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8. 24.
주일예배
본문: 에베소서 4:1-6
제목: 성령의 부르심
이성훈 목사님
설교 말씀
지난 한 주도 상한 심령이 되셔서 각자의 자리를 잘 지키셨나요?
에베소서로 큐티를 시작하고 묵상하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리는 것은 전화 거는 사람의 마음입니다. 부르심은 calling 입니다. 성령의 부르심은 성령께서 결정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듣고 받을 뿐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주님을 예배하게 된 것이 우리 힘과 원대로 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전적인 은혜로 불러주셨습니다. 우리가 받을 상황인지 고려하지 않으시고 원하신 타이밍에 불러주셨습니다.
목사님께서 사도행전 강해를 하셨을 때 남겨두신 단어가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부르심 이라는 단어가 남아있더라구요.
성령의 부르심에 대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1. 겸손한 자리로 부르십니다.
1절.
우리는 본래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결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었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녀로 불러주셨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한 결과입니다. 선발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뜻하시고 때가 차서 성자 하나님께서 완성하시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때에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을 적용해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부르심이 들리도록 역사해주셨기 때문에 듣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성령님께서 들리게 해주셨기 때문에 이 부르심을 특별히 성령의 부르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진노의 자녀를 하나님의 자녀로 바꾸셨습니다.
단순한 초대가 아닌 존재를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인줄 믿습니다. 그 전에는 하나님으로부터 도망다니던 인생으로부터 이 자리에 나와 하나님 앞에 당당히 나아오게 되는 존귀한 존재가 되었기 때문에 삶이 평안하다고 하며 조용히 살면 될까요?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에 그러므로 부르심에 합당한 응답을 해야 합니다. 그에 맞는 방향이 있습니다.
어떤 삶이 부르심에 합당한 삶일까요?
2절.
모든 겸손과 온유, 오래 참음, 그리고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함을 이야기합니다.
사랑 가운데 용납함은 상대방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내가 받아내는 것입니다. 같이 사는 가족들을 볼 때, 말이든 행동이든 맘에 안들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미워서 속에서 분노가 일어날 때가 너무 많은데, 이런 모습을 받아주는 것입니다. 내가 당한 만큼 갚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인격으로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하루 이틀은 가능하지만 몇 년이 되면 참을 수 없게 됩니다. 우리 힘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단어인 사랑이 붙습니다. 사랑으로 하라는 뜻은, 상대방이 원하는 대로 해주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생각하며 구원을 향해 애통해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구원되도록 약점과 허물, 행동들을 받아주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 오래 참음입니다.
사랑 가운데 용납하기 위해 오래 참아야 합니다. 성령께서 원하시는 구원의 때가 임할 때까지 내 생각을 내려놓고 기다려주라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도 하나님께서 용납해주셨기 때문에 이 자리에 있는 것처럼, 더 이상은 못참겠다는 말을 하면 안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래 참는 것도 우리 힘으로 되지 않기 때문에 온유함이 필요합니다. 온유는 내 분수를 넘지 않는 것입니다. 내 한계를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꾸 선을 넘게 됩니다. 내 권리를 주장하고 권한을 앞세우고 생각을 주입하려고 하는 것이 우리의 전공인데, 내 한계를 지키고 주제를 파악하는 것이 온유입니다.
내 주제를 파악하면 인생에 어떠한 멍에가 올라가도 옳소이다가 나오는 것 같아요. 내 한계를 모르니 이럴 사람이 아니다 라고 하면서 불평하고 원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온유하기 위해서, 주제를 알기 위해 꼭 알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내 죄를 아는 것입니다. 내가 얼마나 비천한 죄인인지, 하나님 앞에 타락한 존재인지, 내가 100%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바로 겸손입니다. 겸손은 낮은 척 하는 것이 아닙니다. 겸손은 하나님 앞에 100% 죄인임을 알면 다른 사람이 낫다는 것, 좋다는 것을 알게 되고 어떠한 사람보다 못하다는 것을 인정하게 됩니다.
결론적으로 겸손하면 온유할 수 있고, 온유하면 오래 참을 수 있고, 오래 참을 수 있으면 서로 용납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겸손이 근본입니다. 100% 죄인임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모든 겸손으로 하라는 말을 붙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100% 타락한 존재라는 것을 철저히 알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살던 시대에 겸손의 반대말은 잘남이었습니다. 즉, 겸손은 못났다는 말, 욕이었습니다. 그래서 못나게 되라고 가르치는 것이 이해되지 않는 말이었고 당시 사람들의 시선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우리가 스스로 100% 죄인임을 깨닫고 겸손해질 수 있겠습니까. 할 수 없기에 성령님께서 우리를 도우셔서 겸손한 자리로 불러주시는 것입니다. 겸손한 환경에 갇히게 하시는 것입니다.
바울이 자신이 갇혀 있음을 강조합니다. 왜 이렇게 갇혀있음을 강조하고 있을까요? 성령께서 해주셨기 때문입니다. 겸손할 수 없는 나를 도우시기 위해서 내가 겸손할 수 밖에 없는 자리에 두신 분이 성령님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감옥 같은 상황에 갇혀 계십니까? 이것이 우연이 아니라 주 안에서 된 일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령께서 도우시기 위해 불러주신 것이기에, 힘들고 벗어나고 싶지만 나를 도우시는 이 부르심에 잘 갇히고 매여서 최고로 부르심에 응답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적) 지금 어디 갇혀있습니까?
그것이 주 안에서 갇힌 겸손한 자리임이 믿어지십니까?
겸손한 자리에 잘 갇혀있기 위해 이번 주 적용할 일은 무엇입니까?
2. 하나 되도록 부르십니다.
3-4절.
우리가 성령의 부르심을 받기 전 진노의 자녀였을 때를 옛사람이라고 합니다. 그 특징 중 가장 돋보이는 것은 분열되는 것입니다. 서로 비교하고 경쟁하고 다투다가 원수가 되어 다 쪼개집니다. 이것이 진노의 자녀일 때 옛사람의 모습입니다. 내가 하나님이기 때문에 내가 옳다고만 외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화평을 주셨습니다. 그 결과가 2장 15절에 나오는 한 새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마치 한 사람이 한 몸과 한 영을 이루는 것처럼, 여러 지체들을 주의 화평 가운데 모으셔서 한 사람처럼 만들어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화평으로 모아 주셔서 한 새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나도, 당신도, 우리 전체가 다 온전한 그리스도라는 고백을 하면서 어떤 묵상이든, 본문이든 나와 관계 없는 것이 아니라 나의 본문인 것처럼 믿고 고백하고 적용하며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작은 피부도 떨어지면 말라서 살 수 없는 것처럼 교회에서 떨어지면 우리도 영적으로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에서 상처받아서 혼자 신앙을 지키겠다는 말은 말이 안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공동체적으로 교회를 통해서 부르셨기 때문에 어떤 일이 있어도 붙어있어야 합니다. 구원의 은혜를 떠나서는 얻을 수 없기 때문에 부르심의 소망은 하나입니다. 교회가 소망하는 것, 구원이 하나이고 목적지인 천국이 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얼굴 붉힐 일이 많지만 우리는 결국 천국에서 만나게 되어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화평을 추구하며 살아야 합니다. 성령께서 하나 되게 하시는 연합, 하나됨은 물리적인 합체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정신적인 공감, 동화에 불과한 것도 아닙니다.
성령께서 하나되게 하시는 연합은 영적인 연합입니다. 평안에 매는 줄로 함께 묶여있는 것입니다. 그럼 평안이라는 밧줄은은 무엇일까요? 그리스도의 통치입니다. 평안(샬롬)은 아무 문제가 없는 것, 고통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평안은 하나님의 통치에 따라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질서를 지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평안에 매는 줄은 그리스도의 통치, 다스림입니다. 그러니 평안의 줄에 매여있는 것은 내가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으면서 사는 것, 주님이 오늘 주시는 말씀을 듣고 거기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평안에 매는 줄에 묶여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감옥에 매여 있는 사슬은 단순한 구속이 아닙니다. 바울이 주님의 말씀에 묶여 있다는, 영적인 연합을 하고 있다는 것을 가시적으로 보여주시는 사건이라고 해석한 것입니다. 이런 해석 없이는 얼마나 억울했을까요? 그러나 바울은 잊을만 하면 갇혀 있는 존재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자랑스럽고 감격이 있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상태를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에 바울은 감격스럽고 감사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평안에 매는 줄에 잘 매여있어야 합니다. 내 생각과 감정, 의지를 버리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말씀대로 적용하는 것이 서로 다른 관계에 있는 우리를 하나 되게 하는 영적 연합입니다. 순종은 단순한 쇠사슬과 속박이 아니라 지켜주는 안전벨트 입니다.
교회의 하나됨은 성령께서 만들어서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불러주셔서 교회로 들어오게 하시고 주님을 믿게 하십니다. 그래서 영적 공동체에 들어오는 순간 일부가 되어 갑니다. 교회가 말씀과 순종의 구조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도 문제가 있습니다. 교회에 와서 회복되어서 누리기만 하면 하나되게 하시는 것이 내게서 점점 약해집니다. 내 욕심과 감정이 살아 움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스스로 평안에 매는 줄을 푸는 모습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이것을 힘써 지키라고 하십니다. 성령이 하나되게 하심을 힘써 지키라고 하십니다. 사도 바울을 통해 하나님이 간절히 외치고 계십니다. 하나됨을 최선을 다해서 지키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큐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 분열할 수밖에 없는 자신을 말씀 앞에 세우고 약함과 악함을 비추는 것입니다. 또한 목장에서 죄악과 실수를 솔직하게 나누며 깎이고 가는 것입니다. 내게 하시는 말씀, 내가 회개해야 하는 사건이라고 해석하며 잘 양육받는 것이 연합을 힘써 지키는 일입니다. 또한 여러 봉사로 섬기면서 세상으로 나가려고 하는 나의 모습을 묶어둬야 합니다. 그 시간에 그 자리에 가야 하고 섬겨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배로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딱풀 성도가 되는 것이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는 것,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지키는 훈련을 가장 잘 받을 수 있는 곳이 가정입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만드셨다고 하는 공동체가 교회와 가정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만드셨기에 얼마나 소중하겠어요? 그러나 우리는 내가 옳기 때문에 떠나야 한다고 들썩들썩합니다. 그래도 우리를 가둬두신 자리라고 생각하며 잘 매여 있고, 하나됨을 누릴 때 성령께서 하나되게 하시는 부르심대로 우리 인생이 하나의 소망을 향해 달려가는 줄 믿습니다.
우리가 받고 싶은 세상의 부름은 우릴 높이게 할 것 같지만, 거기에는 반드시 끝이 있습니다. 그 부름은 한 순간에 버림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령의 부르심은 내가 one of them 이 되어서 하나를 이루는 힘들고 가기 싫은 자리로 불러 주시지만, 성령의 부르심에 영원한 소망과 구원이 있는 줄 믿습니다. 이런 하나되는 소망이 우리의 유일한 소망이 되길 축복합니다.
적) 평안의 매는 줄에 잘 매여 있습니까?
다시 말해 내 생각보다 주님의 말씀을 더 의지하며 따릅니까?
내 인생에 가장 큰 한 가지 소망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3. 삼위 하나님ㅇ니 함께하십니다.
5절.
그리스도께서는 참 하나님이시면서 사람이십니다. 100% 하나님이시고 100% 사람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한 분이십니다. 이것ㅇ을 믿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핵십입니다. 그래서 우리 믿음도 하나입니다. 그래서 타인의 믿음에 대해 판단할 필요가 없습니다. 신앙고백도, 세례도 하나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죄에 대해서 죽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로 누리는 생명은 하나이기 때문에 우리 모두가 영적인 가족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켜야 합니다.
6절.
성령의 부르심에 합당한 삶의 결론은 분명히 있습니다.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성령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모든 인생의 결론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생의 결론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생의 목적이 거룩입니다. 구별되어 하나님께 드려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 밖에 안계십니다.
완전하고 절대적인 하나님은 만유와 함께 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만유와 함께 하시고 특별히 하나님을 닮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어떻게 함께하시나요?
만유 위에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겐 보여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감춰져 있는 하나님의 뜻, 성부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지금은 하나님의 뜻을 다 알 수 없지만 우리가 알지 못하는 손길로 우리를 돌보고 계십니다.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만유를 통일하신다고 합니다. 하나되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죄 때문에 산산조각난 우리 인생과 우주를 하나로 묶고 계신 분, 십자가 부활로 구속해 가시는, 나타난 하나님의 뜻인 그리스도를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품으시고 중보하십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은혜입니다.
만유 가운데 계신다고 합니다. 만유 안에서 구원을 적용하시고 천국까지 인도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효과적인 능력입니다.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가르치시고 기도해주시고 도와주시는 성령 하나님의 내주하심과 교통하심입니다.
이것이 삼위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임마누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성령의 부르심에 응답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부름은 실망할 때가 오지만, 성령의 부르심에는 실망이 없습니다. 아무리 높고 좋은 자리도 예외가 아닙니다. 잠깐이 지나면 버림밖에 없지만 성령의 부르심의 결론에는 삼위 하나님이 함께하심이 있습니다. 우리가 겸손의 자리로 부르심을 받지만 응답할 수 없습니다. 어쩔 수 없이 환경에 매여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지 풀려있다면 바로 도망갈 것입니다.
모든 수고와 고생, 애씀과 힘씀에 실망이 없는 줄 믿습니다. 삼위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적) 삶의 모든 순간에 나와 함께 하시는 삼위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삼위 하나님과 함께 응답해야 할 성령의 부르심은 무엇인가요?
아직 그리스도와 함께 죽지 못한 나의 악함은 무엇입니까?
한 분이신 삼위 하나님을 확실히 믿습니까?
오늘도 나와 함께하시는 삼위 하나님을 의지하여 응답해야 할 성령의 부르심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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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제목
A
- 남자친구와의 관계를 말씀으로 분별하고 적용할 수 있도록
- 겸손한 자리에 잘 갇혀있는 적용을 잘할 수 있도록(남자친구와의 관계 묵상)
- 지금의 회사 잘 마무리 할 수 있도록
B
- 양육자로써 듣는 훈련 10주동안 잘 할 수 있도록
-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이해보다는 겸손한 환경으로 말씀으로 잘 해석할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