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주일설교
20205.05.04 주일예배 열왕기하 19:1~7 살아 계신 하나님
모든 때를 아름답게 하셔도 반드시 건지신다는 약속을 받았어도 억울한 일이 너무 많습니다. 어떤 심리학자들은 억울함을 정의가 무너질때 생기는 분노라고 설명합니다. 도덕적 판단에서 비롯되는 분노가 억울함이라 합니다. 억울함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내가 옳다는확신에서 나옵니다. 억울함이 커질수록 회개가 안됩니다. 도덕적 분노에 사로잡히니 그는 나보다 옳다는 건 더 억울한 일입니다.
히스기야는 굉장히 억울한 상황에 있는데, 하나님 앞에 나아갑니다. 하나님 만이 모든 문제에 답이기 때문입니다. 억울할 때, 살아계신 하나님의 응답을 받으려면?
1.회개하며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야 합니다.
1절
랍사게의 말은 히스기야의 마음을 칼처럼 찌릅니다. 말을 듣자마자 히스기야는 자신의 옷을 찢습니다. 물론 히스기야가 할 수 있는게 없기에 깊은 무력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보다 더 히스기야는 억울한 감정을 느꼈을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과감한 종교개혁, 산당철폐, 기득권층의 반발에 맞썸, 앗수르에 독립선언 등 엄청난 개혁을 했고,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에 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하나님만 의지했는데, 결국 앗수르에 포위되어 망하게 생겼고, 조롱하는 말도 듣습니다. 오늘날 말하면 교회 잘다녔는데, 망했고, 사람들이 놀리기까지 합니다.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그것이 영적전쟁임을 선포하고 이 영적 전쟁에서 악을 악으로 갚지 않기 위해 기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방법으로 적용하는 것이 예수믿는 사람의 방법 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내가 응징하려고 합니다. 분하고 억울한 생각이 드는 것 자체가 내가 전쟁을 하겠다는 표시입니다.
내가 이런 일 당할 사람이 아닌데 라는 생각을 하면 겉으로는 왕복을 찢어도 속으로는 새 왕복을 입겠다고 난리를 피는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관점을 바꿔 옷을 찢고, 굵은 베옷을 입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갑니다. 억울함과 멸시 속에서 왕으로 먼저 회개했다는 뜻입니다.
응답받는 기도는 회개하는 기도 입니다. 너무나 억울한 사건 가운데서도 여호와의 전에 나오는 것, 여전한 방식으로 예배의 자리에 붙어가는 것 이것이 회개하며 여호와의 전으로 들어가는 순종입니다. 회개를 할 때, 살아계신 하나님의 응답을 받을 수 있습니다.
-너무 억울해서 옷을 찢고 싶은 사건이 있습니까? 억울하게 만드는 말이 들립니까?
-후회하는 일, 기대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굵은 베를 두르며 회개합니까? 화려한 새 왕복을 찾아서 방황합니까?
-이번 주 여호와의 전에 어떻게 들어가겠습니까?
히스기야가 남북전쟁의 링컨 같습니다. 노예해방을 외치지만 링컨의 말에 반대는 안하지만 교묘하게 반대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링컨은 건국 이후 하나님 앞에 제일 큰 죄가 노예제도라고 합니다. 이후 노예해방전쟁이 끝나고 5일 후 성 금요일에 흑인에게 국민권을 부여해야 한다 하자 남부출신 부스가 충동적으로 링컨을 암살했다 합니다. 링컨을 하나님이 만세 전부터 준비 시키셨습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노예제도를 반대하는 링컨을 반대 합니다. 그리고 4년여 동안이나 같은 민족들이 싸워서 40여만명 가까이 죽어갑니다. 너무 심각합니다. 끝내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때 링컨은 하나님이 우리의 피로써 책임을 물으신다면 노예로 인해 번돈은 다 없어져도 된다고 말합니다. 링컨이 히스기야처럼 회개한 것입니다. 정권을 위해서가 아니라, 억압받는 노예의 해방을 위해 전쟁을 4년이나 한것은 사람으로써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떤 것은 반대해도 내가 밀고 나가야 하는게 있고, 찬성해도 안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한 사람의 결정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우리도 각자 집안에, 교회에, 우리나라에 구속사의 가치관으로 자기 죄를 볼 수 있는 그 한사람을 보내주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2.이 남아 있는 자들과 함께 기도해야 합니다.
2절
히스기야의 태도가 지도자들에게 옮겨 갑니다. 자진해서 굵은 베를 입은게 아니고, 입혔다고 합니다. 저의 회개가 여러분과 상관없는 회개가 아니길 바랍니다. 그리고 이들을 이사야에게 보냅니다. 북왕국의 왕들은 선지자들을 배척해서 망하지만 남왕국 히스기야는 선지자에게 예를 갖춰서 보냅니다. 어떤 왕들과 비교 할 수 없는 겸손입니다. 히스기야는 선지자를 불러오는 것도 감당 못하기에 찾아갑니다. 히스기야의 대표 대리자 들이 이사야에게 갑니다.
3절
이사야가 히스기야에게 전한 말은 능욕의 날이라고 합니다. 고난의 시기에 포위당하고, 원조도 없다고 하며 하나님이 징벌을 내리셨다고 말합니다. 앗수르가 쳐들어 온것은 유다의 죄가 맞습니다. 근원을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멀쩡한 소가 주인이 밭 매자 하면 따라갈 소가 없습니다. 통통 할수록 안따라 옵니다. 잘 날 수록 안따라 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멍에를 메게 하십니다. 오늘 이 사건이 우연히 일어난 일, 억울한 일이 아니고, 하나님이 꾸짖으시고 부끄럽게 하신 일이기에 잘 당하겠다는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줄에 안 메어 있으면 칼이 오는 것입니다.
잘 믿어 보고자 하지만 아무런 힘이 없고 산모와 아이 모두 위태 해졌다고 합니다. 주님 제가 힘이 없어요 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잘 믿어 보려 하는데, 왜 앗수르가 쳐들어 오나..합니다. 하나님은 나의 세상 세력을 끊고자 하는 계획이 있는데, 끊지 못하니 오늘 이런 사건이 왔다는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내 죄가 내 고난보다 크다는 것을 깨달으니, 나는 아무런 힘이 없어요 라고 고백을 합니다.
겉으로, 입으로는 고백하지만 진심의 고백은 아닐 수 있습니다. 육이 다 무너지는 고난을 통과하고 전적으로 무너진 사람이 진심의 고백을 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두 고백을 비교할 수 있나요?
4절
랍사게가 누구를 비방하나요? 살아계신 하나님을 비방 했다고 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익숙한 표현이지만 생각보다 성경에 많이 나오는 표현이 아닙니다. 역사서에 단 4번만 나오는데 2번은 다윗이 나머지는 히스기야가 사용 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은 다른 모든 신들과 구별되는 유일하신 주님이라는 뜻입니다. 나를 살피시고, 구원해가시는 하나님이 바로 살아계신 하나님 입니다.
사람들은 다 두려움에 떨며 절망하고 있는데, 이를 믿음의 눈으로 보는 사람이 다윗과 히스기야 입니다. 두려운 사건에서 영적인 눈을 뜨고 생각하면 살아계신 하나님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사랑할 수 밖에 없습니다.
내 전적 무능을 인정하고 할 수 있는것이 없다고 고백하는 것과위선의 차이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찾는것에서 드러납니다. 전적 무능을 깨닫고 인정하는 사람은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서 살기에 누구 앞에서나 어떤 상황에서나 여전한 방식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업습니다. 영적 진실성은 성품으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히스기야는 하나님 랍사게 말을 들으셨죠, 제가 얼마나 힘든지 아시겠죠? 랍세가나 산헤립을 죽여주세요 이런 기도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남은 자라면 위하여 기도해 주세요 합니다. 히스기야는 혹시 그의 말을 들으셨나요? 제 상황을 보고 계신가요? 라고 여쭐 수 밖에 없습니다. 믿음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무능한 내 자신에 대해 확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한순간도 나를 붙들어 주시지 않으면 넘어 질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넘어지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찾는 사람은 내가 중심일 수 없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찾는 사람은 오늘 히스기야 처럼 자기와 똑같이 베를 두른 지체들과 함께 기도합니다. 자기 정체성을 왕이 아닌 남아있는 자 들에게서 찾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나머지 인생인줄 알면 저절로 나머지 자들과 하나가 되지만 조금이라도 자기를 높이는 마음이 있으면 나머지 자들과 같음을 인정 못합니다.
겸손의 증거는 누구도 무시하지 않는 것입니다. 남은 자들중 하나가 되는 것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본성적으로 겸손하지 않습니다. 교만하고 겸손하지 못한 인성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억울한 사건을 주시는 것입니다. 낮아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겸손해 져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곁에 남은자 공동체가 있나요? 그 공동체만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최고의 통로입니다. 환란당하고 빚지고 마음이 원통한 지체들과 하나가 되어 기도할 때, 살아계신 하나님이 응답하실 줄 믿습니다.
-내가 무시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어떤 사람과 함께 하고 싶습니까?
-내게는 이 남아 있는 자들 즉 남은 자 공동체가 있습니까?
-그들과 함께 기도해야 할 제목은 무엇입니까?
중국의 정화와 콜럼버스는 같은 탐험을 했는데, 왜 결과물이 다를 까요? 정화는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라 생각하고, 콜럼버스는 자신이 변두리에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과학도 태양이 우주의 중심이라는 것을 인정할 때 부터 발전하기 시작했다 합니다.
정화가 300척의 배와 2만7천명의 선원을 데리고 30년을 탐험했지만 우리는 그를 모릅니다. 하지만 콜럼버스는 3척의 배와 90명은 선원으로 탐험을 하고, 그 이름을 기억합니다. 가장 큰 이유는 콜럼버스는 망망대해로 나가고, 정화는 해안선을 따라 항해 했다는 것입니다. 정화는 자기의 유익을 위해 간 것입니다.
3.말씀을 믿고 두려워하지 않아야 합니다.
5절
히스기야가 보낸 대표들이 이와같이 이사야에게 나아갑니다. 히스기야와 대표들, 남아있는 모든 사람들이 한 공동체가 되어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섰다는 것입니다. 어떤 왕은 심복들에게 죽임을 당합니다. 성전 수리를 40년이나 했는데도, 명분이 좋은 일을 했음해도 심복들에게 죽는 것입니다. 내가 일평생 교회 잘나가고, 선교 하고 하면 모하나요? 후세들이 악한 왕으로 꼽는데 말입니다. 요아스는 아무리 잘해도 결국 스가랴 선지자를 돌로 쳐 죽입니다. 하지만 히스기야는 극진히 이사야를 높힙니다. 그러니 심복들도 이사야를 존경하며 나아갑니다. 나에게도 선지자에게, 내 모든 것을 대변해줄 심복이 있을까요? 우리에게는 지체라고 볼 수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에 오래 다녀도 지체가 없다고 하는데, 이는 다른 사람을 지체로 받아들이지 않는 다는 뜻입니다. 본인이 원해야 합니다. 혼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처럼 보여도 마지막에 아무것도 없을 수 있고, 세상 친구들에게 반역 당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심복이 나아가니 살아계신 하나님이 이사야를 통해 그들에게 응답하시는 것입니다.
6절
응답받는 기도는 그 하나하나의 과정이 중요합니다.
주님은 나를 모욕하는 말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 합니다. 하나님은 그 앗수르 사람들이 생각하고 말하는 것처럼 죽어있는 우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기에 다 아시고 들으십니다. 이혼하지 말라는 말을 들으면 결단하는 성도가 있고, 문을 박차고 나가는 성도가 있습니다. 주님은 이혼을 안하시길 원하십니다. 말씀에서 하지 말라고 하면 우리는 하지 말아야 합니다. 멍에를 잘 지고 있으라 하면 잘 지고 있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이 히스기야에게만 주는 것이 아닙니다. 나에게도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는데, 이 쉬운 것 같은 일이 쉽지가 않습니다. 왜 두려워하지 않아야 하나요? 살아계신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건때문에 두렵지만 더 두려운 것은 말 때문에 두렵습니다.
랍사게의 말처럼 위협과 조롱의 말을 들으면 어떻겠습니까? 하지만 살아계신 하나님이 두려워 말라고 합니다. 랍사게가 모욕한다고 모욕받는 하나님이 아니라 하십니다. 누가 무슨 말을 하는데, 마음이 흔들리는 연약이 있다면 아프거나 미성숙하거나 입니다. 누군가 나를 칭찬한다고, 욕한다고 내가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랍사게 처럼 대단한 사람이 욕을 하면 살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러지 말라고 하십니다.
7절
히브리어 성경을 보면 7절 맨 앞에 보라라는 말이 있습니다. 말때문에 두렵고 떨릴 때, 생각할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한 영을 주겠다는 것입니다. 진리의 영이 아니고, 거짓의 영입니다. 앗수르 왕이 자기 힘을 믿고 하나님 백성을 놀립니다. 그런데 이제 역전 되는 것입니다. 대단한 앗수르라도 소문하나 듣고 가서 살해당한다는 것입니다.
소문을 듣고 두려워하는 자는 그 속에 악한 영이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가라는 바울의 말씀도 맞는 말입니다. 여러분 안에는 이런 악한 영이 없길 바랍니다.
히스기야와 이사야가 한 영이기에 한 말씀을 듣고 처방이 나옵니다.
우리는 내가 듣고 싶은 말만 은혜 받았다고 합니다. 나를 불편하게 하는 말이 나오면 욕하는 것입니다. 쓴 처방은 내 처방을 안듣는 것이 너무나 당연합니다. 하지만 히스기야는 이사야의 말을 딱 알아 듣습니다. 그래서 성군이라고 합니다.
히스기야와 이사야는 각각 역할이 다르지만 함께 합니다. 링컨과 무디도 그랬습니다. 링컨은 선거에서 이기면 감사하고 떨어져도 감당할 수 있다 했습니다. 링컨이 대통령이 된 이유는 오직 노예 해방 이었기 때문에 남북전쟁이 끝나자 마자 데려가십니다. 사명을 감당하셨기 때문입니다.
앗수르 왕처럼 우리가 아무리 똑똑하고 강해도 소문 한마디에 죽을 수 있습니다. 가족의 문자 하나에 덜덜 떨 수 있습니다. 지나 보면 별일 아닌데, 그 순간에는 심각해 죽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의 외침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만 믿어야 합니다. 칭찬도 비난도 사람의 말은 우리를 변하게 하지 못합니다. 사람의 말은 능력이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이 있습니다. 반드시 이루어 집니다. 하나님의 말씀때문에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인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 나는 것입니다. 주님은 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매일 삶의 해답이 그날 본문 말씀에 있습니다.
오늘도 거짓 선지자의 말을 듣지 말라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듣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두려워하지 않아야 합니다.
-최근 어떤 소문에 마음이 흔들렸습니까? 어떤 비난이나 조롱의 말이 나를 두렵게 합니까?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담대히 인내하며 기다려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공동체 나눔
목장에 가기 싫다고 하십니다. 하늘의 언어로 정답만 말하는 것이 너무 힘들다 합니다. 목자님과 대화하기 싫다고 합니다. 이렇게 정죄하는 모습이 싫어서 부목자 모임에서 옷을 찢는 마음으로 나눔을 한다고 합니다. 그러자 초원님이 부목자 님이 두려움이 있자나요 그것이 두려움으로 외면하는 것이 아닌 직면해야 하는 일 같습니다. 부목자님 마음속에 두려움으로 위장된 마음이 더 무서운것 같습니다. 오늘 목사님이 사람은 바뀌지 않는다고, 부목자님 마음에 목자님과 아내를 정죄하는 마음이 있어요 합니다. 부목자님이 맞다고 내 모습이 목자님과 아내에게 똑같이 있으니 보기 싫은 것 같다고 합니다.
공동체에서 내가 처한 상황들을 그대로 드러낼 때, 두려워하지 말라고 처방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별 인생이 없다 생각하고, 사람을 우상삼지 말고, 말씀처럼 해석이 되는 여러분이 되길 바랍니다.
2.목장 나눔 장소 및 참석 인원
: 파리파게트 삼성카페점 / 목자, 부목자, 목원1,2(총 4명)
3.기도제목
A.
1. 이번 한주 큐티 말씀으로 하루 시작할 수 있도록
2. 말씀을 믿고 두려워하지 않도록
3. 신교제, 신결혼
B.
1. 허리 근육통이 나이지길
2. 회사 생활 적응되길
C.
1.이번달 카드값이 감당하기
힘들었는데 원장님이 도와주셔서 조금 마음의 짐이 덜어짐에 감사
2.절약하고 아끼는 생활을 잘할수있도록
D.
1.새신자 교육 받을때의 초심 유지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