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2. 29.
주일예배
본문: 열왕기하 15:27-38
제목: 보내어 치게 하셨더라
설교 말씀
지난 1년간 찾아온 손님 중에 기억에 남는 분이 계신가요?
사람일 수도, 사건일 수도 있습니다. 올해 거주할 처소를 세우리라는 표어대로 달려왔습니다.
대구 채플, 광주 채플을 세웠고 목세, 띵크트립을 하며 섬겼습니다. 곳곳에 가기도 초대받기도 했습니다.
그 곳에서 만난 영혼들 기억나시죠? 모든 사역이 한 분 한 분의 기도, 섬김, 후원을 받으신 성령의 선물인 줄 믿습니다.
손님 중에는 반가운 분, 불청객이 있습니다. 오늘 두 왕이 인생의 불청객을 마주했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어 치게 하신 심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심판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1. 내 멋대로 살면 불청객처럼 옵니다.
27-28절.
베가가 사마리아에서 20년을 다스렸는데, 연대기를 따라 계산해 보면, 실제로 통치한 시간은 8년인데, 왜 20년을 다스렸다고 했을까요? 여러 해석이 있는데, 문제인 12년을 해석해야 합니다. 12년은 므나헴, 브가히야가 다스린 햇수이기도 합니다. 므나헴은 살롬을 반역하고 왕이 됐는데, 살롬은 개혁의 아이콘이었습니다. 부패한 예후 왕조를 몰아냈습니다. 그런데 유효기간이 한 달 뿐이어서 약점 없이 화끈하게 타올랐던 영웅이 되었습니다. 므나헴은 자기 손으로 움켜쥐려는 욕심으로 앗수르에게 어마어마한 조공을 바치며 폭력과 돈으로 굴복하며 공포 정치를 했습니다. 살롬과 므나헴은 정반대였습니다. 이상주의자와 현실주의자, 명분을 내세운 선동가와 힘으로 제압한 무력가였습니다. 베가는 그 둘 밑에서 장관으로 있었는데, 옳고 그름이 가득했던 것 같습니다. 도덕감이 없는 므나헴을 인정하지 못했습니다. 그랬던 그가 죽고 아들이 왕이 되자 2년 만에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됐습니다.
우리가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서 너무 죽고 죽이는 장면을 봅니다. 그런데 놀라지 말아야 합니다.
감정이입이 돼서 옳고 그름의 버튼이 눌리면 상담이 안됩니다. 그래서 어떤 이야기를 들어도 객관적으로 보고 자기 죄를 보게 해야 이혼이 막아집니다. 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것은 일원론입니다.
베가가 왕이 되니 적폐 청산을 시작하면서 므나헴 왕조는 가짜라고 했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그 12년의 역사에 대한 역사 전쟁을 치르지 않았을까요? 역사를 정치적으로 해석, 이용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그러면서 변화의 확실한 증거로 선택한 것이 대 앗수르 정책이었습니다. 므나헴은 불의 손을 돈으로 사서 권력을 유지했습니다. 그런데 베가는 왕이 되자마자 이스라엘과 원수인 아람과 손을 잡았습니다. 공공의 적 앗수르에 대항하기 위해 아람과 동맹을 맺었습니다.
베가는 브가히야의 경호대장을 할 만큼 신임을 얻었는데, 속으로 엄청난 반역을 꿈꾸고 있었습니다. 그런 뜻이 아니었다고 했을 수 있지만 누릴 것을 다 누리며 질서를 인정하지 않는 모순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제멋대로 살았다면 장관이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베가는 드러나지 않는 제멋대로가 있었습니다. 겉으로 믿음직하니 므나헴부터 브가히야까지 경호대장을 했지만, 속으로는 제멋대로 생각, 판단, 예상하는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니 이상한 명분에 사로잡혀 나라 전체를 뒤집어 엎고 있습니다. 오직 자기가 옳다 확신하는대로 움직입니다.
29절.
그 결과는 반란을 일으키는 것으로 기록됩니다. 그러니 앗수르가 군대를 일으켜 정벌했다고 합니다. 베가 입장에서는 자기가 브가히야를 죽여 왕이 됐는데, 디글랏 블레셀(앗수르 왕)이 쳐들어왔습니다. 1차 침공에서 조공을 바쳤는데, 2차 침공이 일어났습니다. 그렇게 나라의 5년 예산을 받아먹고 또 쳐들어왔습니다.
베가가 준비한다고 아람과 동맹해서 막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막을 길이 없었습니다. 항상 원칙대로 하지 않고 일어난 사건은 내가 준비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북쪽 납달리 영토를 뺏기고 백성들이 사로잡혀갑니다. 남유다와 북이스라엘 역사상 첫 포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앗수르라는 불청객은 하나님께서 보낸 것입니다. 우리는 창세기부터 역사를 읽었기에 삶의 결론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역사의식, 구속사 의식도 없으면 사건을 해석할 수 없습니다. 말라기처럼 하나님이 계시면 이럴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님이 보내신 사건입니다.
그런데 북이스라엘의 사건에 하나님이 보내셨다는 말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침묵하신 심판의 사건입니다. 북이스라엘은 엘리야, 엘리사를 보내셔서 부르셨지만 듣지 않았기에 심판하십니다. 이제 북이스라엘은 왕이 한 명 남았습니다.
내 멋대로 해야 하니까 다른 사람의 말, 선지자의 말도 듣지 않고 묻지도 않습니다. 그 결과는 내 멋대로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사로잡히고 옮겨지는 것입니다. 사람은 정말 믿음의 대상이 아닙니다. 이것이 북이스라엘 왕들이 믿음의 대상이 아님을 극명히 보여줍니다. 서로 믿는 모습을 보이지만 결국 다 죽입니다.
2024년 마지막 주일, 우리 자신을 돌아봐야 하겠습니다. 한 해 얼마나 잘 묻고 들었는지 생각해봐야 하겠습니다.
적) 인정할 수 없는 윗질서가 있습니까?
내 멋대로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대놓고 내멋대로 입니까 뒤에서 내멋대로 입니까? 내 삶의 불청객은 누구입니까?
내 멋대로 한 일의 결론임이 인정됩니까? 내 권세로 지우고 싶은 일은 무엇입니까?
성경적 가치관이 없으면 구하는 것의 실체를 알지 못하고 내 멋대로 하게 됩니다. 사람은 욕심이 있으면 공동체에 묻지 않습니다. 불신교제도 마찬가지입니다. 너무 좋아서 그렇습니다. 그래도 믿음으로 하는 행동에 하나님이 책임지실 일이 있습니다.
2. 좋은 조건이라도 막을 수 없습니다.
30-31절.
베가가 적폐청산을 하며 추진한 정책의 결론은 납달리 영토 상실이었습니다. 은을 바치고 갈릴리 호수의 가장 비옥한 땅을 뺏겼습니다. 그러니 호세아가 베가를 치고 왕위에 오릅니다. 왕조가 또 바뀌었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 BC722년에 앗수르에 나라가 뺏깁니다.
이것이 하나님 말씀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행하는 북이스라엘의 실상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봐야 하는데 실체를 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굴며 합리화를 반복합니다. 이제 완전한 멸망 문 앞에 섰습니다. 북이스라엘은 인본주의의 심볼입니다. 여로보암의 죄를 떠난 사람이 1명도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따라 우상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정치를 잘 해서 상아궁에 사니 한 명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신본주의 말씀이 들리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에 피로 값을 치르고 예수가 들어왔는데, 요즘은 아무도 듣지 않습니다. 사울이 다윗과 비교하는 말을 넘어가지 못합니다. 다윗은 죄가 없는데, 이 한 마디에 넘어가지 못합니다. 단어 하나에 집착하면 안됩니다.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적인 가치관, 구속사적으로 해석을 잘 해야 합니다. 말씀 맡은 자로 나가서 성경적인 가치관으로 해석해줘야 해결이 되고 구원으로 역사가 일어납니다.
베가가 제멋대로 심판을 향해 돌진할 때, 남유다는 어땠을까요?
32-34절.
웃시야가 인생 마짐막 14년을 격리되어 나병환자로 살았는데, 아들 요담이 왕좌를 지킵니다. 그리고 아버지 사후 16년을 통치했습니다. 유다 왕들은 어머니 이름을 밝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루사라는 이름은 상속자입니다. 사둑 사람이라고 하는데, 다윗과 솔로몬 시대 제사장의 가문이었습니다. 다윗이 아히멜렉에게 찾아가서 거짓말을 하고 제사장 85명을 죽였을 때 나온 제사장입니다. 그 대단한 사둑이 예수님 시대까지 가면 인정을 받다가 사두개인이 됩니다.
요담은 가정교육을 잘 받아서 성품도 좋았을 것입니다. 웃시야의 행위대로 정직히 행했습니다. 베가는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했지만 요담은 정직했습니다. 여로보암의 길이 아니라 바른 길로 행했습니다. 이스라엘은 백성 앞에서 공개적으로 쳐죽임 당한 스가랴부터 왕을 죽인 베가까지 있고, 호세아까지 반역하는 왕들 뿐인데 이런 사람들만 보다가 다윗 후손 요담을 보니까 마음이 편해지지 않나요?
요담은 좋은 가문에서 태어나 잘 자랐습니다. 이런 사람을 며느리, 사위 삼고 싶으시죠? 조건이 좋은 사람을 식구로 맞이하고 싶으실꺼에요. 이런 사람을 만나서 결혼하고 싶습니다. 좋은 조건을 싫어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너무 당연한 이유입니다. 좋은 조건이 방패, 피난처, 요새가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내 부족함과 연약함을 조건이 가려준다고 생각합니다. 이 시대에 돈 중독보다 무서운 중독이 없습니다. 돈을 위해 조건을 세우려고 열심히 살아갑니다.
그런데 좋은 조건이 끝이 아닙니다. 좀 더 좋은 것은 정직히 행했기 때문에 입니다. 잘 자라서 바르게 살았기 때문에 모셔오면 좋겠고, 복을 많이 받았다 (=돈을 많이 벌었더라) 라고 끝나면 좋겠죠?
정직히 행하였으나로 끝납니다. 바르게 잘 살았지만, 반전이 있습니다.
(일어나실 때 크리팀 입장)
믿음 좋고 큐티 잘하고 목장 잘 가는 청년끼리 만나는 것이 로또입니다. 이렇게 해도 안오는 사람이 한둘이 아닙니다. 므나헴, 브가히야처럼 교회에 오지 않습니다.
조건이 나쁘고 전망이 밝은 것이 인생을 정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가진 조건으로는 결단코 심판을 막고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이 모습 이대로 있으리란 것을 알지 못합니다. 새해에는 조건 타령하지 말고 하나님이 주신 것이 합당하신 줄 믿고 한계를 통해 구원을 이뤄가실 하나님에게 소망 두는 우리가 되길 바랍니다.
적) 불평하는 조건, 부러워하는 조건은 무엇입니까?
나는, 내 자녀는 이렇게 되어야 해 하는 고정관념은 무엇입니까?
교회는 사람이 모여 유형의 성전이 되고 모이는 사람만큼 장소를 넓혀가야 합니다. 그런데 모든 정성을 모아서 엄청난 교회를 대구, 광주에 헌납했습니다. 갑자기 성전이 하늘에서 뚝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서울을 오고가며 들었던 것에서 살아난 것이 있다면 기득권을 주장해서는 안됩니다.
3. 다시 회개로 부르시는 사랑입니다.
35-36절.
좋은 조건, 정직한 행실로 포장된 요담이지만, 그러나의 반전은 산당을 제거하지 않음입니다. 안타까운 뜻으로 오직 산당을 제거하지 않았습니다. 반전의 한 문제가 99% 잘 해놓고 틀렸는데, 틀린 것이 100점짜리였습니다. 입시에서도 1점 때문에 당락이 바뀌듯, 유다 왕들에게 산당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거의 모든 유다의 후손들이 산당 문제에서 다 틀렸습니다. 악의 평범성으로 된 기복주의로 백성을 우상숭배의 길로 인도했습니다.
요담은 이 죄를 보는 것이 너무 어려웠습니다. 성전 윗문을 건축했다고 하는데, 역대하 27장을 보면 건축왕입니다. 성벽, 유다 산중의 성읍, 견고한 진영, 망대, 대규모 건축 산업을 일으켜 경제가 부흥했습니다. 웃시야가 나병으로 누워 있을 때 암몬이 조공을 끊자 공격해서 조공도 받아냈습니다.
솔로몬 이후 이렇게 이긴 왕이 거의 없었습니다. 굉장한 업적을 세웠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평가합니다.
역대하 27:6, 점점 강하여졌더라.
우리가 좋아하는 정직히 행한 결과로 강해졌다는 결과를 얻었습니다. 요담이 하나님 앞에서 정직히 행함에 대한 상을 받았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것만 보면 흠 잡을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행실과 성공, 모두 갖춘 사람인데, 끝까지 가봐야 압니다.
성경은 어디에나 구속사가 있습니다.
역대하 27:2. 정직히 행하였으나 여호와의 성전에는 들어가지 않았고 백성은 여전히 부패하였더라.
성전에 들어가지 않았다는 것은 예배를 드리지 않고 하나님을 간절히 찾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요담은 이해해줄 수 있는 상처가 있습니다. 아버지가 예배 드리다 나병이 걸려서 성전에서 쫓겨났습니다. 이것이 트라우마가 됐습니다. 하지만 트라우마에 갇혀 있으면 나아갈 수 없습니다.
트라우마보다 심각한 문제는 아버지의 심판을 해석하지 못함입니다. 심판 받을 수 밖에 없는 아버지의 교만을 봐야 하는데, 돌이키시길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야 하는데, 거기서 받은 상처에 갇혀 생각하지 않으려 했고 성전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성전 윗문을 아무리 건축해도, 구세군에 돈을 내도 성전에 들어가지 않으면 헛됨입니다. 핵심을 놓치니 자연스럽게 백성들도 예배를 소홀히 하고 부패한 상태에 머무릅니다.
요담이 본을 보이고 바르게 걸어온 것은 좋았으나 말씀을 사모하면서 양육해야 하는데, 안믿는 자들에게 본을 보이고 가야 하지만, 믿는 자들에게는 영향력이 미치는 범위 안에서 말씀으로 양육을 행해야 합니다. 그런데 요담은 혼자 열심을 냈습니다.
37-38절.
베가에게는 앗수르 왕이 불청객으로, 요담에게는 베가와 아람왕 르신이 쳐들어 왔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베가와 르신이 왔다 하지 않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들을 보내어 치게 하셨더라 고 합니다. 북이스라엘하고 남유다는 대적이 다릅니다. 성령이 임하지 않으면 이것을 차별하신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요담, 유다 백성에게 보내신 손님입니다. 불은 그들이 그냥 왔는데, 요담은 여호와께서 보내 치신 사건이라고 합니다. 요담이 다윗성에 장사되기 때문입니다. 다윗과 예수 그리스도로 이어지는 사건, 즉 구원의 사건입니다.
얌전한 손님이 아니라 때리는 손님이고 하나님께서 하게 하신 일입니다. 억울할 일도 슬퍼할 일도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왜 이런 무서운 불청객을 보내실까요?
하나님께서 복을 주셨을 때도 하나님을 찾지 않은 그 때, 그래서 죄책감을 선행으로 가리는 때에 하나님께서 불청객을 보내어 치게 하십니다. 이 사건이 망하는 사건이었다면 망하게만 하셨을 것이지만, 사건을 보낼 때 말씀도 보내셨습니다. 미가 선지자, 호세아 선지자 등 셋이나 보내셔서 사건을 해석하라고, 구원의 사건이라고 해석하기 위해서, 회개하고 돌아오라고 쳐서 깨우시는 사건임을 알게 하시기 위해 말씀을 주셨습니다.
트라우마에서 나와 예배의 자리로 나아오고 상처만 보지 말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손을 잡고 말씀에 귀 기울여 들으라고 외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릴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사랑하지 않으시면 왜 사건을 보내시겠습니까.
무서운 불청객을 보내어 치게 하십니다. 이런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것이 택자의 특권입니다. 심판으로 끝나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특권 받은 택자인 줄 믿습니다.
올 한해 불청객을 감당하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적) 나를 제한하는 트라우마는 무엇입니까 트라우마 때문에 다가가지 못하는 사명의 자리는 어디입니까?
불청객을 보내서라도 나를 돌이키시려는 주님의 사랑을 힘입어시작할 일은 무엇입니까?
구원의 시각으로 한 가정을 살릴 수 있어서 나라도 살릴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이 살아나면 가정이 살아나고 교회가 살아나고 나라가 살아납니다. 말씀 해석이 없어서 북이스라엘이 계속 반역합니다.
A
거주할 처소 세워주시길
상견례 아버지 구원의 자리가 될수있도록 기도하기
B
내년 목자의 자리 잘 준비할 수 있도록
학생의 자리에 잘 순종할 수 있도록
신교제 신결혼
C
취업을 내 뜻보다 하나님의 뜻을 먼저 구하기
어지러운 나라를 바른 길로 인도하소서
D
내년도 목장과 교회에 잘 붙어갈 수 있기를
부디 안주할 취업처와 처소를 점지하여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