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1.3. 주일설교 <여전한 산당 제사>
본문 왕하 15:1-7
- 김양재 담임 목사님
오늘은 하나님이 그렇게 싫어하시는 여전한 산당제사에 대해 생각해보겠습니다.
1. 겸손한 환경이 축복입니다. (공동 통치하던 때 24년)
(1-3절) 1절 여로보암 제27년은 아사랴가 단독통치를 시작한 때입니다. 52년 중 공동 통치 한 24년간 무슨 일이 있었냐면 아버지 아마샤는 정직히 행하였으나 돌이키지 않았습니다. 전쟁을 일으킨 책임으로 어린 아들과 공동총치를 해야만하는 일이 생겼고 이후 무리의 반역에 의해 살해당했습니다. 아사랴는 아버지의 잘나가는 모습과 폐인의 모습, 살해당하는 모습까지 모두 지켜봤습니다. 그러니 아버지를 압박한 유다 지도자도 밉고, 반역자들도 미웠을 것입니다.
특히 요아스 이후 유다 왕들이 상처와 연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아버지의 인생을 보며 연민에서 벗어나지 못해 같은 길을 가다가 똑같이 반역으로 살해당한 아마샤의 삶을 보며 또 다시 연민하는 아사랴입니다. 성경을 차례대로 읽어야 이게 보입니다. 그는 겸손한 환경에 있었습니다. 그저 생각만하면 마음에 상처와 연민이 가득했습니다. 그래도 요아스도 아마샤도 정직했기에 아사랴도 성품으로 정직함을 물려받았습니다. 또 아사랴의 어머니도 믿음의 사람이었기에 아들을 믿음으로 키울 수 있었습니다. 믿음의 양육은 고난 중에 빛을 발합니다. 그래서 아사랴의 이름을 역대하에서 웃시야라 했습니다. 열왕기는 공동체의 관점에서 역대기는 구속사의 개인적인 관점에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웃시야가 특히나 그렇고 중요한 기록이 있습니다. 26장 5절에 웃시야가 하나님을 찾았고 그가 여호와를 찾는 동안 형통하게 하셨다고 합니다. 무슨 일이든 스가랴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물었다는 것입니다. 웃시야 할아버지 요아스도 여호야다가 살아있는 동안 교훈을 들었던 것처럼 웃시야도 스가랴 선지자가 살아있는 동안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를 형통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찾으니 패배가 면하여 형통이 되었습니다. 웃시야의 형통은 정말 대단했습니다. 여로보암의 성공과 견줄만 했습니다. 형통의 비결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거꾸로 하고 있습니다.
# 여러분의 환경이 비천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겸손한 환경이라고 생각하십니까?
# 그래서 남을 탓하며 원망합니까? 하나님의 양육을 잘 받고 있습니까?
2. 강성하니 산당을 제거하지않습니다. (14년의 부국강병 시대)
(4절) 북이스라엘 여로보암 2세도 7절로 끝났는데 아사랴의 52년 인생도 7절로 요약이 됩니다. 그가 정직히 행하였다는 말 이후 산당제사와 나병에 대한 이야기로 마무리가 됩니다. 형통하게 되었는데 산당을 제거하지 못했습니다. 전에는 자기 연민으로 산당을 제거하지 못했으나 이후 산당이 익숙해지니 악인줄도 모르고 행했습니다. 남유다의 성군에 속하는 왕들이 아무도 산당을 제하지 않았기에 여전히 산당제사를 백성들이 드렸다고 합니다. 그러니 왕이 제일 문제인 것입니다.
우리가 지난 주일 200만 성도들이 함께 기도를 했습니다. 포괄적 차별금지법의 문제는 죄를 죄라고 말할 수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죄를 익숙하고 평범하게 느껴지도록 만들기에 악법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지금 침묵하는 것이 더 지적이고 교양있게 보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자녀들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 자녀들이 죄가 죄인줄도 모르고 살게될지 모릅니다. 그래서 너무 안듣는 시대이기에 유언으로 남기고자 부르짖은 것입니다.
동성애가 죄인 것은 생명을 낳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생명이 있어야 영혼구원이 일어나는 것이고 창조질서에 어긋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강성해지니 제사장이 아닌 웃시야 자신이 직접 분향을 하고자 합니다. 마음이 너무 높아지니 눈에 보이는 것이 없어졌습니다. 자기가 하나님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웃시야는 제사장들을 향해 칼을 들었습니다. 가족의 사연을 넘어서기가 이렇게 힘이 듭니다. 상처와 연민으로 한이 쌓이니 제사장들만 보면 이가 갈리는 것이 있습니다. 단지 힘이 없으니 눈치보며 네네 하다가 형통하고 강성하니 복수하는 것입니다. 할아버지 요아스도 여호야다가 있을 때에는 눌려있다가 여호야다가 죽자 그 아들 스가랴를 돌로 쳐죽이는 것입니다. 너무 강성하고 형통하니 잘못인줄도 모릅니다. 윗 사람 한 사람이 잘못해서 다 산당제사를 드리는데 형통이 강성함으로 이어져 교만해집니다. 날 때부터 죄인이 맞고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분향하는 웃시야에게 용맹한 제사장들이 나옵니다. 81명이 만류해도 듣지 않고 화를 냅니다. 분노조절이 안되는 것입니다. 무리가 반역했던 아버지를 기억하니 화가 나지만 이것이 여전히 산당제사를 드린 삶의 결론인 것입니다. 그러니 웃시야를 부러워할 것이 아니라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산당예배를 자기연민으로도 끊지 못하고 강성해지니 죄가 죄인줄 모르고 끊지 못하고 결국 듣지도 듣기 싫기도 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가난하면 듣고 부유하면 듣지 않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가난한 사람을 전도해야 합니다. 그 때가 들릴 때이기 때문입니다. 산당을 제거해야 여전한 산당제사가 멈춥니다. 제거할 수 없는게 문제가 아니라 제거하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영적으로 잠이 들었습니다.
겸손한 환경은 이런 잠을 깨워주니 축복인데 형통하고 강성하면 여기가 좋사오니 하며 산당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사회의 모습입니다. 1027을 통해 제2의 종교개혁이 시작되길 원합니다.
내가 옳다는 확신도 산당입니다. 연약함 뒤에 숨어서 내 주장만 하는 것도 산당입니다. 내버려두면 끊을 수 없습니다. 여전한 산당제사를 제거하는 비결은 적용을 해야하는데 여전한 산당제사를 제거하는 것은 여전한 방식으로 날마다 큐티하는 것입니다. 날마다 큐티하며 깨부셔야 합니다.
# 내 욕심과 교만으로 추구하는 내 산당은 무엇입니까?
# 내가 그것을 제거하지 않고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 이제 그것을 제거하기 위해 오늘 무엇을 하겠습니까?
3. 하나님이 치십니다. (나병의 14년)
(5-7절) 형통함과 강성함 가운데 교만해진 웃시야를 여호와께서 치셨다고 합니다. 치셨다의 히브리어는 나가 인데 웃시야를 위해서라기보다 하나님나라의 백성을 위해 치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해 성도인 나를 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고치기 위해 이리저리 만지고 손보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치시고 손보셨다는 왕은 웃시야가 유일합니다. 웃시야 왕이 제사장들에게 화를 낸 그 자리에서 나병에 걸렸습니다. 옷으로 감출 수 있는 곳에 생긴 것도 아닌 이마에 저주의 상징처럼 도장을 찍어주셨습니다. 그러니 웃시야도 하나님이 치시니 속히 나갈 수밖에 없었고 죽는 날까지 별궁에서 지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배 한 번 드린걸로 왜 나병까지 주시나 너무하다고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그렇게 52년간 왕으로 살며 많은 업적이 있었는데 그가 산당에서 제사드리다 나병으로 쳐서 죽었다는 것만 남았습니다. 우리 인생에 하나님과 연결되지 않은 것은 아무짝에 쓸모가 없는 것입니다. 남유다의 아사랴는 이렇게 혹독하게 다루셨습니다. 정직하게 살았는데도 나병에 걸려 살다가 죽었는데 왜 이렇게 아사랴를 세게 대하셨을까요?
이 세상에 교만 중 가장 큰 교만은 영적 교만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왕들은 반역을 하지만 그들은 믿음이 없습니다. 그러나 웃시야는 하나님 자리에 가 모두를 가르치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아사랴가 52년간 왕으로 있었는데 그간 북이스라엘은 짧은 통치기간을 여러번 거치고 있으니 자신이 너무 대단해 제사장처럼 구는 것입니다. 북이스라엘 왕들은 엘리야 엘리사를 계속 찾았지만 아사랴는 자기가 너무 잘나서 찾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보다 더 위에 가고자 하는 그 죄를 하나님은 가장 견딜 수 없어하십니다. 영적 교만은 하나님이 간과하지 않으심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사람이 지위와 권세가 있으며 하나님의 영역을 넘봅니다. 없으면 넘보지도 않습니다. 많은 사람이 믿음 없이 영적인 영역에 도전하고 싶어합니다. 자존적 교만으로 가르침 받기보다 가르치길 좋아합니다. 사람이 자존심의 동물이고 인정받길 좋아하다보니 교회에서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안한다고 하다가 나중에는 왜 안시켜주나 하는 것입니다.
왜 가진 것도 없는데 좋아하지? 하며 내가 더 가르치고 싶어합니다. 영적인 것을 육적인 것으로 해보려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제사장이 받는 인정을 아사랴가 받고 싶어했습니다. 그런데 구원을 위함이 아닌 인위적인 것으로 하니 성령이 임하지 않고 열매가 생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며 상처를 준 제사장들을 실력이 없다 여기며 다 틀렸다고 여겼습니다. 피해자 입장에서 생각하면 천년이 지나도 해결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옳고그름이 아닌 구원의 문제인데, 강성해지니 옳고그름의 문제로 끌고가게 됩니다. 어떤 일이어도 내 입장으로 끌고오지 않아야 하는데, 자꾸 내 입장으로만 끌고가려고 하니 산당제사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별궁에 거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옛사람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는 자가 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죽지도 못하고 사는 그 14년간 웃시야는 얼마나 많은 성찰을 했을까 싶습니다. 그러나 그 시간이 지나고 올 천국이 훨씬 더 크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자살이 미화되고 결혼 안하고 낙태하는 것이 죄라고 말도 못하는 세상입니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이사야가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가 죽고 나서야 부르심을 받습니다.
내가 별궁에 거하게 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여전한 산당제사를 드리는 악을 쳐서 비우시는 영원히 살게하시려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웃시야도 므낫세도 모두 마태복음에 올라갑니다.
24년은 반역자의 지시를 듣고 14년 정도 형통하고 남은 14년은 나병에 걸려 별궁에 거하니 정말 별 인생이 없습니다.
# 여호와께서 치신 사건이 있습니까?
# 어떤 별궁에 갇혀 있습니까? 별궁 같은 상황에서 내가 비워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 공동체를 통해 채워주시는 은혜를 어떻게 누리고 있습니까?
A
큐티하기
한주말씀
B
신교제,신결혼
C
신결혼 잘 인도해주시길
거주할처소 세워주시길
내안에 산당인 자존심이 죽어지길
목원들을 위해 애통한 마음으로 기도하기
D
분별하며 취업 조언 듣기
매일 큐티하고 적용하기
악법 폐지와 태아 생명보호법 제정
E
관계에 있어서 잘 분별할 수 있도록
양교의 자리에 잘 순종할 수 있도록
취업 준비과정에 잘 순종할 수 있도록
F
양육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받기를
사내 특채에 채택 될 수 있기를

다들 커피 감사히 맛있게 잘 마셨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