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1.15.토요일 사도행전 26장 24-32절 성령의 전도
19세기 프랑스에서 활동했던 인상주의 화가들은 시시각각 변화하는 현상 속에서 사라진 현상의 흔적에 남아있는 영원의 한 조각을 화폭에 담고자 하였습니다. 인상파의 아버지 세잔은 수많은 사과 정물화에서 시들어가는 사과의 본질을 담고자 하였고, 모네는 건초더미에 머무는 햇빛과 바람과 기온과 습도의 변화를 관찰하여 표현하고자 수많은 건초더미 연작을 그렸습니다. 인상파 화가들이 가장 중요시 여겼던 것은 ‘관찰’과 ‘표현’이었습니다. 같은 현상을 보아도 머물지 않는 순간의 현상만을 보는 사람들과는 달리 인상파 화가들은 변하는 현상에서 변하지 않는 본질과 영원을 관찰하고, 순간에 머무는 영원을 포착하여 빛과 명도와 색조와 터치와 구도로 자신만의 디테일을 담아 표현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라질 현상만을 붙들고 자랑하며 의지해서 사는 총독과 왕에게 휘말리지 않고 영원히 변치 않는 복음을 디테일하게 전하는 사도 바울을 볼 수 있습니다. 영원한 복음의 본질을 체득하여 총독과 왕의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심리를 예리하게 관찰하면서 디테일하게 전하는 성령의 전도는 어떤 것인지 THINK해 보기를 원합니다.
주님 말씀하소서
듣겠습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였습니다 아멘.
참되고 온전한 말
바울이 이같이 변명하자 베스도가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베스도가 “바울이 네가 미쳤구나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고 크게 소리를 내질렀습니다.
바울이 얼마나 당황했겠습니까? 그러나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어떻게 대응하였습니까?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온전한 말을 하나이다”고 변증을 이어갑니다. 아무리 총독이라고 해도 면전에다 대고 미쳤구나하는 미친놈 소리를 들으면 감정이 격해지고 반발하기 쉽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바울은 베스도를 각하, Most excellent라는 최고의 존칭어를 써서 부릅니다. 자신이 욕먹었다고 감정에 휘둘리는 미친 사람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사리분별할 수 있는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를 통해 자신이 간증한 복음도 참되고 온전한 말이라는 것을 입증하였습니다. 감정적으로 나오는 베스도보다는 관망하는 태도로 직관하는 왕에게 초점을 맞추어 “왕께서는 이 일을 아시기로 내가 왕께 담대히 말하노니 이 일에 하나라도 아시지 못함이 없는 줄을 믿나이다. 이 일은 한쪽 구석에서 행한 것이 아니니이다”며 왕도 알고 있었던 것이라고 복음을 객관화시킵니다. 부임한지 얼마안되어 유대실정을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 어려운 베스도 총독과 달리 아그립바 왕은 유대북부 갈릴리 지역을 다스리는 분봉왕으로서 갈릴리 출신 선지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갈릴리와 유대 지역에서 행하신 표적과 전하신 말씀에 대하여 이미 다 진상을 파악하고 알고 계실 것이라고 확신하였습니다. 국정에 관심이 있는 왕이라면 그 정도 사안을 이미 관찰하고 파악했을 것이기에 이것은 아그립바를 자질이 있는 왕이라고 칭찬해 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더 나아가 왕이 유대 혈통이 섞인 성경을 믿는 유대인이라는 것을 근거로 더 담대하게 묻습니다. “아그립바 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빛으로 자신을 만나주시고 이방인의 빛으로 삼아 주신 것이 선지자가 전한 성경에 예언된 사실이라는 것을 변증하는 말이었습니다. 성경 말씀으로 훅 들어오니 아그립바가 어떻게 당황하였습니까? “내게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고 자기방어를 했습니다. 아그립바가 바울이 자신을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한다는 용어를 쓴 것으로 보아 아그립바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자세히 알고 그리스도인들의 실체와 존재도 명확히 파악하고 있음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성경을 믿는데 성경이 증거하는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니냐는 바울의 논조에 말려들 것을 알고 바울이 전한 복음과 간증을 '적은 말'로 폄하하며 복음에 대한 거부반응을 보입니다.
이는 아무리 성경이 증거해도 초라한 나사렛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정하고 영접하면 자신이 누리고 있는 호화찬란한 기득권을 잃어버릴 것 같은 불안과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바울은 아그립바의 말을 어떻게 되받아쳤습니까?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 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고 하였습니다. 당신 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한다는 것입니다. 왕이든 총독이든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이 나처럼 결박된 것 외에는 나같이 광명한 정오의 빛으로 오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서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고 죄 사함과 주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기를 하나님께 원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힘있는 총독이나 화려한 자리에 앉아 있는 왕을 보면 그와 같이 되기를 원한다고 마음으로 비는데 바울은 오히려 그런 왕과 총독이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한다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담대한 복음의 대한 확신 구원에 대한 확신이 어디에서 나왔을까요?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영원한 생명의 본질을 발견하였을 때에 이 땅에 존재하는 권력과 명예와 권세와 쾌락과 화려함의 실상이 일 순간에 지나가는 현상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러기에 자신의 목줄을 쥐락 펴락할 수 있는 총독과 왕 앞에서도 전혀 주눅 들거나 눈치보지 않고 담대하게 복음을 증거할 수 있었습니다.
왕과 총독과 버니게와 함께 앉은 사람들이 거침없는 바울의 전도를 듣고 더 이상 할 말을 잃고 다 일어나서 물러가 서로 의논한 말이 무엇입니까? “이 사람은 사형이나 결박을 당할 만한 행위가 없다.”였습니다. 이에 아그립바가 베스도에게 어떤 의견을 냅니까? “이 사람이 만일 가이사에게 상소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석방될 수 있을 뻔하였다”하였습니다. 취조결과 혐의없음 이라는 것입니다.
전도축제에 직장 동료들과 후배와 형수님에게 전도하였습니다. 결과적으로 다 이런 저런 사정이 생겨서 빈 그물이었습니다. 저의 복음 전함이 왜 이렇게 능력이 없는지 과거에는 전도를 하면 열매가 꽤 있었는데 요즘은 왜 전도가 씨알이 안 먹히는지 고민이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전도도 구원도 전적으로 하나님이 하시는 것인데 내가 하려고 했구나가 인정이 되어 자신의 힘을 포기하고 자녀들과 가족들과 전도 대상자들을 내 손에서 내려놓고 하나님 손에 맡기게 되었습니다. 또 먹고 살 만해지니까 세상의 권력과 부와 명예와 화려함에 취하여 영원한 복음과 한 영혼에 대한 구원의 가치를 알아보는 눈이 탁해진 자신의 모습이 깨달아져 회개가 되었습니다.
제가 말씀 앞에서 자기 죄를 보고 회개하므로 복음 안에 있는 영원과 생명을 예리하게 파악하고 지체들의 고통과 슬픔과 부족을 세심하게 관찰하여 내가 살아난 말과 삶으로 복음을 표현하는 성령의 전도를 하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친히 전도하시고 살리시고 구원하시는 성령의 전도에 쓰임받기를 원합니다.
적용하기) 내 모든 집착과 힘과 노력을 빼고 자녀들과 가족들과 전도대상자들을 구원하기를 저보다 더 원하시는 하나님께 맡기고 간절히 기도하고 기다리겠습니다