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110 돌아온 언약궤
사무엘상 6:1-15
박재현 목사님
안녕하세요. 저는 우리들교회에서 청소년 친구들을 섬기는 박재현 목사입니다. 인사드리겠습니다. 많이 부족하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겸손하게 전심으로 말씀 증거하는 시간 갖도록 하겠습니다. 설교를 시작하기 전에 여러분들께 책 한 권을 소개하고 시작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매일마다 큐티 말씀으로 사무엘상을 지금 묵상하고 있자나요. 큐티할 때 담임 목사님의 그 저서인 말씀이 들리는 그 한 사람 이거와 함께 큐티를 무상을 하시면 더 깊은 묵상으로 나아갈 수 있더라고요. 제가 이번 한 주 동안 이 말씀이 들리는 그 한 사람을 깊이 묵상하였는데요. 놀라운 점을 발견하였습니다. 이걸 같이 책을 묵상하니까 잠이 너무나도 잘 옵니다. 오해하지 마시고요. 책을 보면서 잠들었다는 것이 아니라 이걸 다 보니까 제가 불면증이 있는데 마음에 안정이 되어서 잠이 잘 들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담임 목사님의 사무엘상 책이 많이 있거든요. 꼭 구입하셔서 우리 함께 편안하게 잠들기 소망합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말씀이 들리는 그 한 사람을 찾으십니다. 그 한 사람이 저와 여러분이 되어서 잃어버린 언약궤를 되찾는 구원의 시간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1. 감당할 수 없는 고난의 시간이 채워져야 합니다.
1 여호와의 궤가 블레셋 사람들의 지방에 있은 지 일곱 달이라 2 블레셋 사람들이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을 불러서 이르되 우리가 여호와의 궤를 어떻게 할까 그것을 어떻게 그 있던 곳으로 보낼 것인지 우리에게 가르치라
-> 우리 함께 1절과 2절 말씀 읽도록 하겠습니다.
이스라엘 고대 역사에 있어서 이스라엘을 끊임없이 괴롭혔던 민족을 하나 꼽으라면 그 민족은 블레셋입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살고 있는 그 가나안 땅에 이스라엘 민족과 블레셋 민족은 함께 살고 있고요. 그리고 그 지역 패권을 위해서 끊임없이 전쟁을 하고 있기 때문이죠. 참 아이러니하게 현재 이스라엘과 하마스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그 가자지구 있지 않습니까. 그 가자지구가 오늘 본문에도 나오는데 블레셋 5대 성읍 중의 하나가 가자입니다. 물론 팔레스타인과 블레셋 사람과의 연관성은 없지만 그 지역 자체는 3~4천 년 전부터 지금까지 쉬지 않고 전쟁의 역사가 쓰여지고 있는 안타까운 모습을 우리는 오늘도 보고 있습니다. 사무엘상 4장보니까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전투가 이어지는데요. 이 지역도 지금 가자지구 그 주위에 있는 지역에서 전투가 일어난 겁니다. 이스라엘은 이 전투에서 블레셋에게 계속해서 당합니다. 블레셋에게 계속해서 당하고 있으니 자존심도 상하고 사기가 바닥을 치니까 이 전쟁에서 왜 졌는지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이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이 언약궤를 전쟁터로 들고 옵니다. 전쟁터에 도착한 언약궤를 보고 이스라엘 군사들은 큰 소리로 외칩니다. '하나님의 언약궤가 내 손에 있으니 이 전쟁은 무조건 우리의 승리하는 전쟁이다', '내가 오늘 큐티하고 기도했으니 내가 하는 사업은 무조건 잘 될 거야', '내가 오늘 예배 드리고 예물 드렸으니 내 자녀의 입시와 취업 준비는 무조건 잘 될 거야.'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런 기복적인 신앙관을 가지고 하나님의 언약궤를 들고 나아갑니다. 언약궤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 아니라 내 성공을 위한 부적이 되어버린 거죠. 그 결과 이스라엘은 전쟁에서 패배하고 맙니다. 패배한 것을 넘어서 그들의 정체성과 같은 이 언약궤를 블레셋에게 빼앗겨버립니다. 이 언약궤를 빼앗겼다는 것은 오늘 날 우리가 큐티책을 빼앗긴 것과 다름이 없는 사건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그렇게 아끼는 큐티책이 다른 사람에게 빼앗겼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얼마나 무섭지 않습니까? 지금 반응을 보니까 '큐티책 그냥 한 권 더 사면되지 뭐.', '내 큐티책이 지금 어디 있지?' 이런 반응인 것 같습니다. 언약궤를 빼앗긴 것은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는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성공 수단으로 사용한 삶의 결론으로 그들의 예배가 무너진 것이죠. 성공을 위한 예배는 무너진 예배와도 같습니다. 오늘 드리는 이 예배가 성공을 위한 예배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가는 마음의 예배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블레셋은 이제 이 언약궤를 소유하게 됩니다. 이 언약궤를 소유한 다음에 아마 많은 생각이 들었을 거예요. '이 언약궤를 부숴뜨릴까, 아니면 나중에 내가 필요할 때 한 번 사용할까?' 고민한 결과 블레셋은 이 언약궤를 자신들이 믿고 있는 신, 다곤 신, 그 다곤 신전 옆에 언약궤를 놔둡니다. 다곤 신은 곡물과 다산을 상징하는 신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그 가나안 땅을 상징하는 신이 바알신과 아세라신이 있죠. 그 중에 또 한 명이 다곤 신이 있는데 이 세가지 신들의 공통된 특징이있다면 풍요로움을 상징합니다. 풍요로움, 다산과 곡물. 그렇기 때문에 블레셋 사람들의 그 가치관은 당연히 물질에 사로잡혀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떻게든 내 인생의 유익을 위해서 이 언약궤를 필요할 때 사용하고자 하는 욕심과 야망이 그들의 마음 속에 가득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욕심과 야망이 그들에게 성공을 가져다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재앙을 부르는 사건이 되었습니다. 멀쩡히 서 있던 다곤 신상이 어느 날 보니까 쓰러져 있고, 이튿날 보니까 손과 발과 머리가 부서져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이 믿던 신을 심판하신 것입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다곤 신상을 심판하신 후에 그 심판의 바람이 블레셋 사람들에게 임합니다. 사무엘상 5장에 보니까 독한 종기 오늘날로 치면 흑사병이 돌아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블레셋 사람의 고통의 소리가 하늘을 찔렀다고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이 무서운 재앙이 우리가 오늘 읽었던 6장 1절에 본문에 보니까 7달 동안 이어졌다고 합니다. 7달, 숫자 7은 성경에서는 완전수를 나타내죠. 하나님의 심판이 완전히 임했고 하나님의 시간이 다 채워지니까 그제서야 블레셋 사람들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2 블레셋 사람들이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을 불러서 이르되 우리가 여호와의 궤를 어떻게 할까 그것을 어떻게 그 있던 곳으로 보낼 것인지 우리에게 가르치라
-> 2절 말씀 우리 한 목소리로 읽어보겠습니다.
감당할 수 없는 고난의 시간, 하나님의 시간인 7달이 채워지니 그제서야 하나님의 언약궤를 이스라엘에게 돌려보내기로 결정합니다. 완전한 항복을 의미하죠. 내 욕심과 야망도 내가 감당할 수 없는 그 고난이 찾아오면 꺾이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인생 가운데 감당할 수 없는 고난이 지금 찾아왔다면 그 시간은 하나님께 회개할 수 있는 시간이고, 그 시간은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는 구원의 시간인 줄 믿습니다.
저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이 언약궤를 저의 성공의 도구로, 그리고 블레셋처럼 욕심과 야망의 수단으로 생각한 교만한 산당이 제 안에 가득 있습니다. 제가 얼마나 바리새인이냐면 목회자라면 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그런 좀 지나치게 저를 가두는 것이 있습니다. 영적 교만이 있습니다. 목회자라면 아껴야 하고, 목회자면 원리원칙을 잘 지켜야 한다는 그러한 바리새인적인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신학생 때부터 지금까지 가계부를 쓰고 있습니다. 100원도 놓치지 않고 가계부를 다 씁니다. 심지어 옷을 사거나 신발을 사는 일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당근 마켓 중고 거래도 해 본 적이 거의 없습니다. 옷을 너무 안 사니까 부산에 계신 장모님이 옷을 택배로 서울로 보내주기도 합니다. 지금 제가 입고 있는 옷도 너무나도 옷을 안 사니까 장모님께서 보내주신 겁니다. 그리고 사역을 마치면 무조건 집으로 향합니다. 집에 가서 아내와 딸과 시간을 보내는 것이 가장의 의무라고 생각해서 다른 길로 새지 않고 집으로 향합니다. 그러니까 제 마음 안에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요? '아, 나 정도면 괜찮은 목회자구나. 나 정도면 괜찮은 아빠고 괜찮은 남편이구나.'라는 생각이, 그러한 교만한 산당이 제 마음 속에 많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가치관으로 살아가다 보니까 제가 아내를 바라볼 때 자연스럽게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요. '사모도 바르게 살아야 한다. 사모도 삶에 모범이 되어야 되고 절대 좌우로 치우치면 안 된다.' 아내가 저와 24살 때 결혼했는데요. 심지어 여기까지 할게요, 원고대로만. 제가 그때 거룩한 사모 만들기 프로젝트로 신혼 밤인데 성경공부를 하였습니다, 아내를 데리고. 그리고 성경공부 끝나고는 성경퀴즈대회도 열고요, 제가 직접 문제도 내서. 굉장히 바리새인이죠. 제 아내는 결혼하기 전에 저와 반대되는 삶을 살았어요. 아내는 쇼핑하는 거 좋아하고 소유욕도 강하더라고요. 살아온 환경이 다른 두 사람이 결혼을 했습니다. 결혼하고 나서 아내가 옷을 사서 새 옷을 입고 저에게 자랑을 합니다. '여보, 나 어때?' 그때 저의 첫마디가 뭔지 아십니까? '그거 얼마짜리야? 그렇게 셔츠가 많은데 옷이 꼭 필요했어?' 이렇게 아내와 저는 가치관이 다르니까 대화가 되지 않았어요. 점점점 아내와의 갈등의 골이 깊어지고 있었습니다. 저는 아내 마음 속에 저의 이런 바리새인적인 지나친 의로움 때문에 아내 마음 속에 악한 종기가 자라고 울부짖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늘 자기 열심으로 가족에게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에게 감당할 수 없는 고난의 시간이, 7달이 채워지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작년 봄이었습니다. 저는 어느 때와 다름이 없이 가계부를 쓰고 있었습니다. 가계를 운영하다 보면, 다 공감하시겠지만 예상하지 못하게 드는 돈이 있자나요. 갑자기 자동차 고장이 나면 막 50만원, 100만원 이거는 예상치 못한 돈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가 맞지 않으니까 제가 아내에게 이야기 합니다. '여보, 이제 딸도 두 돌 지났으니까 딸을 어린이집에 보내고 이제 일해야 되지 않을까?' 아내는 지금 그 얘기를 듣고 난 다음에 '응, 알겠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난 다음에 제가 교회 사역을 하고 있는데 아내에게 전화 한 통이 왔습니다. 전화를 받았는데 분위기가 싸하더라고요. 아내가 눈물로 울부짖으면서, 소리치면서 뭐라고 얘기하냐면 '나 도저히 당신이랑 같이 못 살겠어. 이제 그만 살자.'라는 얘기를 결혼 4년차 때 처음으로 하였습니다. 펑펑 울면서 전화하는 아내의 모습에 너무 놀라서 곧장 제가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집으로 달려가니 두 돌 된 딸을 안고 펑펑 울고 있는 아내 모습을 봤습니다. 나의 목회 성공을 위한 지나친 의로움이 아내 마음 속에 독한 종기가 나게 하는 전염병이 있었다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솔직히 아내 입술에서 저에게 '그만 살자.'는 말이 나올 줄 몰랐습니다. 그만큼 제가 영적으로 교만했고, 너무 교만해서 내 죄가 보이지 않았던 거죠. 7달이 채워지는 완전한 진노가 채워지자 그제서야 나의 죄가 보이고, 하나님께 그리고 아내에게 두 손 두 발 드는 회개의 자리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야망은 사망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구원의 시간이었습니다. 그 일이 일어나고 지금 2년 가까이 지났습니다. 저의 모습은 어떻게 변했을까요? 네, 여전히 가계부는 잘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내가 옷을 사서 '여보, 나 예뻐?'라고 물어보면 '그거 얼마짜리야?'가 아니라 '여보, 너무 예뻐.'라고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박수 칠 일이 아닌 게 제가 그렇게 얘기하고 속으로는 저건 얼마짜릴까. 생각을 한다는 거죠. 아직 양육이 덜 됐습니다. 제가 지난주 중에 저희 교회 울림카페에 갔습니다. 갔는데 한 여자 성도님께서 저를 보고 이렇게 얘기하시는 거예요. '목사님, 손이 너무 고와요. 너무 예뻐요.'하는 거예요. 제가 손이 좀 곱죠. 핸드크림도 안 발라요. '감사합니다.' 했는데 그 다음 한 마디가 결정타였습니다. '목사님은 집안일을 안 하시나봐요. 호호호.'하며 가시는 거예요. 여기서 놀라운 건 뭔지 아십니까? 저는 그 성도님을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음성같이 들렸습니다. 의로움이라는 교만의 싹이 날 때마다 그 거룩한 손으로 저의 그 교만 싹을 뽑아주시는 우리들 공동체가 있어서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적용질문입니다.
[적용] 나에게 언약궤는 성공의 수단인가요? 구원의 통로인가요? 감당할 수 없는 고난으로 주님께 돌이킨 적이 있나요?
2. 좌우로 치우치지 않아야 합니다.
12 암소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대로로 가며 갈 때에 울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블레셋 방백들은 벧세메스 경계선까지 따라 가니라
-> 12절 말씀 우리 한 목소리로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블레셋에게 감당하지 못할 고난이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이 재앙을 통해 회개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문제 해결로 나아갑니다. '어떻게 하면 이 언약궤를 처리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나에게 임한 재앙이 끊어질까.' 블레셋 제사장들과 복술자들을 불러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해서 연구합니다. 지식적인 연구 결과 답은 속건제를 드리고 이스라엘로 다시 돌려보내는 거 였습니다. 자신들이 지은 죄의 값을 속건제를 통해 치르면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있을 것이라는 문제 해결이었죠. 참 놀라운 것은 하나님이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셔도 말씀이 들리지 않는 사람은 회개가 아닌 해결책만 바란다는 것입니다. 아직까지 내 힘이 꺾이지 않은 거죠. 그렇기 때문에 말씀이 들려서 이 자리에 앉아있고, 말씀이 들려서 눈물로 회개하는 것은 우리의 노력과 힘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인 줄 믿습니다. 우리가 망하였기 때문에, 우리 가정이 깨졌기 때문에, 우리가 일어날 수 없었기 때문에 우리들교회에 와서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인생 가운데, 하나님의 빛이 비추었기 때문에 이 자리로 오게 된 것입니다. 블레셋은 해결책을 넘어서 이제는 하나님을 테스트하기 시작합니다.
9 보고 있다가 만일 궤가 그 본 지역 길로 올라가서 벧세메스로 가면 이 큰 재앙은 그가 우리에게 내린 것이요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를 친 것이 그의 손이 아니요 우연히 당한 것인 줄 알리라 하니라
-> 9절 말씀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 언약궤를 하나님의 집으로 돌려보내기로 합니다. 그런데 돌려보내기로 하는 방법이 굉장히 독특합니다. 언약궤를 싣기 위해서 새 수레를 만들고, 보통 새 수레를 만들고 난 다음에 힘 센 황소두 마리를 사용해서 이 언약궤를 싣고 가야 되는데, 황소가 아니라, 오늘 본문에 보니까 암소 두 마리에게 이 무거운 멍에를 메게 한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이 암소 두 마리는 송아지를 출산한 지 얼마 안 된 암소입니다. 이렇게 한 목적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을 테스트하는 거죠. 이 암소 두 마리가 하나님의 집인 벧세메스로 가면 이 재앙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고, 이 암소 두 마리가 하나님의 집이 아니라 송아지가 보고 싶어서 자신들의 집으로 가면 이것은 하나님의 재앙이 아니라 아주 우연히 일어난 일이야 라고 하는 거죠. 암소의 모성애를 자극해서 하나님을 테스트한다는 걸로 볼 수 있습니다. 이제 모든 세팅이 끝났습니다. 암소 두 마리가 행동하는 것을 지켜볼 때입니다.
12 암소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대로로 가며 갈 때에 울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블레셋 방백들은 벧세메스 경계선까지 따라 가니라
-> 우리 함께 12절 말씀 읽어 보겠습니다.
암소를 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암소는 철저하게 하나님이 이끄시는대로 이스라엘로 향합니다. 그냥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눈물로 걸어갑니다. 눈물로 걸었다는 것은 자기가 낳은 송아지를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내 본성은 집으로 나의 집으로 가야 하는데 하나님이 부르시고 하나님이 이끄시니 내가 원하는 길이 아닌 하나님의 길을 걸어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사명이라고 합니다. 사실 이 언약궤를 잘못 만지면 죽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거룩한 하나님의 성물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아무도 이 언약궤를 끌겠다고 자원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암소 두 마리가 부르심을 받은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사명이란 내가 자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죽을 수 밖에 없었던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무거운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가는 장면과 너무 흡사합니다. 골고다 언덕을 오르실 때 예수님도 죄인된 나를 생각하며 고통을 참고 눈물로 걸어가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사랑인 아가페 사랑입니다.
12절 말씀 후반부에 보니까 이 두 마리의 암소가 이제 멍에를 메고 하나님의 집인 벧세메스로 걸어가는데, 본문에 보니까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대로로 걸어갔다고 나와있습니다. 좌우로 치우치지 않았다는 것은 성경에서는 절대적인 순종을 표현합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은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말씀이 중심이 되어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입니다. 이번 1027 집회 때 시청과 광화문, 서울역 그리고 여의도까지 한국 교회가 함께 모여서 회개하는 자리를 가졌습니다. 많은 우리들교회 성도님들께서 참석해주셨는데 핑크빛 물결이 아주 아름답더라고요. 저도 네 살 된 딸과 참여했는데 사진 하나 보여주시죠. 깔맞춤 하기 위해 딸도 핑크색 바람막이를 입혔습니다. 아내는 둘째 임신 만삭 중이라 집에서 좀 쉬게 하고 딸과 함께 단 둘이서 버스 타고 지하철 타고 시청 앞으로 도착했습니다. 담임 목사님께서 설교하실 때 정말 눈물로 부르짖으시고 기도하셨자나요. 그런데 현장에서 딸과 함께 그 장면을 지켜보는데 딸이 담임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그 기도하고 있는 시간에 저에게 이렇게 질문합니다. '아빠, 목사님은 왜 이렇게 소리를 치셔?' 순간 당황했습니다. 홉니와 비느하스가 아닌가 싶기도 하고 너무 당황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딸한테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딸 이름이 이솔이 인데요. '이솔아, 목사님은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눈물로 기도하시는 거야. 이처럼 우리는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눈물을 흘릴 때도 있고,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소리치며 기도할 때도 있어. 이솔이도 커서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살아가는 멋진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어.' 이렇게 이야기하니까 제 딸이 '아, 그렇구나.'하고 담임 목사님의 그 기도 소리가 끝나고 나니까 많은 성도님들과 함께 막 박수를 함께 치더라고요. 제가 그떄 깨달았어요. '이게 바로 믿음의 유산이구나.' 자녀에게 사명자의 길을 보여주는 것이 정말 믿음의 유산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리고 제가 지금까지 그렇게 자녀에게 하지 못했던 거에 대해서 회개하는 자리가 되었습니다. 사실, 그 집회 자리가 목회자로서는 정말 서기 힘든 자리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그 집회를 반대하는 수 많은 세상 사람들이 지켜보면서 '어떻게 하면 공격할까, 어떻게 하면 무너뜨릴까?'라는 생각으로 하나님을 테스트하듯 설교자를 바라보고 있었을 것입니다. 분명히 이 집회 이후에 수 많은 공격이 올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담임 목사님은 그 자리를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부르심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절대 순종하셨습니다. 며느리의 때에 순종하고, 아내의 때에 순종하고, 엄마의 때에 순종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때에 절대 순종하셨습니다. 그리고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오직 나의 죄만 보며 말씀이 중심이 되어서 눈물의 회개를 부르짖었습니다. 무엇을 위해서 입니까?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였습니다. 목사님은 세상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이 땅에 임할 재앙이 두려워서 오직 구원 때문에 오직 다음 세대의 생명을 위해 언약궤를 메고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눈물로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우리도 이 십자가의 길을 함께 걸어가길 소망합니다.
저희 청소년부 한 학생이 용인에 있는 중학교에 다닙니다. 2년 전에 학교에서 토론 대회가 열렸다고 합니다. 토론 주제는 동성 결혼이었습니다. 16명이 토론 대회에 참여를 했는데 놀라운 것은 15명이 동성 결혼 찬성에 섰고, 한 명만이 동성 결혼 반대에 섰습니다. 이게 오늘날 대한민국 다음 세대의 현주소입니다. 일반 학교였습니다. 벌써 젊은 세대는 인권으로 포장된 악의 평범성에 넘어가 본인이 한 행동이 악인줄도 모르고 살아가고 있다는 거예요. 16명 중에서 유일하게 혼자서 동성 결혼 반대하던 친구가 바로 우리들교회 청소년부 친구였습니다. 이 친구가 다른 친구들과 다르게 왜 반대하였을까요? 유일한 크리스천이라서요? 아닙니다. 15명 중에서도 교회를 다니는 친두들이 있었답니다. 그러면 왜 반대하였을까요? 바로 어렸을 때부터 구속사의 말씀을 듣고 자랐기 때문입니다. 부모님이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인생의 기준이 되는 말씀인 큐티로 이 자녀를 양육했기 때문이죠. 사명을 가진 부모는 자녀와 함께 큐티를 하면서 바른 진리를 전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아이들이 안 듣는 것 같지만 다 듣고 있고,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에 바로 이런 사건 앞에서 그 들은 말씀을 통해서 그 아이도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십자가의 길을 걷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걷게 된 결과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 친구는 이렇게 외쳤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동성애자들을 사랑하셔. 그러나 동성애는 성경에서는 죄라고 해. 그래서 그들이 주님께 돌아오기를 원한다.'고 토론 대회에서 외쳤다고 합니다. 그 결과가 무엇이었습니까? 그 친구는 왕따를 당했습니다. 이게 십자가의 길을 걷는 자의 사명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상 첫 시작을 엘가나와 한나의 가정 이야기로 시작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사무엘상이 시작이 되는 그 배경이 무슨 배경입니까? 사사 시대죠. 사사 시대 핵심 가치가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니라.' 오늘날 이 시대와 너무나도 닮아 있습니다. 수많은 광고와 미디어를 통해 다음 세대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전합니다. '네가 하는 생각, 네가 가진 그 감정의 느낌, 네가 하고 싶은대로 하는 것이 바로 정답이야. 그렇게 살면 왜.' 절대적인 기준이 없어지니 수 많은 사람들은 좌우로 치우치며 자기의 옳은 소견대로 살아갑니다. 왜 그 중학생 15명이 동성 결혼에 찬성했겠습니까. '네가 하는 생각, 네가 하는 결정 내가 존중해. 나도 너를 존중해줬으니까 앞으로 너도 내가 하는 생각과 내 결정을 터치하지마.'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니라. 우리가 지금 포괄적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서명을 하고 있습니다. 그 서명도 중요합니다. 꼭 해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면 우리 아이들 마음 속에 박혀 있는 그 악한 산당을 제거하는 것인 줄 믿습니다. 그 악의 뿌리를 뽑는 것이 바로 우리의 사명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뽑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있습니다. 그 방법은 말씀 밖에 없습니다. 큐티 밖에 없습니다. 사무엘상 1장에 보니까 한나가 사무엘을 낳고 그 아이를 바로 하나님의 집에 데려가는 것이 아니라 그 아이가 젖을 떼기 전까지 양육하였다고 나와있습니다. 양육의 때가 다 끝난 다음에 사무엘을 하나님의 집으로 데려가서 그를 평생토록 여호와께 바칩니다. 여러분, 그 다음 이야기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엘리 제사장 가문의 이야기입니다. 엘리는 제사장 직분을 잘 감당했을지 몰라도 두 아들을 양육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의 마지막은 너무나도 비참했습니다. 하나님이 두 가정을 비교하면서 사무엘상을 시작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사사 시대에서 다윗 왕조 이야기로 넘어가기 전에 룻기의 가정 이야기, 한나의 가정 이야기, 엘리의 가정 이야기를 보여주는 것은 결국 가정이 살아야 교회가 살고, 가정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사활을 걸어야 할 사명은 높은 연봉과 좋은 직장이 아니라, 노후 준비가 아니라 바로 다음 세대 자녀들이 좌우로 치우치지 않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잘 양육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길로 놓고 가는 사람은 오직 구원 때문에, 오직 생명 때문에 좌우로 치우치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큐티가 우리 인생의 중심이 되어, 큐티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가 되어 눈물로 다음 세대를 잘 양육하는 사명자의 인생 살아가길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적용질문입니다.
[적용] 지금 걷고 있는 길은 야망의 길인가요? 아니면 사명의 길인가요? 자녀와 함께 큐티 나눔을 하고 있나요?
3. 번제물로 드려져야 합니다.
13 벧세메스 사람들이 골짜기에서 밀을 베다가 눈을 들어 궤를 보고 그 본 것을 기뻐하더니 14 수레가 벧세메스 사람 여호수아의 밭 큰 돌 있는 곳에 이르러 선지라 무리가 수레의 나무를 패고 그 암소들을 번제물로 여호와께 드리고
-> 13절, 14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암소는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언약궤가 도착해야 될 그 하나님의 집으로, 벧세메스로 도착하게 됩니다. 이렇게 암소의 사명이 다 끝나고 다시 자신들의 새끼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면 정말 드라마에 나올 법한 해피 엔딩인데, 그러나 암소의 사명은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14절에 나오듯이 암소들은 번제물로 여호와께 드려집니다. 마지막 사명은 순교였습니다. 보통 이스라엘 제사법으로는 수소로 주님께 제사를 드려야지만, 이 암소는 하나님의 성물을 만졌기 때문에 더 이상 세속적인 것으로는 사용될 수 없어 번제물로 드려지게 됩니다. 그리고 또, 이스라엘 제사법 특성상 이 번제물은 하나도 남기지 않고, 조금도 남기지 않고 완전히 태우는 제사입니다. 즉, 마지막 사명은 자신의 삶을 성령의 불로 완전히 태우는 것, 완전한 헌신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신 것 만으로 자신의 사명을 다 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클라이막스, 사명의 클라이막스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완전한 사명을 감당하신 모습을 기억하게 합니다. 두 암소가 마지막 사명으로 이스라엘 땅에 회복된 게 하나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예배의 회복입니다. 언약궤를 빼앗기기 전에 드렸던 마지막 이스라엘의 제사가 바로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드렸던 음란한 제사였습니다. 하나님의 제물에 손을 대고, 자신의 것을 취하고, 성전의 여인들을 간음하고,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하였습니다. 이게 이스라엘의 마지막 제사였습니다. 이 무너진 이스라엘 땅의 제사를 하나님께서는 제사장이 아니라 흠이 없는 두 암소를 사용하셔서 회복시키십니다. 흠이 없으시고, 죄가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십자가의 보혈의 능력으로 우리의 예배가 회복된 줄 믿습니다. 예배 회복은 곧 이스라엘 땅의 구원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우리 가정 안에 예배가 회복될 때 구원의 은혜가 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번제물이 된 암소를 묵상하면서 저희 어머니가 떠올랐습니다. 저희 어머니는 당대 신앙이셨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와 불신결혼으로 엄청난 고난과 핍박을 받으셨습니다. 아버지는 알콜 중독자셨고, 교회를 다니는 저와 엄마와 누나를 핍박하였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부터 항상 어머니와 아버지 대화 속에서 빠지지 않았던 단어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혼하자.'였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의 이혼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랐던 저는 늘 정서적으로 불안했습니다. 자기 전에 항상 '부모님이 진짜 이혼하면 어떡하지? 부모님이 진짜 이혼하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라는 불안한 마음으로 잠들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제가 지금 불면증이 있는 것도, 그리고 불안도가 높은 것도 그 10대 시절에 늘 불안하게 잠들어서 그러지 않았나 싶습니다. 제가 청소년 시절에 학교 미술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때 주제가 무엇이었냐 하면 자신의 자화상을 그리는 것이었어요. 저는 굉장히 개구장이였기 때문에 무슨 일을 하든 사람들을 웃겨야 된다는 사명감이 있었어요. 그래서 그 날도 어떻게 하면 이 친구들을 웃길 수 있을까?라는 마음으로 제가 제 자화상을 그렸는데 어떤 그림을 그렸는 줄 아십니까? 바로 저의 영정사진을 그렸습니다. 그것도 빨간색으로 영정사진을 그리고 그 밑에다가 '박재현 사망'이라고 적고 제출하였씁니다. 저는 선생님과 친구들이 웃을 줄 알고 제출하였는데 반 분위기는 한 순간에 적막이 흘렀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 당시에는 '아, 내가 웃음 코드를 잘 맞추지 못했구나.'라고 생각했는데 우리들교회에 와서 양육 받고 그 사건을 다시 생각해 보니까 얼마나 제가 10대 시절에 마음 속에 절망과 분노와 죽음으로 덮여있었는지 그 그림 한 장으로 저의 청소년 시기가 해석이 되더라고요. 아버지는 늘 새벽까지 술을 드시고 들어오셔서 가족들을 깨우셨습니다. 한 날은 아버지가 술을 드시고 집을 찾지 못해서 경찰서에서 전화가 온 일이 있는데, 저는 그때마다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이혼하자고 할까봐 제가 더 아버지 편을 들으서 경찰서에 계신 아버지를 모셔왔던 기억이 납니다. 늘 그 단어가 불안했던 거 같아요, '이혼하자.'라는 말. 그 말이 듣기 싫어서 제가 더 아버지 편을 들었습니다, 우리 아빠 좋은 사람이라고, 내가 아버지 경찰서에서 모시고 오겠다고. 그런데 참고 참았던 어머니가 제가 고등학생 되었을 때 결단을 내리시더라고요. '이제 진짜 이혼하자.' 저희 가족은 부산에서 살고 있었는데 서울에서 살고 계신 큰외삼촌이 내려오셔서 이혼 서류를 준비해 오셨더라고요. 거실에서 이혼이 진행되고 있는데 저와 누나는 각자 방에서 숨죽이고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방에서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소리 내지 않고 펑펑 울면서 이렇게 기도했씁니다. '하나님, 저희 엄마 아빠 이혼 말려주세요. 하나님, 제발 저희 엄마 아빠 이혼 말려주세요.' 이혼 서류 작성이 끝나고 외삼촌이 저와 누나를 불러서 이야기를 합니다. '이제 너희 부모님은 이혼할 건데 너희는 어디로 갈 거니?' 저는 외삼촌의 이야기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엄마한테도 가지 않고, 아빠한테도 가지 않겠습니다. 보육원에 보내주세요.' 자식들 의사도 묻지 않고 이혼을 결정한 부모님의 결정에 제 마음 속에 분노가 터졌습니다. 그래서 보육원에 가서 삐뚤어질 때로 삐둘어져서 반드시 부모님에게 복수하고자 하는 그 복수심이 제 마음 속에 불랐습니다. 하나님은 저의 마음을 보셨는지 감당할 수 없는 그 고난의 시간인 7달이 채워지니까 그때 하나님이 일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아버지의 진정성 있는 사과로 이혼을 결심한 어머니의 마음을 되돌렸고 이혼을 철회하기로 하신 겁니다. 그렇게 아버지는 하나님의 때에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그날로 교회에 등록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술을 완전히 끊으시고 모교회 안수 집사가 되셔서 교회를 섬기고 계십니다. 저희 가정에 찾아온 이혼의 사건이 하나님이 역사하시니 구원의 사건으로 바뀌게 되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우리 가족이 회복되었다는 것으로 이야기가 끝나면 참 해피엔딩인데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머니는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 자녀를 지키기 위해서 참고, 또 참고, 또 참으셨는데, 그 참은 결과 암이 찾아왔고 몸과 마음에 악한 종기가 나서 지금까지도 병원 다니며 치료를 받고 계십니다. 세상적으로 봤을 때는 어머니의 인생이 불쌍한 인생으로 보일 수 있겠지만 구속사의 말씀으로 어머니의 인생을 다시 재해석하니 어머니가 번제물로 드려짐을 통해 저희 가정의 예빼가 회복되었고, 아버지가 구원받게 되었고, 저와 누나는 지금 믿음의 가정을 이루게 되어 예수 씨를 이어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스토리가 저의 약재료가 되어서 청소년 아이들의 가정을 위로하는 구원의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가정은 우리가 지켜야 할 최고의 가치인 줄 믿습니다. 이혼하지 합시다. 가정을 반드시 지킵시다.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 이 한 몸 번제물로 드려진다면 그 인생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인생이 될 것입니다. 다음 주일 전도주일축제가 있습니다. '아버지 품으로' 이번 한 주간 하나님 찾으시는 그 한 영혼을 가슴에 품읍시다. 저희 가정은 아버지 구원을 위해서 10년 넘게 기도하였습니다. 절대 돌아오지 않을 것 같던 그 아버지였는데, 하나님이 역사하시니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한 영혼을 위해 기도하며 내 인생을 번제물로 드릴 때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의 때에 반드시 응답하실 줄 믿습니다. 적용질문입니다.
[적용] 하나님의 언약궤를 잃어버렸나요, 아니면 우리 가정 안에 돌아와 예배가 회복되었나요? 전도할 한 영혼을 위해 주님께 드릴 번제물은 무엇인가요?
기도제목
예선
1.날마다 그날 주시는 말씀으로 야망의 길에서 돌이켜 사명의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2.금요일 출장 앞두고 여러 가지 신경 쓰이는 것이 많은데 여행처럼 잘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도록
3.동생이 부모님 모시고 인지 장애 검사 받으러 가기로 했는데 오고 가는 길 지켜주시도록
은우
1.질서와 관계를 주가 세팅 하신 상황이라는 것을 믿고, 눈물의 기도를 신원해 주시도록
2.연구한 과제들과 회사의 사명을 바꾼것이 갈취 당한 것이 아니라 주가 받으셨다는 것을 믿고, 예배가 회복되는 한주 보내도록
3.호반재단 전시 철거 도와주시고 영육보호해 주시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