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1. 10.
주일예배
본문: 사무엘상 6:1-15
제목: 돌아온 언약궤
박재현 목사님
큐티할 때 말씀이 들리는 그 한 사람 책과 함께 묵상하시면 더 깊은 곳으로 나아가는 것 같습니다.
이 책을 읽다 보면 마음이 편안해져서 잠을 잘 자게 됩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말씀이 들리는 그 한 사람을 찾으십니다. 그 한 사람이 되어서 잃어버린 언약궤 찾으시길 소망합니다.
1. 감당할 수 없는 고난의 시간이 채워져야 합니다.
1-2절.
이스라엘을 끊임없이 괴롭힌 대표적인 민족이 블레셋입니다. 그들이 사는 가나안 지역에서 이스라엘과 블레셋은 공존해서 살았기 때문에 서로 많은 전쟁을 했습니다. 현재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이 일어나는 지역이 블레셋의 5대 성읍 중 하나입니다.
오늘 본문 4장에 보니까 전투가 계속 이어지는데, 그 지역도 오늘날 가자지구 근처에서 일어났습니다. 이 전투에서 이스라엘은 계속 패배하고, 사기도 바닥을 쳐 전쟁을 지는 데에 하나님의 뜻을 구하기보단 전쟁터를 언약궤로 들고옵니다.
이 언약궤를 보고 군사들은 무조건 승리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큐티하고 기도했으니 하는 일이 잘 될거야 라고, 기복적인 신앙관으로 언약궤를 들고 나아갑니다. 언약궤가 성공을 위한 부적이 되었습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패배하고, 정체성과 같은 언약궤를 뺏깁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가 들고 있는 큐티책을 뺏긴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언약궤를 뺏긴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사라진 것이었습니다. 영광을 성공에 사용한 결과로 예배가 무너졌습니다. 오늘 드리는 예배가 성공을 위한 예배가 아닌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가는 예배가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블레셋이 언약궤를 소유하고 고민했을 것입니다. 그 결과 자신들이 믿고 있던 다곤 신전 옆에 언약궤를 보관하기로 합니다. 이 신은 풍요로움을 상징하는 신이었습니다. 그들의 가치관은 물질에 사로잡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내 인생의 유익을 위해서라면 언약궤를 필요할 때 사용하고자 하는 야망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죄악을 부르는 사건이 됐습니다. 멀쩡하던 신상이 넘어지고, 손과 발, 머리가 부서졌습니다. 하나님이 심판하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다곤 신상의 심판의 바람이 백성들에게 갑니다. 오늘날로 치면 흑사병이 돌아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합니다. 이들의 고통 소리가 하늘을 쳤다고 합니다.
1절에 질병이 7달동안 이어졌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재앙, 시간이 채워지니 그제서야 블레셋 사람들이 말을 합니다.
2절.
감당할 수 없는 고난의 시간, 하나님의 시간이 채워지니 그제서야 하나님의 언약궤를 돌려보내고 완전한 항복을 하려고 합니다. 내 욕심과 야망도 감당할 수 없는 고난이 찾아와야 내려놓게 됩니다. 그 시간이 왔다면 구원의 시간인줄 믿습니다.
저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언약궤를 성공의 도구로, 블레셋처럼 야망과 욕심의 도구로 사용했던 마음이 있습니다. 목회자라면 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지나친 영적 교만이 제게 있습니다. 목회자는 아껴야 하고 원리원칙을 지켜야 한다는 바리새인적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신학생 시절부터 지금까지 가계부를 쓰고 있습니다. 100원도 놓치지 않고 쓰고있습니다. 지나치게 거룩한 척을 합니다.
사역이 마치면 무조건 집에 가서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는 것이 가장의 의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 안에 나 정도면 좋은 목회자, 좋은 아빠, 남편이구나 하는 생각이 있습니다. 이런 가치관으로 사니 아내를 바라볼 때 자연스럽게 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마음이 있습니다. 아내는 24살에 저와 결혼했습니다. 그 달콤한 시기에 거룩한 사모 만들기 프로젝트를 진행하기 위해 성경공부를 하고, 퀴즈를 냈습니다.
제 아내는 저와 반대의 삶을 살았습니다. 결혼 후 아내가 새 옷을 사서 자랑하듯이 물어보면 저는 그 옷이 얼마짜리냐고 물었습니다. 가치관이 달라 대화가 통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갈등의 골이 깊어지고 있었습니다. 저는 아내 마음 속에 악한 종기가 자라는 것, 울부짖는 것을 보지 못했고 가족에게 최선을 다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제게 7달이 채워지는 사건이 찾아왔습니다.
울면서 그만 살자고 부르짖는 모습을 보면서 지나친 저의 의로움이 전염병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됐습니다. 그만큼 영적으로 교만했고 내 죄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완전한 징계가 눈앞에 펼쳐지자 죄가 보였고, 하나님과 아내에게 두손 두발 드는 회개의 자리로 나아오게 됐습니다.
그 일 이후 저는 어떻게 변했을까요? 여전히 가계부를 쓰지만, 땅의 언어로 바뀌게 됐습니다. 지난 주에는 울림카페에 갔는데, 성도님께서 하신 말씀이 하나님의 음성처럼
적) 내게 언약궤는 성공의 수단인가요? 구원의 통로인가요?
감당할 수 없는 고난으로 주님께 돌이킨 적 있나요?
2. 좌우로 치우치지 않아야 합니다.
9절.
블레셋에게 감당할 수 없는 고난이 찾아왔고, 그 재앙을 통해 문제 해결로 나아갔습니다. 자신들이 지은 죄의 값을 속건제를 통해 치르면 진노를 피할 수 있겠다는 문제 해결이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하나님이 회개의 기회를 주셨고 말씀이 들리지 않는 사람은 회개가 아닌 해결책만 바란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들려서 이 자리에 앉아 있고 눈물로 회개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인줄 믿습니다.
상황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가 임했기 때문에 이 자리에서 말씀을 듣게 된 것입니다.
블레셋은 이제는 하나님을 시험하기 시작합니다.
언약궤를 하나님의 집으로 돌려보내기를 결정했는데, 방법이 독특합니다. 쇠 수레를 만들고 언약궤를 싣는데, 수레를 매어보지 못한 암소에게 멍에를 씌웁니다. 심지어 암소는 출산한지 얼마 안된 소였습니다. 암소의 모성애를 자극해서 하나님을 테스트했습니다.
12절.
모든 준비가 끝나고 암소는 철저하게 하나님이 이끄시는대로 이스라엘로 나아갑니다. 눈물로 걸어갑니다. 자신들이 낳은 송아지를 생각하지만, 원하는 길이 아닌 하나님의 길을 걷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사명이라고 합니다.
언약궤를 잘못 만지면 죽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도 손대려고 하지 않고 자원하는 사람이 없어서 암소 두마리가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명이란 부르심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서 죽을 수밖에 없던 죄인인 우리를 위해 무거운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시는 모습과 너무나 흡사합니다. 예수님도 고통을 참으시고 눈물로 걸으셨습니다. 이것이 아가페적인 사랑입니다.
암소가 좌우로 치우치지 않았는데, 이것은 절대적인 순종을 의미합니다.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은 말씀이 중심되어 십자가의 길을 걷는 사람입니다.
10.27 집회에 많은 성도님들이 모이셨습니다.
생명을 살리기 위해 눈물 흘릴 때도, 부르짖으며 기도할 때도 있다고 딸에게 얘기해줬습니다. 그 때 자녀에게 사명자의 길을 보이는 것이 믿음의 유산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한 편으로는 지금까지 딸에게 그런 모습을 보이지 못한 것을 깨달으며 회개했습니다.
우리도 십자가의 길을 함께 걷길 소망합니다.
청소년부 한 학생이 용인의 중학교를 다닙니다. 2년 전 토론대회에서 동성결혼에 대한 찬반이 주제였습니다. 젊은 세대는 인권으로 포장된 악의 평범성에 넘어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유일하게 반대했던 학생이 청소년부 친구입니다. 이 친구는 어린 시절부터 구속사의 말씀을 듣고 자랐기 때문에, 인생의 기준되는 말씀을 들었기 때문에 반대하는 편에 섰습니다. 그 결과, 학생은 학교에서 왕따를 당했습니다. 이것이 사명의 길이고 십자가의 길을 감당하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상 첫 시작을 엘가나와 한나의 가정 이야기로 시작하신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배경은 사사시대입니다. 그 당시 핵심 가치관은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마치 지금과 닮았습니다. 수 많은 광고, 미디어를 통해 다음 세대에 이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절대적 기준이 없으니 치우치며 소견대로 살아갑니다.
우리는 지금 포괄적 차별금지법을 반대하는 서명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내 마음 속에 박혀 있는 세상적 가치관, 악의 산당을 제거하는 것이 우선순위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뽑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말씀입니다.
사무엘상 1장에서 한나가 사무엘을 낳고 하나님의 집에 사무엘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양육의 때가 끝나고 하나님의 집에 데려가 평생 여호와께 바칩니다. 한나의 가정 이야기가 나오고 다음 이야기가 엘리의 가문 이야기입니다. 엘리는 한 평생 제사장의 직분을 감당했지만 두 아들을 양육하지 못해 마지막이 너무 비참했습니다.
하나님이 두 가정을 비교하며 사무엘상을 시작하는 것이 우연이 아닙니다. 사사시대에서 다윗 왕조로 넘어가기 전, 룻, 한나, 엘리의 가정 이야기를 보여주시는 것은 가정이 살아야 교회, 나라가 산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활을 걸어야 하는 사명은 다음 세대, 우리가 치우치지 않고 말씀 앞에 서는 것입니다.
적) 지금 걷고 있는 길은 야망의 길인가요 사명의 길인가요?
자녀와 함께 큐티 나눔을 하고 있나요?
지금 나는 큐티 묵상을 하고 있나요?
3. 번제물로 드려져야 합니다.
13-14절.
암소는 치우치지 않고 언약궤의 목적지에 도달했습니다. 사명이 끝나고 자식들에게 돌아간다면 해피엔딩이지만, 번제물로 드려졌습니다. 순교했습니다.
암소는 하나님의 성물을 만졌기 때문에 세속적인 일로 사용할 수 없어서 번제물로 드려졌습니다. 이 제사의 특징은 암소의 모든 것을 온전히, 완전히 태우는 것입니다. 마지막 사명은 자신의 삶을 성령의 불로 완전히 태우는 것, 완전한 헌신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 부활로 완전한 사명을 감당하신 것을 기억하게 합니다. 두 암소의 사명으로 이스라엘 땅에 회복된 것이 예배였습니다. 언약궤를 뺏기기 전 드렸던 마지막 제사가 엘리의 두 아들이 드린 음란한 제사였습니다. 제물에 손을 대고 자신의 것을 취하고 성전의 여인을 간음했습니다. 이 땅의 무너진 제사를 흠 없는 두 암소로 회복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은 흠이 없으시고 죄가 없으신 그리스도의 보혈의 능력으로 인생의 능력을 회복시키시고 예배를 회복시키셨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땅의 구원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저는 번제물이 된 암소를 묵상하며 어머니가 많이 떠올랐습니다. 저희 어머니는 당대신앙이셨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와 불신결혼하시고 고난과 핍박에 시달리셨습니다. 아버지는 알콜중독으로 저와 어머니, 누나를 핍박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항상 등장했던 단어가 바로 이혼하자였습니다. 어린시절부터 이혼을 들은 저는 정서적으로 불안했습니다. 아버지는 늘 새벽까지 술을 드셨고 저와 누나와 어머니를 깨우셨습니다. 한 날은 집을 찾지 못해 경찰서에서 연락이 왔는데, 그 때마다 저는 혹시라도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이혼하자고 할까 불안해서 아버지 편을 들면서 아버지를 모시고 왔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제가 고등학생이 됐을 때 결단을 내리시고 이혼하자고 하셨습니다. 그때 저는 방에서 울며 이혼을 말려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결국 두 분은 이혼하셨고, 저는 부모님에게 복수하고자 하는 복수심으로 살고자 했습니다. 그후 두분은 이혼을 철회하셨고 아버지는 교회를 다니기 시작하셨습니다. 가정에 찾아온 이혼의 시간이 하나님이 역사하시니 구원의 시간이 되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회복된 것만 이야기하면 참 좋을텐데, 어머니는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 자녀를 지키기 위해 참고 또 참으셨는데, 그 결과로 암이 찾아오셔서 몸과 마음에 악한 종기가 나서...
적) 하나님의 언약궤를 잃어버렸나요, 아니면 우리 가정 안에 들어와 예배가 회복되었나요?
전도할 한 영혼을 위해 주님께 드릴 번제물은 무엇인가요?
A
가정의 질서에 순종할수잇는 한주가 되기를
취업을 위한 적용할수있기를
B
매일큐티
여자친구앞에서 잘 죽어질 수 있도록
아버지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기
C
매일큐티
지혜롭게 회사일 잘 해나갈수있도록
D
건강한 한주되길
가정에 좋은 소식이 있기를
E
양교 과제 잘 마무리할수있도록
돈을 지혜롭게 잘 사용할수있도록
학생의 길 잘 걸을수있기를
F
여자친구의 말에 애통한 마음으로 들어주고 적용하기
결혼준비 말씀대로 잘 인도주시길
목원들을 위해 기도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