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19 그 죄에서 떠나라
열왕기하 10:28-36
여러분, 절대 떠나지 못하는 그 죄가 있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정관사를 붙여서 그 죄라고 하는데요. 예후가 철저히, 정말 철저히 개혁을 했는데요. 떠나지 못하는 그 죄가 있다고 하네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 각자가 매여 있는 그 죄에서 떠나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1.금송아지 숭배의 죄 (돈 신의 죄)
28 예후가 이와 같이 이스라엘 중에서 바알을 멸하였으나 29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 곧 벧엘과 단에 있는 금송아지를 섬기는 죄에서는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 지금 바알교도들을 모두 꿀꺽 삼킨 채 서 있던 바알 신당, 바울의 집을 예후가 불사르고 헐어서 변소를 만들어버렸어요. 예후가 이와 같이 바알을 멸했습니다. 여기까지 너무 좋았어요. 그런데 끝이 아니었어요. 바알을 멸하였으나 그러자나요. '멸하였다. 그러나' 그러니까 이 그러나가 예후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예후 통치 기간이 28년인데요. 지금 아직 1년차예요. 1년 동안 아합의 집을 멸하고, 바알의 집을 멸한 건 정말 엄청난 업적입니다. 나라를 구한 영웅 같이 보이는 예후였어요. 하지만 그러나 아직 27년이 남아있는 거예요.잠깐 1년은 연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27년은 속일 수가 없어요. 시간이 지나면 다 드러나는 겁니다. 영웅의 모습 뒤에 감춰져 있는 예후의 모습이 진짜 드러날 수 밖에 없어요. 그 예후의 본 모습 그러나의 실상은 무엇입니까? 떠나지 아니하였더라고 하시자나요. 떠나지 않는 게 예후의 실상이라는 거예요. 어디에서 떠나지 않나요.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라고 하세요. 이름도 길어요. 그냥 죄라고 하기에는 너무 심각한 죄가 있는 거예요. 이건 예후 혼자 범죄한 게 아니라는 거예요.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한 죄고, 파괴력이 엄청난 죄입니다. 그래서 그 아버지 느밧의 이름도 기록이 됩니다. 느밧이 누구였는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성경은 알려주지 않아요. 그러나 여로보암의 죄를 언급할 때마다 그 아버지 느밧이 함께 꼭 등장을 해요. 이건 느밧이 여로보암의 성처럼 쓰이기 때문만은 아니고요. 온 이스라엘을 범죄하게 한 그 엄청난 죄, 그 죄를 시작한 여로보암도 문제지만 그 문제가 다름 아닌 그 아버지 느밧에게서 시작되었음을 알려주는 사인이에요. 그래서 문제아는 없고 문제 부모만 있다는 게 맞아요. 자녀가 속을 썩이면 이때가 기도할 때고, 돌아올 때이고, 말씀을 들을 때인데 여러분 우리들교회 계시면서도 자식 탓을 하고, 부모 탓을 하고, 조상 탓을 하고, 상대방 탓을 하면서 이혼 타령을 하면 말이 안되는 거예요. 오랫동안 부부가 하나가 안 되도 이렇게 보면 서로가 적용을 안 하는 거예요. 무조건 믿음 있는 쪽이 사과를 해야 하는데 부모님들도 사과를 안 하고, 믿음이 하나도 없는 아들, 며느리, 딸, 사위 욕만 하면서 아무도 잘못했다는 사과를 안 해요. 무조건 우리는 '내 탓이다.'를 부르짖어야 하는데 그것이 너무 어려워서, 그 사과 한 번을 못해서, 아니 10 번, 20 번이 힘들어서 교회를 떠나고 싶으세요? 안타까워요. 우리들교회는 이런 집 있으면 안되요. 믿음 있는 그 한 사람이 사과해야 합니다.
그럼 이 사과가 왜 이렇게 안 됩니까?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는 무엇이에요. 벧엘과 단에 있는 금송아지를 섬기는 죄자나요. 그러니까 북이스라엘을 창건한 이 여로보암이 왜 금송아지를 섬기냐 하면, 그 여로보암이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에게 반역을 일으켜서 북이스라엘을 세웠어요. 솔로몬이 여자를 1000명을 얻어 데리고 살고, 밀로를 건축하고 이러니까. 10지파가 합세를 하고 나라가 강성해졌어요. 다 모든 게 있는데 한 가지가 없는 거예요. 성전이 없어요. 그들에게 성전은 그냥 반드시 예루살렘 성전에 한 번씩 가야 되는 게 이들에게는 정체성이에요. 그래서 백성이 예배드리러 예루살렘에 가는 걸 막기 위해서 국경 지역 중심 도시인 벧엘에 금으로 번쩍이는 송아지 신상을 세워놓고 '이것을 하나님이라고 생각하고 기도를 해라.' 북쪽 단에도 하나를 만들었어요. 제사 절기도 7월인데 8월로 막 바꾸고. 그러니까 말씀대로가 아닌, 교회는 교회인데 완전 사이비를 만들어 놨어요. 그런데 그 창시자 여로보암은 요즘에 나오는 예후보다도 더 부지런하다고 그래요. 솔로몬이 인정을 했을 정도예요. 하나님은 예후하고 똑같이 솔로몬의 악정을 개혁하기 위해서 여로보암을 도구로 쓰셨는데요. 여로보암도 미워하는 게 아니예요. 열왕기상 11장 38절에 보면 .... 내 율례와 명령을 지키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내가 다윗을 위하여 세운 것 같이 너를 위하여 견고한 집을 세우고 이스라엘을 네게 주리라 이렇게 하나님이 약속을 해 주셨지만, 그렇게 시작은 좋았는데 이렇게 10지파가 따라나올 줄은 몰랐어요. 금세 남유다보다 강해지니까, 그 다음에는 금세 하나님을 대신할 그 금송아지를 당장 세운 거예요. 그러므로 지금 이제 예후가 그 죄를 따라가게 된 것이에요. 내가 조금이라도 높아지면 당장 하나님의 율례와 명령을 지키지 않은 거예요. 그런데 저는 참 예후도 여로보암도 너무 부지런하여서 이 주군이던 솔로몬이나, 또 이제 북이스라엘의 아합왕에게 가장 신뢰받던 자들이었자나요. 그들도 그때는 몰랐을까요? 그러니 사람 분별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그러니까 큐티할 수 밖에 없는 거예요. 큐티를 하면서 그때 정해주는 말씀의 인도함 따라 하는 거죠. 내가 정하려고 하면 안되는 거예요.
왜 하필 송아지상이었을까요? 농경사회에서 소는 힘과 다산의 상징이었어요. 바알을 가장 확실히 보여주는 동물이 바로 소입니다. 그러면 농사를 짓는데 농사의 신인 바알에게 절하는 것이 뭐가 나쁜 거예요. 교회 가서 내가 입시와 승진과 질병을 위해서 기도를 하는데, 기도하는 거까지는 좋았는데 거기 내 욕심이 들어가서 욕심이 이루어지기를 비니까. '그런데 아니 내가 내 아들 위해서 기도하는데 그게 뭐가 나쁘다는 거예요? 그럼 바알은 나쁘고 금송아지는 좋은 건가요? 바알은 완전 이단이고 금송아지는 정통 교회에서 비는 기복 신앙이라 이거는 괜찮나요?' 다 이런 생각을 해요. 예후는 아합의 주인이었던 바알을 멸했으니까 그 기가 막힌 아합을 뛰어넘었어요. 수 많은 One of them 중에 하나였던 예후가 The only one이 되었어요. 특별 대우, 예복 필요 없어요. 그냥 존재 자체가 특별하니까 행복을 목적으로 하는 인생에게는 다 이루었다가 된 거예요. 만인지상 천상천하 유아독존이 되고 나니까 이제 이 나라가 그 자기가 우려했던 남유다로 복속이 될까봐 금송아지를 불사르고 헐지를 못하는 거예요. 금송아지만 불살라도, 절기만 말씀대로 돌이켜도 개혁 의지가 있다고 보여지는데요. 예후에게는 그런 의지가 1도 없어요. 결국 자기의 권력이 하나님보다 1순위인 거예요. 그러니까 이 얘기인 거예요. 아무리 예루살렘 교회가 가야 되고 은혜가 있어도 가면 절대로 가면 안 된다는 거예요.여러분 하나님 편에서 보면 다같이 내 백성 아니예요? 그러면 하나님이 그거 다같이 키워가실 수 있지 않아요? 그런데 인간적인 생각으로 '거기 가면 내 권력을 뺐긴다.' 이거죠. 그러니 예후가 무엇을 더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아무 문제 없이 이 북이스라엘 벧엘과 단, 여기를 지키기만 하면 되는 거예요. 현상 유지가 곧 행복이에요. 행복만을 위해 사는 사람들의 욕심을 하나로 모아서 잘 먹여주고 입혀주면 되는 거예요. 이를 위한 가장 쉬우면서도 확실한 수단이 바로 금송아지 숭배였어요. 황금을 보여주면서 '너희도 열심히 노력하고 부지런히 일하면, 그리고 내게 충성하면 이 황금을 얻을 수 있다.' 이렇게 가르치는 거예요. 가끔 맛있는 거 주고, 돈도 주고, 예복도 입혀주고 그러면 모두가 '예후, 예후.' 숭배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이제 금송아지교를 통해 자기만 경배받고 싶었던 거예요. 바로 이 욕심이 금송아지를 섬기는 그 죄예요. 여로보암의 후예 중에 한 사람도 못 끊은 말 그대로 그 죄예요. 모두가 북이스라엘에서 정신을 차려도, 안 차려도 금송아지 숭배, 그 죄에서는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그 죄가 바로 북이스라엘의 원죄예요. 마찬가지로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이렇게 죄인이에요. 이걸 인정해야 돼요. 그래서 우리가 높이 올라가면 욕심이 끊어질까? 그런 게 없더라고, 예후를 보니까. 가장 높은 자리에 올라갔는데 욕심을 떠나지 않는 거예요. 올라가보니까 너무 좋은 거예요. 욕심을 채울 수 있는 그런 힘과 지위가 너무 좋아요. 그래서 계속 더 큰 걸 탐내요. 결코 채워지지가 않아요. 끝이 없어요. 그래서 욕심이 바로 그 죄예요. 북이스라엘의 원죄가, 그 죄가 우리의 죄인 거예요. 근본적인 죄, 모든 죄악의 뿌리가 되는 욕심인 거예요.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는다고 하시자나요. 그러니까 이제 바알을 척결했으면 여호와께 돌아와야 되자나요, 여호와를 찾아야 되자나요? 그런데 아무도 여호와를 찾지 않아요. 개혁을 하고 뭘 해도 여호와를 안 찾아요. 왜 그래요? 성령의 도움이 없이는 우리는 금송아지에서 한 발짝도 진도가 안 나가는 게 금송아지 숭배예요. 한마디로 교회를 다녀도 돈을 못 내려놔요, 쉽게. 1대지가 이게 결론이에요. 이건 성령님이 역사하시지 않으면 누구라도 내려놓을 수가 없는 거예요. 이미 반역해서 나갈 때부터 북이스라엘은 그거를 내려놓을 수가 없는 거예요. 이미 반역하는 거는 금송아지를 생각해서 지금 반역하고 나간 거자나요. 적용질문이에요.
[적용] 내 인생 거룩의 여정에서 세상의 성공 때문에 구원의 진도가 도무지 안 나가는 곳은 어디입니까? (불신 결혼, 이혼, 사과 안 함, 목장 떠남, 살림 안 함, 육아 안 함, 회사 떠남, 질병 뒤에 숨음, 각종 사연 등)
조상으로부터 시작된 원죄인 '그 죄'는 무엇이 있습니까?
2.잘~ 보다 전심으로가 중요합니다. (열심의 죄)
30 여호와께서 예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나보기에 정직한 일을 행하되 잘 행하여 내 마음에 있는 대로 아합 집에 다 행하였은즉 네 자손이 이스라엘 왕위를 이어 사대를 지내리라 하시니라 31 그러나 예후가 전심으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율법을 지켜 행하지 아니하며 여로보암이 이스라엘에게 범하게 한 그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 하나님이 이제 예후를 칭찬하세요.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한 일을 행했다고 하세요. 앞서 15절에서 예후가 여호나답에게 자기 마음이 진실한 것처럼 네 마음도 진실하냐고 물었자나요. 여기서 정직이 진실과 지금 같은 단어예요. 예후는 자기마음이 진실하다고 주장을 했는데요. 하나님은 예후의 정직과 진실은 인정해주세요. 그런데 마음이 진실하다는 것이 아니고, 보세요. 잘 본문을 보시면 행한 일이 정직했다고 하세요. 아합의 집을 멀리하고 바알의 집을 멸한 그 일이 진실하고 정직하게 행했다는 거예요. 나아가서 잘~행했다고 칭찬하세요. 하나님이 생각하시고 기대한대로 아합 집에 다 행한 것이, 그 집을 완전히 멸한 일이 잘한 일이라는 거예요. 예후는 정말 뭐든 잘하는 능력자 맞아요. 하나님도 잘했다고 인정하실 정도예요. 그 상급으로 예후 왕조가 4대를 이어지게 하시는 거예요. 북이스라엘에서 가장 길게 이어진 왕조였는데요. 아합 집안을 압도했어요. 북이스라엘을 가장 강하게 일으킨 왕이 이게 그 이후에 나오는 여로보암 2세인데요. 최근 묵상한 호세아서의 배경인데요. 이 여로보암 2세가 이 예후의 증손자예요. 그러나 여기에도 그러나가 있어요. 반전이 또 있다는 거예요. 뭐든 잘 하는 예후지만 그에게도 그러나가 있는데요. 하나님이 이 강력한 왕조를 상급으로 주시며 칭찬하시지만 그 모든 것을 무색하게 하는 그러나가 있는 거예요. 뭐가 문제입니까? 여로보암 1세가 세운 금송아지를 멸하지 않은 거고요. 31절에는 그 바탕이 뭔지 드러냅니다. 예후가 떠나지 않은 그 죄의 또 다른 본질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데요. 뭡니까? 전심으로 지켜 행하지 않은 것이 있대요. 무엇을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율법을 전심으로 지켜 행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모든 걸 정직하고 진실하게 했고 좋은 결과를 냈는데, 그러나 But, 전심으로 하지 않은 게 있다는 거예요. 전심으로는 열심히가 아니예요. 열심과 전심은 달라요. 우리가 흔히 '열심히 하지만 말고 잘 해봐.' 여러분들 제일 힘든 상사가 무능한데 부지런한 상사라 그래요. 일은 못하면서 열심만 앞서는 상사가 최악이라는 거예요. 해결책은 주지 않고 무서운 열심으로 Tank처럼 밀어부치기만 하니까 왜 안 힘들겠어요. 반대로 가장 좋은 상사는 게으른데 유능한 상사래요. 왜냐하면 해결책만 주고 괴롭히지를 않아, 게을러가지고. 그러니까 잘이 열심보다 중요한 거는 맞는 거 같아요. 여러분은 전자입니까, 후자입니까. 생각해보세요. 열심은 말 그대로 뜨거운 마음이에요. 내 생각, 내 원함, 내 목표를 이루려고 내 에너지를 뜨겁게 태우는 활활 태우는 거예요. 히브리어로 부자면 열심은 기본적으로 소유와 관련이 있어요. 뭔가를 너무 가지고 싶을 때 타오르는 마음이 올라와요. 또, 가지고 있는 것을 뺏기지 않으려고 용을 쓰는 마음이에요. 그 뿌리가 욕심이라는 거예요. 즉 금송아지 숭배하는 그 죄라는 거예요. 아무리 선한 열심도, 심지어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라도 마찬가지 일 수 있어요. 쉽게 말하며 야망과 사명의 차이인 거예요. 야망에 열심을 내야 되지만 사명은 전심으로 행해야 되는 거예요. 그런데 전심은 온전한 마음이에요. 나뉘지 않는 마음이에요. 집중되어 있는 마음이에요. 두 주인을 섬기지 않는 마음이에요.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바알이나 금송아지 섬기는 건 특별한 열심일 수는 있지만 결코 전심은 아니예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황금을 쫓아다니는 것은 특별한 열심이지만 전심은 아니예요. 한 나눔에 보니까 '주보에 열심 끝은 속임수입니다.라는 문구가 있었어요. 저는 그 문구가 울림이 됐어요. 나도 한 열심 하는 게 있는데 결국은 속임수다.' 이게 맞습니다. 우리는 잘하기 위해서 열심을 내요. 잘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없으면 열심도 생기지 않아요. 그런데 전심은 좀 다릅니다. 전심은 뭘 잘하기 위해 생기는 마음이 아니예요. 하나님께 예배하는데 전심인 사업가는 우선 순위가 예배에 있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는 사업을 잘하지 못할 수도 있어요. 주일 성수하고, 교회 봉사하고, 지체들 섬기고, 목장하고, 이게 전부 시간이고 에너지인데 사업에 올인 할 수가 없을 수도 있죠. 세상에서는 실적이 안 나올수도 있어요. 그런데 여러분들의 목적이 성공이면, 이게 중요한 거예요. 하나님께 전심일 수가 없어요. 전심이냐, 열심이냐. 하지만 중요한 것은 열심도 아니고, 잘하는 것도 아니예요. 이 둘도 중요하긴 하죠. 열심히 할 때는 열심히 해야 하고 잘 해야 할 때는 매우 잘 해야 합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열심이나 잘이 아니라 전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는 거예요. 누가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하셨어요? 누가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사람이에요? 열심이 하는 사람이 아니예요, 잘하는 사람이 아니예요. 주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큐티하는 사람이 가장 지혜로운 인생의 건축자인 거예요. 어떤 사건이 와도, 어떤 고난을 당해도 어떤 성취와 성공을 얻어도 삶의 기준이 하나님의 말씀에 있는 사람, 날마다 큐티하는 사람이 전심으로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사람인 거예요. 그런데 열심히 살고 너무 잘하는 한 가수가 있는데 뺑소니 운전을 했어요. 그런데 큐티를 안 하니까 처음이 거짓을 고한 거예요. 그래서 이게 전국적으로 일파만파가 됐어요. 그래서 여러분들의 사소한 큐티 적용이 그게 사소한 게 아니예요. 그 사소한 큐티 적용이 우리들교회를 여기까지 가져오게 한 줄 믿습니다. 여러분들 가정도 그 사소한 적용 때문에 하나님이 다 살려주신 거예요, 아십니까? 그러니까 그 분은 이걸 누가 가르쳐 준 사람이 없는 것 같아요. 너무 안타까워 그걸 알았으면 됐을텐데 힘들다가 갑자기 돈이 생기니까 가는 게 술집일 수 밖에 없자나요. 너무 안타까워요. 열심도 우리가 지을 수 있고, 잘하는 것도 우리가 할 수 있어요. 전심으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은, 그런데 우리 힘과 능으로 할 수 없는 거예요. 전심으로 사는 건 오직 성령께서 임하셔야 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남을 정죄할 수 없어요. '너는 왜 전심이 안 되냐?' 이걸 못 알아듣는 거예요. 그러니 내 설교가 어려운 거예요. 어렵죠? 어려워요.
열심의 모델이 예후라면, 이 전심의 모델이 있을 거 아니예요? 그동안 10장에 계속 나왔던 여호나답이 있자나요. 그런데 열심의 모델 예후 왕조가 4대나 이어지게 된것을 다 순종에 대한 보상으로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이죠. 그런데 S. G. 그라프는 예후가 받은 이 같은 4대가 축복의 의미만 있는 게 아니고 심판의 의미도 있다는 거예요. 뒤집어 생각해보면 예후 왕조가 4대까지만 이어지고 아합 왕조와 똑같이 그 왕위가 찬탈되고 멸망당하게 되리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칭찬에는 비록 표면적으로 표현되지 않았지만 아합 집안을 멸망시키고 자신이 왕이 되려는 권세욕과 금송아지 우상 숭배에 대한 심판의 메세지가 딱 담겨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 본문이 아합 집안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의 성취이기 때문에 이를 수행한 예후의 죄악이 열거되지가 않았다는 거예요. 그만큼 예후는 죽기까지 이걸 못 알아들었어요. 끝까지 이 말을 못 알아들었어요. 그래서 악한 날에 악한 자를 쓰신 결론으로 그냥 끝났어, 이 말을 못 알아듣는 거예요. 이에 비해 전심의 모델인 레갑이 있죠. 이런 불완전한 종교 개혁을 한 예후의 모습을 레갑 족속의 이 조상인 여호나답이 지켜봤어요. 보니까 바알 숭배가 일시적으로 중단되었지만 이스라엘의 근원적 회복은 멀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거예요. '내가 속았구나.' 예후는 이해타산의 자기 목적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때부터 여호나답의 말 듣기를 거부했어요. '금송아지를 철폐해라.' 안 들어요. 적극적으로 거절했어요. 아마도 두 사람이 이 지점에서 갈라서지 않았을까 생각을 해봅니다. 아마 이때 큰 좌절을 경험한 여호나답이 사마리아를 떠나 광야로 들어가지 않았을까요? 자기 열심이 앞서 분별 없이 예후 편에 섰던 것을 후회했을 거예요. 그러나 택자는 '저 놈의 예후놈을 죽여야지.' 그러지 않죠, 그렇죠? 펄펄 뛰면서. 택자는 항상 '내가 틀렸다.'자나요. '내가 틀렸어요.' 결국에는 엘리야와 엘리사의 사역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지 않았던 자기 죄악을 회개하고 예후에게 인간적인 기대를 하며 인본적인 열심을 내었던 자기 죄악을 회개하면서 후손들이 영원히 지킬 경건의 명령을 이제 내리게 된 거죠. 여러분 예후 개혁의 시초는 나봇의 포도원 사건이었어요. 토지의 영구 매매를 금지하고 희년에는 이제 원주인에게 돌려주자나요. 토지를 기업으로 주신 하나님의 토지법과 토지의 사유를 허용하는 바알의 토지법이 충돌하는 결정적인 사건인 거예요. 문자적인 공산주의 독재의 토지법을 말하는 것이 아니예요. 우리나라가 잘 살게 된 것은 우리 이승만 대통령이 농지개혁을 잘 했기 때문이자나요. 그 얘기를 하는 게 아니고 나봇의 포도원은 하나님 나라와 세상 나라의 충돌을 의미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럴 때 여호나답도 예후처럼 총칼 들고 혁명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아, 이제 한 번은 내가 이 편을 들어줬지만 이제 나는 삶의 본을 보이는 것 밖에 할 수 있는 게 없구나.' 그래서 그는 개혁 공신의 상을 다 버리고 레갑 족속에게 광야로 들어갈 것을 명령했어요. '나그네 인생처럼 집도, 논도, 밭도 어떤 것도 소유하지 말고, 농사를 짓지 말고, 유목민으로 살아라.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기 위해 비천하게 살아라. 포도주를 먹지 말아라.' 그것은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살라는 명령이에요. 그리고 언제나 떠날 수 있는 인생을 살라는 거예요. 우리가 뭐가 많으면 떠나기가 어렵자나요.
그런데 어떻게 그들은 10년도 아니고, 250년이 넘게 그렇게 살 수가 있었을까요? 바로 광야가 답이에요. 광야는 물이 없자나요. 당연히 농사를 지을 수가 없어요. 낮에는 너무 뜨거워요. 밤에는 너무 추워요. 가진 것도 없어요. 물도 없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을 찾게 되죠. 여러분, 히브리어로 말씀이 다바르예요. 그런데 광야는 거기 전치사 하나가 더 들어가서, 미가 들어가서 미드바르 이렇게 되는 거예요, 미하고 합쳐서. 그러니까 말씀으로부터라는 뜻을 가지고 있어요, 광야가. 그러니까 말씀이 나오고 말씀이 들리는 곳이 광야라는 거예요. 우리들교회 광야 가운데 있는 분들이 다 지금 주인공이 되셨어. 그분들이 없으면 우리들교회는 이렇게 올 수가 없어요. 금수저들이 말씀이 안 들리자나요, 그렇죠? 금수저님께 죄송. 그러니까 시편 1편에도 악인의 길이 있고 의인의 길이 있는데 의인의 길은 복 있는 사람의 길이고, 말씀을 묵상하는 자의 길이라고 그러고 말씀을 주야로 즐거워하면서 묵상할 때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다고 했자나요. 그러니까 이렇게 금송아지 길을 택한 예후는 악인의 길을 택한 거죠. 그러니까 이럴 때 바알 개혁, 아합 개혁 다 하고 광야의 길을 택한다는 것은 북이스라엘의 모든 왕 중에 한 사람도 택하지 못한 길이에요. 그런데 그것을 바로 레갑 족속이 택했어요. 왕은 택하지 못해도 택자는 택하는 광야의 길입니다. 예레미아 35장에 보면 이로부터 256년 뒤에 하나님이 레갑 족속을 시험했어요. 그런데 포도주를 입에 대지도 않았어요. 그들을 칭찬하시죠. '야, 레갑 족속은 선조의 말도 듣는데 너희들은 어찌하여 하나님을 안 듣느냐?' 35장 읽어보세요. 그러므로 열심과 전심은 아주 다릅니다. 여러분들 99% 합격은 없어요. 99.9% 합격도 없어요. 100%만 합격, 100%가 전심으로 섬기는 거예요. 100% 섬기는 것은 내가 섬기는 것이 아니고 적용하는 거예요. 광야로 들어가는 거예요. 말씀이 들리는 길로 나가는 거예요. 에스겔 36장 27절에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는 이 전심은 우리 안에서 생기는 게 아니라 위로부터 내려오시는 성령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행하시는 은혜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주님을 섬긴다고 '너는 왜 못 섬겨.' 이렇게 말을 하면 그것도 아닌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애통할 수 밖에 없어요. 우리가 목회자 세미나로 한국 교회 섬긴지가 딱 10년됐어요. 2014년 10월에 시작했으니까 1회 때부터 그야말로 전심을 구했어요. 제가 제 주제에 열심으로 해서 되겠어요. 전심, 전심 밖에 없어요. 10년을 달려왔어요. 제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거든요. 때마다 제 전적인 무능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환경에 묶어두셨어요. 설교는 쉬웠어도 지금 목회자 세미나를 쉰 적이 없어요. 항암 때도 모자 쓰고 3박 4일을 혼자 다 감당했어요. 여러분들 모르시죠? 그런데 그때 막 있자나요, 뽀빠이 강철 같은 힘이 나와가지고. 2시간도 앉아 있기도 힘든데 3박 4일을 강의를 그래도 혼자, 거의 혼자 했는데 너무 놀라운 일 아니예요? 위로부터 성령이 내려오셔서 주님만 의지할 수 밖에 없었고, 저절로 전심으로 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들 모두가 성령으로 한 말씀, 정말 함께, 한 성령으로 기도와 섬김으로 함께 해주셨기 때문에 이제 그 열매 보기 시작해서 점점점점 많이 오십니다. 죽어가는 한 사람, 한 가정, 한 교회가 살아났다는 간증을 우리나라에서, 세계 곳곳에서 듣게 하십니다. 여러분을 통해서 하나님이 전심으로 이 땅에 이루어가시는 구원인 줄 믿습니다. 적용질문이에요.
[적용] 내 열심입니까, 하나님께 전심입니까? 광야가 말씀이 나오는 비결인 것을 믿습니까? 어떤 광야에 계세요? 물질, 건강, 인간 관계 (나 홀로, 부부 간, 부모 자식 간, 목장, 회사, 학교) 등에서 전심으로 지켜야 할 사명은 무엇입니까?
3.업적은 그 죄를 가릴 수 없습니다. (업적의 죄)
32 이 때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서 땅을 잘라 내기 시작하시매 하사엘이 이스라엘의 모든 영토에서 공격하되 33 요단 동쪽 길르앗 온 땅 곧 갓 사람과 르우벤 사람과 므낫세 사람의 땅 아르논 골짜기에 있는 아로엘에서부터 길르앗과 바산까지 하였더라 34 예후의 남은 사적과 행한 모든 일과 업적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35 예후가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자매 사마리아에 장사되고 그의 아들 여호아하스가 그를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36 예후가 사마리아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린 햇수는 스물여덟 해이더라
-> 열심이던 예후에게 이 문맥상 당장 심판이 임하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그래서 성경을 차례차례 봐야 돼요. 구속사로 인생을 해석해야 돼요. 여호와께서 금세 이스라엘 땅을 잘라내기 시작합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자나요. 하나님이 엘리사를 통해 세우신 아람왕 하사엘이 있자나요, 그렇죠? 기억나시죠. 채찍으로 쓰십니다. 아합을 치던 채찍이던 예후가 이제 하사엘 채찍에 매를 맞게 되었어요. 아합 왕조 때는 찔끔찔끔 공격하던 아람인데 이젠 이스라엘 모든 영토에서 대대적인 침략을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인생이 그래요. 1조를 벌면 대단하자나요. 그런데 1조를 벌면 2조를 벌려고 회사를 더 키우기 위해서 뺏기고 뺏기는 전쟁이 끝이 없어요, 대단한 그냥 재벌이 쾅 무너지고 새로 새워지고. 그래서 결국 요단 동편 땅을 전부 빼앗깁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요단 동편 땅 전부를 잃은 왕조는 예후 전에는 없었어요. 아르논, 길르앗, 바산, 이게 이스라엘에서 가장 비옥하고생명력이 풍성한 땅인데요. 그 땅을 다 빼앗겼어요. 이 땅은 르우벤, 갓, 므낫세 반지파가 여호수아 시절 '우리에게 이 비옥한 동편 땅을 달라.'고 그랬던 거 기억나시죠. '거기는 동편이라 성전이 없다.' 그래도 '반드시 예배 드리러 오겠다.' 너무 청을 하니까 그거 줬어요. 내 눈에 보기 좋은 땅은 남의 눈에도 똑같이 보이는 거예요. 그래서 늘 트랜스 요르단 지역이 늘 열강의 각축장이 되어서 결국은 마지막에 앗수르에게 다 빼앗기는 거예요. 여러분, 잘생긴 남자, 여자 그렇게 내 눈에 좋으면 결혼해서도 너무나 조그만 일 생기면 이혼하겠다고 그래. 내가 어디 가서 다른 남자, 여자 만날 줄 알고. 그러니까 얼굴의 광야를 좀 택하시기를 바래요. 다들 있자나 좀 안 생기면 '나 밖에 살아줄 사람이 없다.'고 이혼을 절대로 안 한다자나요. 그런데 서로 잘생기면 책임이 없다자나요. 그러니까 이렇게 서로 좀 생긴 게 너무, 그러니까 광야, 오늘 광야, 노래도 광야를 할 건데, 광야, 직업도 광야를 좀 택하시기를 바라고, 남이 안 가는 데를 가기를 바라고, 그렇게 여러분들이 돈, 돈 따지고, 외모 따지면 결과적으로는 예후처럼 되는 거예요. 광야를 택하는 게 축복이에요. 예후가 아합을 이겼다고 좋아했을텐데 이제는 아합 뿐만 아니라 그 앞에 있던 모든 왕들보다도 더 못하게 된 수치를 당했어요. 땅을 다 빼았겼자나요. 수 년 후에 여로보암 2세가 영토를 회복했지만 여로보암 2세도 금세 그 후에 다 앗수르에 의해서 망했어요. 여기 업적이라는 단어는 원어로는 위대한 일, 큰 일이라는 뜻인데요. 열왕기상에서는 권세라고 번역되어서 몇 번 나왔는데 열왕기하에서는 업적이라는 말로 번역했어요. 그런데 그게 쓰인 사람은 유다에서는 그 마지막에 히스기야 빼면 전부 다 북이스라엘의 예후와 그 후손들이에요. 예후, 여호아하스, 여호아하스, 여로보암. 진짜 예후에게 열심과 능력의 DNA가 있어요. 다윗을 배반하고 나가가지고 잘 먹고 잘 살았어요. 그러니까 주님께로 안 돌아와요. 예후는 위대한 왕가예요. 어찌되었든 업적을 남깁니다. 그런데 그 업적이 뭔지는 아무도 몰라요.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었다고 하는데 그 책은 없어진지 오래고, 유적하나 남아있지 않아요. 아무리 업적을 많이 남겼어도 다른 모든 평범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죽어서 그냥 무덤에 들어갔고, 영원할 것 같던 왕좌는 아들에게 넘겨줄 수 밖에 없었고, 28년 왕좌에 있었지만 1년 칭찬받고 27년 동안 아람에게 영토를 빼앗기는 수치를 당하며 살다가 죽었어요. 그는 이 수치를 가리려고 더 무서운 열심으로 정치를 했던 걸까요? 그러니 업적을 남겼겠죠. 그러나 그 위대한 업적이 흔적도 없이 다 사라졌어요. 다만 성경에 기록되어 영원히 남은 건 뭐예요? '그가 그 죄에서 떠나지 않았다.' 이건 우리에게 이렇게 열심히 남겨졌어요. 아무리 대단한 업적도 그의 수치를 가릴 수는 없었어요. 더욱이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심으로 지켜행하지 않은 그 죄, 그래서 끝까지 금송아지 우상 이고 지고 살았던 그 죄, 온 이스라엘의 여전히 여로보암의 죄 가운데 내버려둔 그 죄를 그 업적은 가릴 수 없었어요. 발가벗은 자기 몸이 다 드러나있는데 그저 자기 눈만 손으로 가리고 살았던 거예요. 이 땅에서도 심판이 시작되었던 거예요. 그래도 여러분들은 너무나 예후가 좋죠?
이에 비해 광야로 간 레갑 자손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레갑 자손은 BC 722년 북이스라엘의 멸망 때도 살아남았고, BC 586년 남유다의 멸망때도 살아남았어요. 그들은 집이 없고 장막을 짓고 유목 생활을 하는 자들이었기 때문에 이동이 쉬웠어요. 신앙 생활을 잘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지만 비천한 삶과 청빈은 그들을 보호하는 수단이 되어주었어요. 열왕기하 24장 14절에 보면 그가 또 예루살렘의 모든 백성과 모든 지도자와 모든 용사 만 명과 모든 장인과 대장장이를 사로잡아 가매 비천한 자 외에는 그 땅에 남은 자가 없었더라 여기서 비천한 자라고 성경이 표현을 했어요. 비천한 그들은 나중에 포로에서 돌아올 때 느헤미야 3장에 보면 성벽 중수할 때 레갑의 아들 말기야가 분문, 똥문을 중수했다고, 가장 힘든 문을 중수할 수 있는 영적인 힘이 있는 거예요. 그들은 처음부터 Total850년 동안 조상의 명령을 지키다가 예수님의 탄생도 가장 먼저 보는 목동들이 되었다고, 목자가 되었다고 하죠. 레갑은 항상 낭자가 되어 지금까지도 여리고에 가면 볼 수가 있다고 해요. 예수님 재림 때도 이런 레갑 족속같은 자가 제일 먼저 뵐 것입니다. 늘 비천하고 묵묵하고, 늘 자기 자리에서 잘 섬기는 자들이죠. 예후의 엄청난 업적도 결코 그가 떠나지 않았던 그 죄를 가리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행한 어떤 업적도 우리 죄를 덮을 수는 없어요. 하나님께서 전심으로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보내셨습니다. 성자 예수님은 죽음까지도 마다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향해 전심으로 다가오십니다. 그 전심으로 십자가를 지셨어요. 그리고 이제 성령님이 우리 삶의 안으로 오십니다. 성령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와 함께 살아주십니다. 허물 많은 우리 삶을 덮어주고 계세요. 성령님의 전심으로 지금 우리가 여기 하나님 앞에 나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품고 계세요. 용서하시고 위로하시고 힘을 주세요. 우리가 더럽고 약한 인생이지만, 여전히 저마다 짐처럼 이고 있는 그 죄를 떠나지 못하고 있는 쓸모 없는 인생이지만 이제 우리도 우리 죄의 자리를 떠나서 하나님께서 맡기신 거룩한 사명의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 모든 언행에서, 우리 가정에서, 학교에서, 일터에서 때마다 일마다 우리를 옭아매려고 하는 그 죄를 떠나야 합니다. 성령과 함께 성령을 힘 입어서그 죄에서 떠나야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이 땅에서만 아니라 천국에서 영원히 빛날 진정한 업적일 줄 믿습니다. 적용질문이에요.
[적용] 그 죄와 광야의 비천한 생활을 가릴 업적 쌓으려다가 더 큰 수치를 당했던 적은 없습니까? 입시 실패, 취업, 재수, 승진누락, 허황된 재테크, 외모지상주의
비천한 삶과 청빈함이 나를 보호해 주실 것을 믿습니까?
주제를 알고 '맞습니다'합니까, '그게 아니구요'합니까? 그래서 지금은 내 죄를 가려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고 있습니까?
기도제목
예선
1.다음주에 외국인 매니저가 한국에 와서 같이 다같이 팀빌딩을 하는데 팀이 분열되어 있어 제가 중간에서 정리해서 스케줄을 짜고 있습니다. 열심이 아니라 적용으로 준비하여 주님 주시는 은혜로 통과할 수 있기를
은우
1.열심의 잘~과 성공의 금송아지로 나의 죄를 가릴 수 없음을 기억하고, 보내주신 그곳에서 전심으로 감사하며 하루만 살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