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201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아가노라
사무엘상 17:41-54
이태근 목사님
담임 목사님 출타 중에 광주로 파송을 받게 된 이태근 목사입니다. 우리들교회 처음 온 것이 2007년 겨울이었는데 만으로 17년이 되었습니다. 당시 초등학교 1학년이었던 아들은 세 아이의 아빠가 되었고, 갓 태어난 딸은 내년에 고3이 됩니다. 세월의 흔적이 저에게만 있었던 것은 아닐테고 함께 했던 목장 식구들, 함께 했던 모든 성도님들도 추억 속에 세월의 흔적들이 많이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저보다 먼저 오신 분들도 있을 것 같고, 앞서거니 뒷서거니 따라오신 분들도 있을텐데 광주로 파송 받기에 앞서서 다시 휘문 채플에 와서 말씀을 전하게 되니 왠지 마음이 뭉클해지는 것 같습니다. 보통 우리들교회 집사님들은 처음 들었던 말씀을 오래오래 기억하시는 경우가 참 많은 것 같아요. 저도 우리들교회 와서 처음 들었던 말씀이 '문짝 다는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그때는 그 말씀이 그 말씀이 어떤 의미인지 다 알지는 못했을텐데 그래도 그냥 그 말씀이 왠지 좋았고, 제 마음과 뇌리에 깊이 박혀 있는 것 같습니다. 잠깐 기도하고 오늘 주신 말씀 듣겠습니다.
오늘 큐티인 본문은 다윗과 골리앗의 이야기입니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 골리앗을 물맷돌 하나로 제압하고 그의 칼로 그의 머리를 베었습니다. 오늘 큐티인 본문으로 말씀을 전하려고 하니 저에게는 살짝 조금 안 맞는 본문처럼 느껴지기도 했어요. 다윗처럼 살아온 인생이 아니기에, 또 그렇다고 골리앗은 되기 싫고,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지만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잃어버리고 자기의 영광을 추구했던 사울의 모습이 나의 모습이 아니었는가 지난 한 주 동안 많은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을 주신 말씀에도 다 이유가 있을텐데 함께 THINK하며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1.수치와 조롱을 잘 받아야 합니다.
41 블레셋 사람이 방패 든 사람을 앞세우고 다윗에게로 점점 가까이 나아가니라 42 그 블레셋 사람이 둘러보다가 다윗을 보고 업신여기니 이는 그가 젊고 붉고 용모가 아름다움이라
-> 41, 42절 말씀을 봅니다.
여기서 블레셋 사람은 골리앗을 가리킵니다. 누구나 다는 이름, 유명한 이름 골리앗이 있는데 오늘 큐티인 본문은 구지 그의 이름을 한 번도 불러주지 않고 그저 블레셋 사람이라고만 칭하고 있습니다. 블레셋 사람이 방패 든 사람을 앞세우고 나왔다는 것은 블레셋 사람 골리앗도 지금 나름 긴장을 하고 있다는 뜻이에요. 그런데 사울과 이스라엘 진영은 그러한 골리앗 때문에 지난 40여일 동안 수치와 조롱을 당하고 있습니다. 물론 수치와 조롱은 누구나 다 당할 수 있죠. 하지만 수치와 조롱을 잘 감당하려면 내공이 필요한데, 내공이 없는 사람은 한마디에 주눅이 들거나, 또는 벌벌 떨거나 풀이 죽기 마련입니다. 학벌과 얼굴이 예쁘다고 자존감이 높은 것도 아니더라고요. 목장에서 똑똑하신 분들을 참 많이 봤는데 의외로 똑똑한 분들 중에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는 분들도 많았습니다. 똑똑한 분들은 똑똑한 분들과 경쟁을 해야 하기 때문에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 때가 많고, 또 목장에 와서는 찌질한 사람들의 나눔을 들어며 무시가 될 수가 있는데 열등감과 교만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교만한 사람은 열등감을 가질 수 밖에 없습니다. 블레셋 사람 골리앗도 다윗을 보고 업신 여기니 이는 그가 젊고 붉고 용모가 아름다웠다고 합니다. 이 말은 다윗의 용모를 칭찬하는 말이 아니예요. 자기가 보기에는 미소년처럼 가소로워 보였다는 의미입니다. UFC 격투기를 보면 하나같이 무섭거나 날쌔거나 근육질로 다듬어진 몸매를 가지고 있는데, 아무리 봐도 다윗은 여리여리한 미소년처럼 보였다는 의미입니다. 지피지기면 백전불패라고 했는데 골리앗은 왜 다윗을 우습게 보았을까요?
43 블레셋 사람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가 나를 개로 여기고 막대기를 가지고 내게 나아왔느냐 하고 그의 신들의 이름으로 다윗을 저주하고 44 그 블레셋 사람이 또 다윗에게 이르되 내게로 오라 내가 네 살을 공중의 새들과 들짐승들에게 주리라 하는지라
-> 43, 44절 말씀을 봅니다.
블레셋 사람 골리앗이 처음에는 방패 든 자를 앞세우고 다윗과의 거리를 조금씩 조금씩 좁히며 긴장하는 마음으로 접근을 한 것 같아요. 그런데 지금 골리앗은 무장 해제가 된 상태입니다. 방패든 자가 옆에 서 있고 허리에 칼을 찼지만 막대기를 들고 있는 어린 소년을 보는 순간 그냥 무장 해제가 되었어요. 다윗이 너무 가소롭게 보이는 것입니다. 구지 칼을 뽑아 벨 필요가 없게 된 것이죠. 메뚜기 한 마리를 잡겠다고 칼을 들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는 말도 있는 것처럼 다윗은 미리 준비한 물맷돌을 주머니에 숨기고 손에는 막대기를 들었습니다. 골리앗의 교만함을 부추기기 위한 다윗의 나름 고도의 전술입니다. 막대기로 칼을 든 골리앗과 맞서서 싸우겠다는 것이 아니예요. 그러기 위해서 막대기를 든 것이 아닙니다. 다윗은 골리앗이 생각하는 것처럼 무모한 사람이 아닙니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허파에 바람이 들어가서 큰 소리부터 치는 사람이 아닙니다. 사울과 이스라엘 백성이 골리앗 때문에 40일을 벌벌 떨고 있을 때 다윗은 사울에게 이렇게 찾아가서 말했습니다. '저는 목동입니다. 저는 아버지의 양을 지키는 자인데 사자나 곰이 와서 양의 새끼를 물어가면 저는 끝까지 쫓아가서 그것을 제압하고 그 입에서 양의 새끼를 구출해내고 사자와 곰이 나를 해하고자 덤벼들 때 저는 그 수염을 부여잡고 그 짐승을 쳐 죽었습니다.' 다윗은 골리앗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 용모가 붉고 아름다운 미소년처럼 자라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양을 지키며 목동으로 산전, 수전, 공중전을 다 겪으면서 자랐습니다. 목장에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누구의 말에는 전적으로 신뢰가 되지만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고 '있으면 먹고 없으면 금식하고 죽으면 천국 가자.'고 아무리 멋있게 선포를 할지라도 누가 하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마음을 뜨겁게 달구어 내기도 하지만 누가 하면 속으로 '본인이나 좀 잘 하세요.' 이런 말들이 막 입 밖으로 나오려고 할 때도 있습니다. 제가 목사님을 흉내낸다고 제 말에 힘과 능력이 생기겠습니까? 그래서 처방은 어록으로 하는 게 아니고 나의 부끄러운 죄를 먼저 회개하며 애통한 마음으로 나아가거나 십자가를 진 경험으로 나아가는 방법 밖에는 없는 것 같습니다. 적용질문을 드립니다.
[적용] 나는 수치와 조롱을 잘 받아내고 있습니까? 말 한마디에 부들부들 떨거나, 풀이 죽어있지는 않습니까?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고 하셨는데, 나는 어떤 싸움을 하고 있습니까?
저도 지난 17년 간을 돌이켜보니 스쳐지나가는 사건들이 참 많더라고요. 요즘도 그렇지만 그때에도 사역자가 처음 들어오면 우리들교회 평신도 사역자에게 양육을 받았습니다. 저도 그때 두 분의 전도사님과 한 분의 집사님께 양육을 받았는데 저를 양육해주셨던 한 집사님이 담임 목사님과 함께 모임하는 시간에 이런 얘기를 하시는 거예요. '목사님에 대한 주의의 평가 어떤 줄 아느냐? 얼굴이 항상 굳어 있고, 인사를 해도 인사를 받지 않고, 셋째.' 뭐라뭐라하셨는데 제가 정신이 혼미해져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담임 목사님 앞에서 그런 얘기를 들으니까 더 얼굴이 화끈거리고 너무 부끄럽고 속된 말로 막 쪽도 팔리고, 그런데 이제 그렇게 만약 끝났으면 오늘 이 자리에 없었을텐데 그래도 이야기를 꽤 오랫동안 마음에 간직하면서 먼저 인사도 하고, 제가 인사를 안 받았다기 보다는 좀 낯가림이 심해요. 그래서 잘 사람 얼굴을 똑바로 못 쳐다보니까 그러기도 했었는데 일부러 이렇게 인사도 먼저 하고, 또 얼굴도 한 번씩 쳐다보고. 특별히 그 집사님과 식사를 할 때면 그 분이 알지 모르겠지만 항상 제가 먼저 존경하는 마음으로 물도 떠다 드리면서 훈련과 양육의 때를 보냈던 기억이 있습니다.
2.칼과 창을 내려놔야 합니다.
45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 45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블레셋 사람 골리앗은 칼과 창으로 나왔지만 다윗은 만군의 여호와 이름으로 나아갑니다. 이처럼 누구의 이름으로 나아가냐가 참 중요해요. 주의 일을 하면서도 우리가 나의 이름을 앞세울 때가 많습니다. 연말에 목장 개편을 하면서도 항상 민감하고 조심스러운 것은 서로의 이름을 비교하며 누가 목자가 되고 누가 마을지기가 먼저 되었는지 나의 이름을 인정해주지 않는 것 같아서 혹 마음이 불편한 적은 없었습니까? 목사인 저도 그랬습니다. 제가 17년 전 처음 우리들교회에 왔을 때 할 줄 아는 것이 정말 아무것도 없었어요. 제가 이 자리에서 겸손하게 말하려고 그러는 것이 아니고 객관적으로 볼 때 팩트가 그랬어요. 아는 사람도 없고, 돌아가는 상황도 모르고, 지금처럼 목사님들이 많아서 함께 묻어갈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제가 성격이 원만하고 그래서 이렇게 잘 어울리지도 못했습니다. 세월이 약이라고 해야 될 지 시간이 지나니 조금씩 일도 맡겨주시고 직분도 생기다보니 사울처럼 겸손하게 시작한 것 같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금세 여호와를 위한 전쟁이 아니라 나를 위한 전쟁 기념비를 세우려고 하다보니 본의 아니게 여러 번의 치리를 받게 되었습니다. 목자 모임을 하다가 첫번째 치리를 받았고, 다음 세대 컨퍼런스를 준비하다가 두번째, 심판으로 수요 예배 설교하고 난 후에 세번째, 그리고 몇 년 전 성탄절 행사를 마치고 난 뒤 네번째 치리를 받았습니다. 뭔가 제가 대충대충 해서 치리를 받았다기 보다는 칼을 들고 창을 높이 세우며 남들보다 뭔가 다른, 조금 색다른, 뭔가 새로운 '이태근 목사가 하니 뭐가 좀 다르네.' 그 말 듣고 싶어서 나름 열심히 준비했는데 상급으로 칭찬이 아닌 치리를 받았습니다. 오늘 큐티인 본문은 왜 골리앗이라고 하는 유명한 이름을 놔두고 그를 단지 블레셋 사람이라고 반복해서 말할까요? 주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이 바로 나의 이름으로 치르는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큐티인 본문에는 골리앗의 이름도 그들이 따르던 신들의 이름 조차도 일부러 익명으로 처리를 하고 있어요. 블레셋 사람들이 섬기고 있던 대표적인 신은 우리가 잘 알죠. 다곤 신상인데 사무엘상 5장 말씀에 보면 블레셋 사람들이 빼앗은 언약궤를 다곤 신상 앞에 갖다놓았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다곤 신상의 목과 손이 부러져서 언약궤 앞에 엎드러진 것처럼 지금 골리앗의 형국이 그 뒤를 열심히 따라가고 있습니다.
46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목을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를 오늘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47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 46, 47절 말씀을 봅니다.
다윗의 신앙 고백은 참 언제 들어도 부러운 것 같아요. 어린 다윗은 어디에서 이런 확신과 담대함이 나오는 걸까요? 허파에 바람이 들어갔을까요? 아니면 세상물정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걸까요? 여호와의 구원하심은 칼과 창에 있지 않다고 하셨는데 저는 목회자로 살아가는 것이 참 부담스럽고 '언제 이 짐을 내려놓을 수 있을까?' 우리들교회 와서도 한참이나 한쪽 눈이 터지기 전까지 쓸데 없는 생각을 참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제가 목사의 직분을 가볍게, 경홀히 여겼다기 보다는 목사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기에 능력도 있고 지혜와 지식도 있고, 또 머리도 똑똑하고 모든 것을 두루두루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을 했는데 저는 그렇지 않은 것 같아서, 제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는 것 같아서 마음이 항상 힘들고 불편했습니다. 하지만 겸손한 것처럼 보이는 제 모습이 실상은 내 손에 칼과 창이 없기에 골리앗 앞에서 벌벌 떨고 있는 사울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깨닳기 까지는 오랜 시간이 아니고 참 오랜 세월이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성도님들은 어떻습니까? 손에 보이는 학벌과 돈이 없어서 불안하지는 않습니까? 이 세상을 이기고 이기기 위해서 나에게 꼭 필요한 칼과 창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예수님은 마태복음 26장에서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52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53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54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하시더라 무리들을 향해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55 그 때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칼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내가 날마다 성전에 앉아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56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적용질문을 드립니다.
[적용] 내가 내려놓아야 할 칼과 창은 무엇입니까? 주의 일을 하면서도 내 이름을 앞세우고 있지는 않습니까? 때로는 다윗처럼, 때로는 주님처럼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은 어디입니까?
3.갈고 닦은 물매돌이 있어야 합니다.
48 블레셋 사람이 일어나 다윗에게로 마주 가까이 올 때에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향하여 빨리 달리며 49 손을 주머니에 넣어 돌을 가지고 물매로 던져 블레셋 사람의 이마를 치매 돌이 그의 이마에 박히니 땅에 엎드러지니라
-> 48, 49절을 보겠습니다.
찰나의 순간에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다윗이 던진 물맷돌이 골리앗의 이마에 박히는 순간 거대한 다곤 신상이 땅바닥에 엎드러진 것처럼 거인 골리앗도 쿵하고 뿌연 먼지를 날리며 땅에 고꾸라지고 말았습니다. 온 몸을 갑옷으로 칭칭 감고 있습니다. 머리에는 놋 투구를 쓰고, 또 다리에는 각반을 차고, 어깨 사이에는 놋 단창을 메고, 그 앞에는 방패 든 자도 있었는데 골리앗은 칼집에서 칼을 한 번도 빼어보지 못한 채 속수무책 젊고 붉고 용모가 아름다운 다윗에게 일격을 당했습니다. 담임 목사님 책에 보면 이 부분을 짧게 해석해주셨는데 목사님이 살아오신 인생을 우리가 너무 잘 알기에 짧지만 임팩트 있게 다가오는 한 문장이 있었습니다. '다윗이 한 번에 승리를 했습니다. 칼이 아니라 물매로 이겼습니다. 성경은 그 이야기를 자꾸 반복해서 얘기합니다. 저도 칼이 아니라 걸레질로 이겼습니다. 집순이로 이겼습니다. 하나님은 설교 때마다 이 얘기를 반복하게 하십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본문을 읽으면서 걸레질을 떠올리기 보다는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아마 이런 성구가 먼저 떠오르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기적을 기대하며 전쟁터에 나간 것이 아닙니다. 골리앗은 다윗을 보며 젊고 붉고 용모가 아름답다고 세상 물정을 하나도 모르는 어린 아이처럼 취급했지만 다윗은 골리앗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두려운 마음을 속으로 감춘 것이 아니라 정말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골리앗처럼 상대방을 얕잡아보지도 않았어요. 교만한 자의 최대 약점은 방심이기에 다윗은 보란듯이 막대기를 손에 들고 골리앗 앞에 섰습니다. 골리앗의 방심으로 이어졌고 골리앗은 다윗이 표적으로 삼기에 딱 좋은 먹잇감이 되어 있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골리앗을 무찔렀다는 것도 은혜가 되겠지만 다윗이 평소 실력으로 골리앗을 무찔렀다는 것이 더 큰 은혜로 다가오지 않습니까? 우리나라 양궁 실력은 전 세계가 다 알아주는데 다음 올림픽부터 말을 타고 활을 쏴야 한다고 하면 어떻게 될까요? 아마 순위권 안에 들기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48절 말씀을 보면 다윗은 블레셋 사람들을 향하여 빨리 달리며 손을 주머니에 넣어 돌을 가지고 물매로 던져 블레셋 사람의 이마를 치매 돌이 그의 이마에 박히니 땅에 엎드러지니라 한, 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니예요. 수도 없이 반복해서 실전에서 날마다 연습했기에 몸이 기억을 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골리앗은 덩치가 매우 큰 사람입니다. 움직임이 느리고 매우 둔한 사람이에요. 다윗은 평소에 양을 치며 새끼 하나를 지키기 위하여 곰과 사자를 돌맹이 하나로 맞서 싸웠던 사람입니다. 날쌘 들짐승도 다루어 보았는데 그깟 덩치 큰 오만하기 짝이 없는 하나님을 업신 여기는 골리앗을 보면서 다윗이 벌벌 떨었을리가 없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전쟁터에 나간 것도 사실이지만 다윗은 기적을 베풀어달라고 안 하던 기도를 갑자기 한 것이 아니라 평소 실력대로 적당한 돌맹이를 주우며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제가 우리들교회에서 마지막으로 맡은 직분은 판교 채플 주차부 담당 사역자로 지난 1년을 보냈습니다. 주일날 저를 거치지 않으면 판교 채플 지하주차장을 들어가기가 어렵습니다. 진짜예요. 올 연초에 주차증을 새로 발급해드리면서 엄격하게 심사하고 자격 조건에 맞는 분들에게만 사전 심사를 통해서 주차증을 발급해드렸는데 간혹 주차증을 미리 신청하지도 않고 무작정 찾아오신 분들도 계셨습니다. 한 번은 여든 살이 넘으신 할아버지 한 분이 오셔서 '주차증을 받으러 오셨다.'고 하시길래 미리 신청을 하셨는지 물어보니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그냥 눈만 뻐끔뻐끔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안 된다.'고 '미리 신청하시고 안내 문자를 받으시고 한 주 후에 다시 오시라.'고 설명을 드렸더니 옆에 계시던 주차부 집사님들이 '목사님 왜 그러시냐, 아버님이신데 그냥 해 드리세요.'하시더라고요. 저는 우리 집사님들이 저의 아버지인 거를 모를 거라고 생각을 했어요. 다들 저의 아버지인 걸 아는 거예요. 그래도 제가 안 된다고 했습니다. '일단 집에 가셔서 먼저 며느리에게 물어보시고 신청하시고 한 주 후에 다시 오시라.'고 그냥 돌려보냈습니다. 최근에는 어떤 권사님이 2024년 주차증을 2025년 주차증으로 갱신하러 오셨는데 이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목사님이 하도 엄격하게 관리를 하셔서 주차증을 받기는 했지만 남편하고 같이 올 때만 사용하느라고 1년에 몇 번 사용하지 못했다.'고 하시길래 제가 웃으면서 그랬어요. '왜 교회가 저를 이 자리에 앉혀놨겠습니까. 우리들교회에 사역자들이 많이 있는데 그 중에서 제일 융통성이 없는 사람이 바로 저이기에 이 자리에 앉혀 놓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말씀했더니 그냥 허탈하게 웃으시면서 가셨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가 매 번, 항상 엄격한 잣대만 들이대는 것은 아닙니다. 상황을 봐서 정 안 될 것 같으면 함께 나오는 가족들이 없고, 또 QR이 뭔지도 모르시는 것 같으면 그 자리에서 눈치껏 바로바로 해드리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또 어떤 분은 주차증을 분실하고 재발급을 받으러 오셨는데 처음부터 기선을 제압하려고 하시는 건지 첫 마디가 나오기가 무섭게 막 엄포를 놓으시면서 '교회가 그러면 안 된다. 교회가 지금 뭐 하는 거냐?'고 막 난리를 피우시는 경우도 한, 두 번 있었는데 그런 경우에는 또 제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렇게 하시면 해드릴 수가 없다.'고 '먼저 교회의 질서를 따르기로 약속해주셔야 제가 재발급을 해드릴 수 있다.' 골리앗과 다윗처럼 기싸움을 할 때도 있었습니다. 한 번은 애기 엄마가 주차증을 분실하고 재발급을 받으러 오셨는데 어디에서 분실했는지를 잘 모르시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재발급을 받기가 정말까다로우니 일단 가셔서 다시 한 번 찾아보시고 다시 오라.'고 했는데 그런데 몇 주 후에 다른 집사님이 주차증을 갱신하러 오셨다가 그 애기 엄마를 하시면서 주차증을 분실하셔서 교회 밖에 주차를 하고 세 아이를 데리고 오는데 막내는 지금 6개월 밖에 되지 않았는데 그렇게 오신다.'고 거예요. 제가 그 이야기를 들으니까 너무 미안하고 죄송한 마음에 전화를 드렸더니 '아니라.'고 '주차증 찾았다.'고 '정말이냐?'고 물어보니 '정말이라.'고 '오늘도 교회에 주차했다.'고 하시길래 안심이 되었습니다. 그 애기 엄마가 정지훈 목사님의 사모인데 정지훈 목사님은 그런 일이 있었는지 알라나 모르겠어요. 요즘에는 주차증을 분실하는 경우 어떻게 구제를 해드려야 할까 고민하다가 그냥 그냥 재발급을 해드릴 수는 없고 본인이나 가족이나, 또는 목장 식구들에 중 한 분이 주일날 3회 이상 주차 봉사를 하시면 분실한 주차증을 새로 재발급을 해드리고 있는데 어떤 분은 그냥 너무 감사하게 생각하는 분도 있고, 또 어떤 분은 살짝 기분 나쁘게 생각하는 분도 있는데, 지난 1년 동안 주차증을 발급받으신 분은 총 776명이고, 주차증을 기준에 안 맞게 신청했다가 발급이 취소된 사람이 무려 150명이나 됩니다. 그분들은 당연히 '취학부도 되겠지?' 했다가 신청하신 분도 있고, 다리를 다쳐서 수술을 해서 신청하신 분들도 있고, 또 임신 중이어서 신청하신 경우도 있고, 사실은 다 받아줘야 되자나요. 그런데 기준이 딱 미취학, 둘재 70세 이상, 셋째 장애인, 그냥 장애인 말고 복지 카드가 있어야 돼요. 인증으로 다 확인합니다. 그래서 이제 그런 분들하네 하나하나 일일히 다 안내를 드려요. 다리가 다쳤으면 임시주차증을 신청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임신 중인데 조금만 기다리시고, 또 병원에서 위험하다고 할 때는 개인적으로 톡을 주시면 임시주차증을 발행해드립니다. 그거를 매주 토요일마다 일일히 개별적으로 해드리고 있어요. 주차장을 마구 나눠드리면 저도 편하고, 또 살짝 인기 관리도 하고, 받는 분들도 기분이 좋기는 하겠지만 이미 주차증이 있어도 매주 만차가 되어서 들어오지 못하는 경우도 있기에 앞으로 남고 뒤로 밑지는 경우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걸레질의 영성은 걸레질 자체에 있다기 보다는 복잡한 인간 관계와 미묘한 감정들 속에서 생기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다윗도 여러 형제들 중에서 막대로 자랐지만 사랑을 독차지했다기 보다는 장남의 안위가 걱정되어서 막내 아들을 전쟁터에 홀로 보낸 것을 보면 다윗이 어렸을 때부터 어떻게 자랐을지 눈에 보듯 선한 것 같습니다. 다윗의 영성도 그러한 환경 속에서 차츰차츰 다듬어지지 않았을까 싶어요.
50 다윗이 이같이 물매와 돌로 블레셋 사람을 이기고 그를 쳐죽였으나 자기 손에는 칼이 없었더라 51 다윗이 달려가서 블레셋 사람을 밟고 그의 칼을 그 칼 집에서 빼내어 그 칼로 그를 죽이고 그의 머리를 베니 블레셋 사람들이 자기 용사의 죽음을 보고 도망하는지라
-> 50절과 51절 말씀을 봅니다.
골리앗은 물맷돌에 맞아 쓰러졌지만 그 목숨 줄을 끊은 것은 결국 자신의 칼이 되었습니다. 즉, 내가 벌어놓은 돈으로 내가 죽임을 당한 꼴이 된 것이에요. 돈이 있어서, 권세가 있어서 결국은 그 칼로 내가 죽임을 당한 형국이 된 것입니다. 돈이 없으면 주식도 하지 않고, 무리한 투자에 욕심을 내지 않았을텐데 나의 이름으로 칼과 창을 마구 사용하다보니 내가 가지고 있는 돈과 권세로 망하는 사건이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52 이스라엘과 유다 사람들이 일어나서 소리 지르며 블레셋 사람들을 쫓아 가이와 에그론 성문까지 이르렀고 블레셋 사람들의 부상자들은 사아라임 가는 길에서부터 가드와 에그론까지 엎드러졌더라
-> 52절 말씀을 봅니다.
두려움에 떨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달라졌습니다. 소년 다윗이 골리앗을 때려 눕히는 장면을 통해서 전쟁은 칼과 창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하는 것을 눈으로 직접 보았기에 다윗과 함께 행동하는 믿음으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53 이스라엘 자손이 블레셋 사람들을 쫓다가 돌아와서 그들의 진영을 노략하였고 54 다윗은 그 블레셋 사람의 머리를 예루살렘으로 가져가고 갑주는 자기 장막에 두니라
-> 53절 말씀을 봅니다.
블레셋 사람들을 끝까지 쫓아야 하는데 쫓다가 다시 돌아왔다고 합니다. 왜 다시 돌아왔을까요? 뿔뿔히 흩어지면서 놓고 간 전리품을 챙기기 위해서 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전쟁이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제사보다 젯밥에 관심이 더 쏠려 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따로 전리품을 취하지 않고 골리앗의 머리를 취했습니다. 다윗은 사사로운 전쟁에 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전쟁을 치렀기 때문에 자기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창세기 3장 15절은 보통 우리가 원시 복음이라고 하는데 이 한 절에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과 사탄의 계략과 여자의 후손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 이 한 절 안에 응축되어 있습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골리앗과의 전쟁에서 끝나지 않은 그 싸움을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사단의 머리에 치명상을 입히시고 창세기부터 지금까지 이어지는 우리들교회도 동참하기 위해서 21년 전에 우리들교회가 세워졌고 2014년도부터 시작된 큐티 목회 세미나가 19회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작년 겨울에 송구영신예배를 기점으로 대구 채플이 세워진 것처럼 올해는 송구영신예배를 기점으로 광주 채플이 세워질 예정입니다. 광주 채플 담당 사역자로 내려가는 저도, 광주에서 파송받은 사역자를 기다리는 성도님들도 전리품에 눈이 멀고 전리품을 취하기 위하여 거룩한 전쟁을 멈추는 악을 짓지 말라고 오늘 이 말씀을 주신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담임 목사님이 한 영혼을 위하여 달려오신 것처럼 우리도 그 길을 함께 걸어가야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마지막 적용질문을 드립니다.
[적용]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내가 갈고 닦아야 할 나의 물매돌은 무엇입니까? 마음이 다급할 때만 능력의 하나님을 찾고 있지는 않습니까? 가던 길을 멈추고 마음을 빼앗긴 나의 전리품은 무엇입니까?
기도제목
희연
1.수치와 조롱,칼과 창으로 찢겨진 저를 찾아오셔서 깨달음을 주시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아가게 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시기를
2. 요즘 몸이 안 좋은데 주님의 손길로 어루만져주셔서 이식 신장 뿐 아니라 몸도 회복되고 건강해지길
3.우리 엄마의 구원과 건강을 지킬 수 있기를
4.우리 언니의 가정의 평안과 가족 모두 건강하기를
5.언니 형부의 비행하는데 어려움이 없도록
6.우리 형부의 미국 취직 인터뷰가 주님의 보살핌 속에서 잘 되길
7. 저에게 귀한 신장 주신 뇌사자분 하늘나라 주님 곁에서 평안하시길
또한 뇌사자 가족분들에게도 은혜와 은총 건강함을 내려주시길
8. 우리 목장 식구들 목자 언니 포함하여 주님 안에서 늘 승리하며 원하는 기도들이 응답 받고 모두들 은혜로운 삶 되시고 아프지들 않고 건강하길
예선
1.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걱정하며 수치와 조롱을 스스로 만들어 풀이 죽어있는 나의 모습을 보는 게 힘든데 말씀으로 잘 직면하고 가도록. 상담 가서 자세히 나누기.
2.달란트로 주신 것을 날마다 칼과 창으로 삼아 휘둘렀던 것을 회개합니다. 나와 남을 정죄하는 것을 내려놓고 중보로 나아갈 수 있도록
3.하나님과 더 깊은 교제하는 큐티할 수 있게 도와주세요.
4.전리품으로 눈을 돌리고 싶을 때 말씀으로 가지치기 할 수 있도록
은우
1.말씀의 물맷돌로 나의 안과 밖의 골리앗을 죽이고, 전리품이 아닌, 사명의 자리를 잘 지키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