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양원 목사를 향한 대역사를 이루신 곳은 애양원부터 시작된다. 애양원에는 나병환자들만 있었다. 세월이 흐르며 나병환자들과 손양원 목사는 사랑이 깊어졌다. 1940년 9월 25일에 수요예배 끝나고 집에 가보니 일본형사 두명이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버지가 들어가자마자 일본형사가 손에 수갑을 채워 나가는데 죄명은 신사상배이다. 그리고는 애양원에는 안또라는 일본 원장이 들어오는데 일본 원장이 나병환자들도 다 내 #51922;아서 목사님네 가족은 부산의 산 꼭대기에 있는 집에서 갈게 된다. 그때 그의 큰오빠 작은 오빠가 7남매 먹여살리기 위해 나무통 만드는 일을 했다. 1943년 5월 17일이 아버지가 나오시려고 했던 날이였다. 그런데 형무소에서 아버지가 나오시지 않으셨다. 그래서 어머니께서 가셨더니 종신형을 선거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곳에서 독방에서도 엄청 힘들게 생활을 하셨다, 그러던 날 손정희 권사님과 동생은 고아원에 가게 되었다. 고아원에서 계속 그리워 하다가 그리움이 너무 커져 부모에 대한 원망이 커졌다. 고아원이 온지 1년 후 8월 15일 광복이 되었다. 그리고 아버지가 감옥에서 해방이 되셨다. 가족은 모두 #55135;어져 살아서 아버지가 해방되시는데 마중도 못 나갔다. 그래서 고아원에 오셔서 옷과 신발을 갈아 입으셨다. 그 뒤에 고향으로 돌아가서 그의 형제들은 학교에 들어갔다. 그러던 어느날 중학교 1학년일때 소풍을 가는데 큰 오빠가 과자와 돈을 주었다. 그것을 세 번이나 반복을 했다. 그것이 오빠의 마지막 모습이였다. 소풍을 끝나고 집에 왔을 때는 두 오빠가 시체가 되어있었다. 여수 반란 사건이 있는 곳에 갔는데 그 뒤는 3500명이 죽었다는 소식이였다. 집에 가보니 옆집 사람이 오빠들 시체를 옮겨 두었다. 오빠들의 시체에는 머리 이마 등에는 엄청난 총자국과 폭력 자국이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하나님을 원망하면서 하루 종일 울었다고 한다. 오빠가 죽은 날은 1949년 10월 21일 이였다. 증언자들이 말하길 어떤 학생들이 오빠들을 밧줄로 묶고 친구들이 두들겨 패고 큰 오빠와 작은 오빠를 사형장으로 갔다. 나중에 오빠를 죽인 사람이 사형선고를 받았는데 손양원 목사님이 때리지도 말고 살려주라고 말해서 손동희 권사님께서 가서 그사람 때리지도 말고 살려달라고 중1때 가서 말해서 그사람을 양아들로 삼았다.
느낀점
나는 만약 손양원 목사님이라면 교도소에서 일본 천왕을 믿겠다고 살려달라고 했을것 같다. 그리고 일제시대 생각하면 독립운동가들만 불쌍하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목회자들도 힘들게 살았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되었다.맨 처음 이 책을 읽어야 된다고 엄마아빠한테 말하자 그 책을 사다가 먼저 읽으셨다. 결국 나는 책으로 보단 삼일교회에서 권사님께서 간증하는 것으로 썼다. 책에 대하여 말하는데 엄마아빠가 말씀하셨다. 아빠의 나이와 손양원 목사님께서 돌아가신 나이와 같고 손양원 목사님께서 교도소에 갈때 첫째아들과 오빠의 나이가 같고, 두 아들이 죽을#46468; 작은 아들의 나이와 오빠의 나이가 같은것이다. 그리고 두 오빠는 10월 21일날 사형소에서 죽음을 맞이 했지만 우리오빠는 10월 14일날 사건이 터졌다.손동희 권사님께서 양아들 죽이지 말라고 할때도 중1이다.그리고 두 아들을 죽인 아이를 양 아들로 삼는것을 보면서 정말 대단하다고 했다. 내가 만약 손동희 권사님이면 내가 나가겠다고 하면서 반대를 했을것 같고 손양원 목사님이라면 데리고 와서 온갖 학대를 다 했을것 같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손양원 목사님은 정말 하나님께서 사랑하실 사람이다 라는 생각도 들었다. 나중에 손양원 목사님 순교기념관 한번 가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