말씀을 돌아보며 내 죄가 깨달아지니 이 공감하지 못하며 손가락질을 하며 정지한 이것이 너무 큰 악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악이에요. 눈물은 우리의 고장 난 감정을 다시 회복시켜줍니다. 눈물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 내 심장을 다시 뛰게 만들어줘요. 정말 우리가 수많은 간증을 듣잖아요. 이 간증에 같이 울어야 되는 거예요. 비탄해야 됩니다. 뭐 어떻게 해요? 저 사람과 같은 환경에 있었다면 나도 그러했겠다. 저 사람의 아픔이 나의 아픔이다. 저 사람의 죄가 나도 그러했겠다. 하면서 같이 울 때 이 큰 울음이 무엇입니까? 이 사명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죠.
<악의 평범성>의 저자 한나 아렌트는 옛날 그 아우슈비츠 감옥에 수감되었던 사람인데, 이 한나 아렌트가 아우슈비츠 150만을 죽였던 홀로코스트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 중령이 얼마나 악한 사람인지 이제 그가 교수형을 당하는 그날 얼굴을 보러 간 거예요. 근데 얼굴을 보러 정말 이 얼굴을 보러 가면서 이렇게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진짜 무시무시하게 살인범처럼 악인처럼 생겼겠구나. 그런데 현장에 가서 그 얼굴을 보고 완전히 뒤로 넘어갔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너무 모범적이고 너무 선량한 얼굴을 하고 있었던 거예요. (저도 좀 그렇지 않나요?^^ 사람들이 그런 삶을 안 살았다고 생각을 합니다. 죄송해요. 이런 사람을 조심해야 돼요. 선량한 얼굴을 하고 있는 사람.) 너무 모범적이고 선량한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완전히 놀란 것이죠. 아돌프 아이히만는 한 명의 공무원으로 그저 내려온 공문에 충실히 일을 한 거예요. 그냥 이렇게 하라고 하니까 그냥 이 버튼을 내리고... 내리고... 가스실에서 죽인 것밖에 없습니다. 여기에 뭐가 결여되어 있습니까? 공감과 울음이 결여되어 있죠. 이 아돌프 아이히만는 그저 일을 한 거예요. 결국 독일 아우슈비츠의 이 비참한 이 비극은 이 광기는 공감의 결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도구적 조작적 지식을 가지고 엄청난 악을 범하며 세기의 범죄를 행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이라 말합니다. 그리고 한 아렌트의 다른 저서 <생각하는 힘>이라는 책이 있는데 그 책에 봐도 어떻습니까? ★이 끔찍한 비극은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행해졌다. THINK[띵크]가 무엇이죠? 말씀을 읽고 그 말씀에 내가 공감되고, 나의 고난과 나의 죄가 그 말씀과 연결되면서 예수 십자가가 우리 안에 믿어지는 것이죠. 그런데 우리는 그저 이 공감! 이 울음이 없이 이성적으로만 생각하며 그저 일만 합니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의 결과를 생각할 줄 모르는 공감의 능력이 전혀 없는 사람, 상식적인 동정심이 없는 사람, 다른 사람이 죽겠다고 아우성쳐도 그 죽겠다고 아우성치는 사람의 아픔에 공감하지 못하는 관료적 성실성. 이 관료적 성실성이 가장 악한 거예요. 결국 이 관료적 성실성이 어떻게 됩니까? 빌라도가 예수 그리스도를 못 박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그저 나는 일한 것뿐이야. 빌라도는 가이사의 충신으로 이 일을 했어야만 했죠. 총독 자리에 있으니, 그러니 예수님께서 아무 죄가 없음을 알고도 손을 씻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이것이 울음이 결여된 사람들이 하는 일들입니다. 수많은 간증을 듣는 우리는 함께 울어야 됩니다. 그 울음을 통해서 그 사람의 아픔을 생각해야 돼요. 그리고 그 울음은 그 사람을 이해할 때 나오는 반응입니다. 이해하면서 THINK[띵크] 생각할 때 나오는 반응이에요. 그리고 이 공감이 결국은 십자가에까지! 그리고 이 십자가는 부활에까지 나아갑니다. 결국 내 속에 예수님이 오시기 위해서는 큰 울음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십니다.
제가 섬기는 고등부의 어떤 아이 한 명을 예전에 심방을 갔던 기억이 있는데요. 이 아이는 어느 날 이제 아버지가 집에 안 들어오시는 거예요. 아버지가 집에 안 들어오시니까 이제 어머니가 이 아이의 손을 잡고 아버지를 찾으러 간 거예요. 그때 이제 자주 가던 아버지가 자주 가던 곳에 이제 이 아이를 데리고 그냥 손을 잡고 이렇게 들어갔는데 문을 딱 여는데 이제 아버지가 목 매달고 자살한 그 현장을 본 겁니다. 어머니는 그 현장을 아이에게 보게 한 그 죄책감에 또 무너지게 되고 이 아이가 그때 감정이 고장나버린 거예요. 그래서 아버지 장례식장에서도 아예 울지 않았다고 합니다. 한 번도 울지 않았다고요. 그 현장을 봤을 때도 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도 울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고등부로 올라와서 자라서 큐티를 하면서 사무엘 큐티를 하면서 사무엘이 성전에서 홀로 키워지고, 그 사무엘에게 하나님이 찾아가서 사무엘아 사무엘아 내가 어디 있느냐? 말을 거는 이 본문 앞에서 이 아이가 울어버린 것이죠. 크게 통곡을 했다고 해요. 그리고 어머니와 함께 이 큐티 본문을 나누면서 자기의 삶을 해석하며 같이 울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도 아버지가 없는 나도 홀로 두지 않는구나. 하나님이 나를 돌보시는구나 그러니까 이제 예수의 십자가가 믿어지는 거죠.
우리 3절 보겠습니다.
3.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결국 나를 잔멸하는 이 사람으로 경건한 사람들은 울기 시작합니다. 잔멸이라는 단어는 유명한 이제 신학자가 이렇게 표현을 했습니다. 멧돼지가 포도밭에 들어가서 막 이제 포도를 짓밟는 거예요. 하나도 남김없이 난폭하게 포도를 전부 다 짓밟기 시작하는 거예요. 포도가 짓밟히니까 어떻게 되죠? 다 터져버리는 거에요. 이것이 마치 피가 낭자한 모습처럼 이것이 잔멸하다입니다. 사울은 이렇게 교회를 잔멸합니다. 그런데 이 잔멸하다라는 이 표현이 미완료로 기록되어 있어서 단회적으로 한 번 박해를 했던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교회를 핍박했다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한번 생각을 해보면, 이 사울이 나중에 바울이 되잖아요.(모르시나요?^^ 아직 안 나왔으니까 모를 수 있죠. 우리는 큐티 하기 때문에 내일 나옵니다.) 사울이 바울이 돼요. 근데 바울이 같이 다녔던 사람 중에 가장 신뢰했던 사람이 누가입니다. 너무 가까이 그 바울이 했던 그 수많은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을 봤는데 누가는 뭘 기록하고 있나요? 사울의 약점을 기록하고 있어요. 사울이 잔멸했다 이렇게 기록하고 있죠. 이 구속사인 것 같아요. 하나님 앞에서 정말 우리의 모든 것을 고백하고 기록하는 이것. 그런데 우리 이 사울이 교회를 잔멸하고, 이 잔멸당한 사람들이 이제는 큰 울음을 울고 흩어지기 시작하는데 그런데 이 사울이 어떤 사람이냐면 어제 큐티 본문인가 엊그제 큐티 본문에 보면 스데반이 죽을 때 옆에 서서 옷 맡은 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뭡니까? 내 옆에서 내 옷을 맡은 자가 나를 잔멸한다는 거죠. 내 옆에서 내 옷을 맡은 자가 나의 구원을 돕는 자라는 거예요. 이 사람을 통한 핍박과 큰 박해가 결국은 구원의 큰 기쁨으로 나아간다는 겁니다. 지금 내 옆에 오늘 오실 때 내 옷을 맡은 자가 누구였죠? 그 사람이 내 구원의 최고의 공로자라는 거예요. 옷도 안 맞죠? 자기 옷이라도 입으면 감사하죠. 내 아내, 내 남편. 이 사람들이 나를 잔멸해줘야 내 자아가 깨어지고, 내 중심성이 깨어지고, 내가 가지 못했던 곳으로 흩어져서 사명을 감당하게 되는 겁니다. 이 사람을 통해서 울음이 회복된다는 거예요. 내 옆에 옷 맡은 자를 내가 끊어내서는 안 됩니다. 내 구원을 위한 최고의 공로자입니다.
적용 질문드립니다.
Q. 내가 크게 통곡하며 울었던 적은 언제입니까?
Q. 수많은 간증을 함께 들으며 공감하나요? 아니면 이성적으로 평가하며 손가락질 하나요?
Q. 내 옆에 옷 맡은 자는 나에게 어떤 존재입니까?
우리의 삶에 그날이 임하기 위해서는 세 번째로 그날이 임하면
큰 기쁨이 있습니다. (4-8절)
4절에서 8절 우리 다 같이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4.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5.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6.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한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을 따르더라
7.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못 걷는 사람이 나으니
8.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
큰 박해, 큰 울음 뒤에 큰 기쁨이 있다고 합니다. 이제 박해를 받은 사람들이 흩어졌죠. 디아스포라. 지경이 넓어졌습니다. 그런데 오늘 큰 기쁨이 어디에 있습니까? 8절에 보니까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다라고 하죠. 그 성이 어디입니까? 사마리아 성. 우리 사마리아 성에 대해서는 우리가 잘 알지만 다시 한 번 살펴보면 원래 이스라엘은 하나의 나라였습니다. 그냥 하나였죠. 그런데 이게 반으로 딱 갈라집니다. 누구에 의해서 갈라지나요? 솔로몬이라고 하는 분들도 계신데 솔로몬 때는 안 갈라지죠. 솔로몬 때문이지만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함에 의해서 남과 북으로 분단됩니다. 그런데 이 분단된 북 왕국의 수도가 사마리아였어요. 우리가 담임 목사님 설교하실 때 우리가 쭉 이제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을 묵상했었죠. 분단 200여년 만에 남유다보다 더 빨리, 북왕국-북이스라엘-은 앗수르 제국에 의해서 멸망을 당합니다. 근데 그 당시 앗수르 사르곤 대왕이 이제 사마리아를 점령할 때 쓴 정책이 있어요. 뭐냐 하면 이 유대인들이 너무 자기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다~ 하나님의 나라다~ 이렇게 하니까 이런 의식을 깨뜨려버리기 위해서 한 정책이 뭐냐 하면 다른 나라 사람들을 끌어다가 여기에 살게 한 거예요. 이방 사람들을 끌어다가 살게 하니까 이 북이스라엘이 어떻게 되냐면 섞여버리는 거죠. 혼합되어 버립니다. 그러니 남유다 사람들이 북이스라엘을 쳐다봤을 때는 어떻게 생각하냐면 저 사람들은 혼혈-섞였다 무시하기 시작합니다. 어느 정도까지 무시하냐면 저들은 이제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라는 거죠.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 아니기 때문에 어디까지 무시하냐면 개보다 못한 존재로까지 무시를 합니다. 이것이 어떻게 드러나냐면 지금도 그 생각 때문에 전쟁이 일어나잖아요, 저 땅에. 그것 때문에 전쟁이 일어나는 거예요, 사마리아하고. 어디까지냐면 이렇게 원래 남유다에서 북이스라엘을 가려면 그냥 쭉 직선으로 쭉. 해변도로라고 있어요. 쭉 직선으로 가면 되게 빠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사마리아를 통과해야 되니까 사마리아를 통과하지 않기 위해서 빙~~ 둘러갑니다. 이렇게 더 먼 길로 둘러가요. 그 땅을 밟는 것조차도 경멸했던 거죠.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사마리아인들 역시 유대인들을 증오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정말 이 골은 서로 상종도 하지 않을 만큼 깊었죠.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가 서두에 마지막 유언! 마지막 명령! 사도행전 1장 8절에 뭐라고 나옵니까?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어디? 사마리아! 사마리아에도 이 증인이 되라 하셨어요. 그런데 사도들은 시도조차도 안 합니다. 어떻게 저 사마리아를!!! 아, 아니에요? 그러니 큰 박해와 큰 울음으로 흩어지게 되니 이 복음이 사마리아에까지 들어가는 것이죠.
누구에 의해서? 오늘 보니까 한 사람 빌립! 빌립이 등장을 합니다. 이 빌립이 귀신도 쫓고, 또 크게 소리 친다고 그러잖아요. 이 귀신들은 나갈 때 항상 소리를 치더라고요. 그래서 소리가 많이 이렇게 들리면 아, 때가 됐구나! 생각하시면 됩니다. 크게 소리치며 나갔는데 그런데 그런 것이 아니라 이 성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지니 이 사마리아 성에도 큰 기쁨이 가득하죠. 그럼 우리는 생각하죠. 아니~ 그거는 빌립이나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빌립이 아니에요! 빌립 하면 많이 들어본 것 같잖아요. 근데 예수님의 제자 빌립이 아닙니다. 여기는 평신도 빌립이에요. 우리는 막 빌립이나 할 수 있지 우리는 못해요! 이렇게 얘기하는데, 우리가 본문을 자세히 보면 대단한 사람들이 이 일을 행한 게 아니에요. 1절에 보니까 사도 외에는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사도들은 안 흩어졌어요. 핍박이 없었던 사도들, 핍박이 또 좀 덜했던 히브리파 유대인들은 안 흩어졌어요. 누구? 그때 당시 무시받던 그 헬라파 유대인들, 핍박이 심했던 이들이 흩어진 겁니다. 그들 중에 한 명이 빌립이에요. 빌립은 평신도입니다. 사도가 아니었어요. 그리고 빌립은 도망자 신세였습니다.
스데반이 왜 죽었는지 아시죠? 스데반의 설교가 바로 이거예요. 스데반이 한 설교를 왜 그들이 듣기 싫어했냐면, 스데반이 이들의 선민의식과 율법을 다 깨뜨려버리는 거예요. 뭐라고 설교했나요?
너희들이 선택받았다는 그 아브라함. 나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나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가지고 있다. 너희들이 그렇게 대단하게 선택받았던 선민의식의 그 핵심인 그 아브라함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 스데반이 이렇게 설교하는 거예요. 그 아브라함이 어떤 사람이야? 이러면서 그 과거를 들통 내버리죠. 아브라함이 원래 어디 출신인지 아느냐? 더 이야기해 줄까? 이러면서 그가 메소포타미아에서 살았었다. 원래 이 이스라엘 사람도 아니었던 거예요. 더 얘기해 줄까? 하면서 그가 거기서 뭐 했는지 아느냐 우상을 섬겼다. 이걸 다 깨뜨려버리는 거예요. 우리는 또 너무 잘 알죠. 담임 목사님 설교를 들어서. 이 아브라함이 무슨 행태를 했습니까? 아내를 두 번이나 팔아먹었죠. 한 번도 아니라 두 번이나. (이 아브라함을 이렇게 바라보면 제가 좀 더 나은 것 같은 이런 생각...^^) 그 인생의 찌질이들도 하나님이 붙으시니 하나님이 쓰신다는 거죠. 너희들이 생각하는 그 모세, 너희들이 본받아야 된다고 생각하는 그 모세, 율법을 받았던 그 모세 한번 얘기해 줄까? 하면서 스데반이 뭐라고 설교하죠? 그 모세는 살인자요. 도주자였다고 말합니다. 너희들이 그렇게 대단하게 생각했던 다윗! 이렇게 하니까 이들이 막 듣기 싫어서 막 귀를 막고 돌로 치는 겁니다. 자기들의 모든 신화를 다 깨버리니까. 스데반이 어떻게 합니까? 모든 초점을 사람에게서 하나님께로 옮기는 거예요. 사람이 하는 게 아니다! 아브라함을 본받아라. 모세를 본받아라. 다윗을 본받아라 아니에요. 스데반의 설교를 보면 하나님이 먼저 찾아가세요. 하나님이 먼저 부르십니다. 하나님이 먼저 택하세요. 우리의 모든 초점을 빌립이니까 합니다가 아니에요! 하나님은 나를 부르시고 내게 찾아오신 거예요. 그러니 어떻습니까? 빌립이 위대한 일을 했다가 아니라! 6절에 되게 재미있는 표현이 나옵니다.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이렇게 기록되어 있죠. 빌립의 말을 안 들었다는 거예요. 사도가 아니니까. 무슨 말이죠? 빌립도 하더라 이겁니다. 빌립은 사도가 아니고 집사였어요. 그 일곱 집사를 세울 때 말씀과 기도가 아니라 이 행정 그리고 구제를 하기 위해서 세운 사람이었습니다. 근데 이 집사도 흩어진 무리 속에 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성령께서 함께 하시니 빌립도 하더라 이거죠. 이 빌립이 사도들조차 하지 못했던 그 사마리아의 경계로 나아갑니다. 이 빌립은 알았어요. 내가 대단한 존재가 아님을 알았어요. 더 나아가서 빌립은 사도가 아니라 나는 죄인임을 알았습니다. 내가 얼마나 낮은 자인지. 왜냐하면 자기는 도망가잖아요. 흩어져서 박해를 막 견디는 것이 아니라 피하고 도망가고 무서워서... 그러니 어떻습니까? ★그 낮은 마음 가난한 심령이 뭘 넘게 하죠. ★★수천 년 동안 내려왔던 그 고정관념! 그 사마리아의 경계를 넘게 하는 거예요. 내가 어떤 존재인지 깨닫는 자가 그 경계를 넘어설 수 있는 겁니다. 그리고 그 경계를 넘어서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죠.
빌립은 알았을 거예요. 자기가 박해받아서 도망가니 사마리아인들도 그들이 원해서 그런 게 아니구나! 그들이 원해서 혼합 정책을 한 게 아니구나! 그 환경에 처해서 그들도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내려왔구나! ★이해가 되니 용서가 되고 용서가 되니 경계를 넘을 수 있는 것이죠. 그리고 그 경계를 넘어서 무엇이 흘러갑니까? 복음이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스데반에게 임했던 그날이 예루살렘에만 머문 것이 아니라 사마리아에게까지 나아가서 사마리아 온 성에도 그 기쁨이 가득 넘쳐 넘치게 되는 거죠. 사마리아는 유대인들이 구원의 대상지로 여기지도 않았던 원수 같은 곳이었고, 예루살렘 교회 지키느라 사도들은 가지도 않은 곳. 하나님께서는 빌립 같은 평신도들을 보내십니다. 4절에서 흩어진 사람들이 전한 내용이 복음의 말씀인데 빌립이 전한 내용은 단 한 가지였어요. 오직 그리스도였습니다. 초대 교회에서 전파하는 복음의 핵심은 그리스도입니다. 잘 살고, 잘 죽으시고, 잘 살아나신 예수님! 핍박받으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바로 구원자 되신 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전했습니다! 이 십자가의 복음을 누가? 빌립도 하더라! 빌립이 전한 것이죠.
적용 질문드립니다.
Q. 아직도 내가 넘어서지 못한 편견과 고정관념은 무엇입니까?
Q. 아직도 용서가 되지 않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Q. 그 사람과 내가 똑같은 죄인임이 믿어지십니까?
Q. 나는 어떤 경계를 넘어서 어디로 나아가야 됩니까?
오늘은 잠깐 제 이야기를 할까 합니다. 어느 날 아침에 제 큐티 하려고 책상에 딱 앉았는데 전화가 울리는 거예요. 전화가 오면서 막 다급한 목소리가 들립니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119구조대원이었어요. 그러면서 저에게 이제 전달하는 내용이 아버지가 이 트럭에 부딪혀서 날아가서 크게 부상을 당했는데 이 아버지가 병원에 안 가겠다라고 소리치고 막 난리를 부린다는 겁니다. 바꿔 달라고 그러고 아버지에게 아버지, 병원 가셔야 됩니다. 안 가도 된대요. 무조건 가셔야 됩니다. 이렇게 얘기하고 급하게 옷을 입고 이제 지방으로 내려갔습니다. 내려가는 동안도 계속 말씀을 듣고 그날 큐티를 묵상하고 내려갔는데 병원에 딱 갔는데 아버지 안 계신 거예요. 안 계신 거예요. 너무 놀라서 이리저리 병실을 다 찾아보고 막 했는데 알고 보니까 아버지가 그 기어서... 원래 늘 술 마시던 그 자리에 이렇게 기어서 간 거예요. 아버지를 뵈니까 기어갔으니까 이 옷이 다 찢어져 있는 거예요. 옷도 다 찢어져 있고 다 흙투성이 인데 거기서 술을 마시고 계신 거예요. 다리가 부러지고 ...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보니까 또 화가 막 치밀어 오르는 거죠. 그 병원에서는 수술이 안 된다고 해서 이제 아버지를 서울로 모시고 올라오려고 이제 차를 모시고 올라오는데 차를 태우는데도 막 소리를 치는 거예요. 아프다고. 그렇게 모시고 올라왔는데 서울에 올라오니까 이제 오후였습니다. 오후에 이제 아는 큰 정형외과에 가서 검사를 다 받고 하는데 나중에 그 병원에서 우리는 수술 못 하겠다고 나가라고 이러시는 거예요. 그 아버지를 모시고 갈 곳이 없는 거예요. 또 여기 갔다 저기 갔다 하는데 못 찾다 또 어떤 병원에 갔다가 또 그 병원에서도 검사 다 하고 또 쫓겨나고. 병원에서 계속 난리를 치시니까. 간호사님들에게 의사 선생님에게 난리를 치시니까. 욕설하고 난리 또 쫓겨나고. 결국 네 번째 쫓겨난 곳에서 이제 마지막 병원에 갔는데 그 병원은 이제 시에서 운영하는 곳이라서 쫓아내지는 않더라고요. 그래서 아버지가 이렇게 수술을 받고 근데 이제 그 병원에 갔을 때에도 병원에 가신 분들은 알잖아요. 이렇게 휠체어를 밀고 가는데 그냥 가면 되는 게 아니에요. 이것을 두고, 혈액 검사해야 되고, 소변 검사 받아야 되고, 심전도 받아야 되고, 그다음에 뭐 서류 떼와야 되고, 아버지 여기 계세요. 하고 제가 뛰어갔다 오고. 아버지, 여기 계세요. 하고 뛰어갔다 오는데 또 뛰어갔다 오면 아버지가 또 바닥에 이렇게 오줌을 싸시는 거예요. 오줌을 싸면 또 그걸 다 치우고 사람들은 다 이제 쳐다보고 있고. 저만 당황하고 아버지는 늘 평안한 얼굴로^^. 기저귀를 사서 또 아버지를 채워드리고. 그렇게 해서 간신히 수술을 받았는데 또 수술받은 또 뒤에 또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가서 또 늘 전화가 오는 거예요. 이 난리 친다고. 그러면 또 내려가서 의사 선생님과 간호사 선생님에게 죄송하다고 얘기를 하고... 너무 힘이 드는 거예요.
도와주는 사람 아무도 없고 홀로 이 일을 감당해야 된다는 게 정말 큰 박해처럼 느껴졌습니다. 이것이 큰 핍박이고...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제가 좀 자랑을 하자면 10년이 넘게 하루도 아버지를 위해서 기도 안 한 적이 없습니다. 매일 기도했어요. 그런데 왜 나에게 이런 시간을 주시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큰 박해가 저에게 왔던 큰 고난이 이해되지 않았어요.
어느 날도 이제 그날 쫓겨나가지고 아직도 기억납니다. 화창한 가을날이었어요. 쫓겨나서 이제 아버지를 옆에 태우고 이렇게 가는데 차를 타고 이렇게 가는데... 제가 이제 아버지가 좋아하는 가곡을 좀 틀어 드렸습니다. 틀어드리니까 아버지가 그 가곡을 듣더니 갑자기 손을 꽉 쥐시더니 막 울기 시작하시는 거예요. 아버지를 옆에 태우고 가는데 아버지가 너무 이렇게 막 울기 시작하는데 그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아버지가 이해가 되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 큰 울음 앞에서 아버지가 이해가 되기 시작하는 거예요. 어떻게 보면 제 연배 때... 그때 제 연배 때 그리고 어떻게 보면 저랑 비슷한 그 시기에 아내는 집을 나가고, 모든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고, 감옥 갔다 오고, 아버지가 계속 우시는 거예요. 그러니 이제 아버지가 이해가 되고 이해가 되니 용서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서 아버지에게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물었어요. 그 울고 있는 아버지에게 아버지! 아버지, 어떻게 지금 죽으면 천국 갈 자신이 있냐? 이러니까 아버지가 자신이 있다고 그러더라고요. 어떻게 구원받냐? 이렇게 여쭈니까 아버지가 예수 이름으로 이렇게 대답을 하시더라고요. 결국은 이 큰 박해를 통해서 아버지와 대화를 하게 되고. 만날 때마다 예배를 드렸거든요. 예배드리면서 우리 목장처럼 나눔 질문하면서 예배드리고. 그 말을 계속하다 보니까 이해가 되고 이해가 되니까 용서가 되고 용서가 되니까 사마리아 같았던 아버지 결코 내가 넘어설 수 없었던 그 경계선! 그것을 하나님이 넘게 해 주셔서 복음을 전하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아버지가 우리들교회로 인도돼서 정말 하나님을 영접한 거죠.
하나님께서 큰 울음 뒤에 이제는 하나님이 저에게 큰 기쁨을 주셨는데 아버지가 마지막 임종하던 발인식 날 본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그날 아버지 장례 마지막 발인날 큐티 본문이에요. 데살로니가전서 4장 13-14절 하나님이 이런 말씀을 주셨습니다. 제가 읽어 보면,
13.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4.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뭐라고 되어 있나요?)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데살로니가전서4:13-14)
아버지의 죽음을 자는 자들이라고 하나님이 해석해 주셨습니다. 이게 발인날 큐티 본문이에요. 그리고 16절에 이날 본문 16절에 그들이 먼저 일어난다고 합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날 우리에게 부활의 날을 주시기 위해서 우리 안에 큰 박해, 큰 울음, 큰 기쁨을 주십니다. 그리고 그날에 그들이 먼저 일어나 주와 함께한 보고픈 얼굴들을 우리는 보게 될 것입니다. 남은 우리는 큰 박해 가운데 내 자아가 죽어져야 되죠. 무너져야 됩니다. 이것이 죽고, 이제는 큰 울음으로 사명에 공감하며 경계를 넘어서 이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이죠. 예루살렘에서 이제는 사마리아로. 결코 내가 넘어설 수 없었던 그 땅으로 나아가시기를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찬양하겠습니다.
그날에 다시 만납시다!
♬ 아픔 많은 세상에
주의 복음 들고
부르심 따라갑니다
슬픔과 고통이 가득한
이땅의 눈물을
닦아주려
어쩌면 내 삶을 전혀
돌볼 수 없을지
모르겠지만
나를 보내시고 무너진
그땅에 내 생명
묻으소서
주님의 나라가
세워지는 것이
나의 평생 소원
주님의 교회가
이곳에 세워짐이
마지막 호흡이
끝이 날 때까지
나는 나아가리
그날에 그토록 보고픈
주 얼굴보리
십자가를 질 수 있나
우리의 심령
주의 것이니
당신의 형상
만드소서
주 인도 따라
살아갈 동안
사랑과 충성
늘 바치오리다. ♬
기도제목 이 시간 우리가 들은 말씀을 기억하며 기도하며 나가겠습니다. 큰 박해가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 이 큰 박해를 내가 견딜 힘이 없습니다. 주님 이 박해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큰 울음이 있다고 합니다. 큰 박해 뒤에 오는 큰 울음을 통하여서 하나님 사명으로 나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 정말로 큰 박해 받는 시간들이 너무 깁니다. 이제는 흩어질 때에 나를 통하여서 하나님의 복음의 증인이 되어 이 복음이 닿는 곳곳마다 큰 기쁨이 넘치게 해달라고. 그리하여서 정말로 이 큰 박해로 내 자아가 무너지고 자기 중심성이 무너져서 이제는 사명의 증인으로 내가 결코 갈 수 없었던 사마리아까지 나가게 해달라고 주여 이 시간 우리 한번 주여 한 번 부르짖고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큰 박해 가운데에도 흩어진 가운데에도 나를 살려주신 그 은혜에 감격하여 주님 귀한 예물을 드립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정말 살아낼 수 없는 환경입니다. 그저 울 수밖에 없는 환경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이 환경을 통하여서 내가 넘어설 수 없는 그 사마리아까지 나아간다고 하시오니 주여 이 말씀 붙들고 내가 나아갑니다. 주님 나와 동행하여 주옵시고 내가 하나님 나아간 그 사마리아 땅에 큰 기쁨이 넘쳐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 큰 기쁨에 감사하여 주님께 드린 예물이 이제 또 한 사람, 큰 박해 받는 한 사람을 위하여 아름답게 사용되어지게 하여 주옵시고, 주님 이 예물을 드린 손길마다 또 그 가정마다 프로젝트와 아이디어에 주님 기름 부어 주시옵소서. 이 예물이 흘러가는 곳곳마다 큰 박해를 받는 한 사람이 살아나게 하여 주옵시고 부활의 기쁨이 넘쳐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감사합니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적용질문 정리
그날에 우리의 삶에 이 기쁨-이 부활-이 임하려면,
1. 큰 박해가 있습니다. (1b절)
Q. 내가 당한 큰 박해는 무엇입니까?
Q. 큰 박해로 흩어져서 내 지경이 넓어졌나요? 큰 박해로 그저 예루살렘에 숨어 지내고 있지는 않나요?
Q. 깨어져야 할 자기중심성-자기 신화-는 무엇입니까?
2. 큰 울음이 있습니다. (2-3절)
Q. 내가 크게 통곡하며 울었던 적은 언제입니까?
Q. 수많은 간증을 함께 들으며 공감하나요? 아니면 이성적으로 판단하며 평가하나요?
Q. 내 옆에 옷 맡은 자는 나에게 어떤 존재입니까?
3. 큰 기쁨이 있습니다. (4-8절)
Q. 아직도 내가 넘어서지 못한 편견과 고정관념은 무엇입니까?
Q. 아직도 용서가 안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Q. 그 사람과 내가 똑같은 죄인임이 믿어지시나요?
Q. 나는 어떤 경계를 넘어서 어디로 나아가야 하나요?
**** 기도제목
A.
1. 있다가 없고 없다가 있는 영육의 까꿍을 잘하고 말씀에 하루만 살도록
B.
1. 회개하고 부활해서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증인되도록
C.
1. 하나라도 잘 마감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